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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겸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
조회수 | 2,579
작성일 | 07.08.30
[서울] 겸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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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잔치에 초대를 받으면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자세와 배려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바리사이를 비난한 이유는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고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이기적이고 우월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에 초대한 주인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보답을 받지 못하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이 세상의 시각으로 뒤처지고 손해만 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래하는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만큼을 주었으면 그만큼을 되돌려 받아야 합니다. 절대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거래법은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 당신의 가장 소중한 외아드님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인 것 같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을 생각하며 아낌없이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겸손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로 가는 확실한 길이며 그곳을 들어가는 열쇠가 됩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처지에 맞게 겸손하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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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염수정 추기경
2019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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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행복할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윗자리에 앉으려고 서로 밀치며 자리다툼을 하는 것을 안쓰럽게 바라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그리고 집 주인인 바리사이에게도 한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오늘은 예수님의 낮추는 이가 되라는 말씀과 갚을 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라는 이 두 가르침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맹사성이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학문으로 19살에 장원 급제를 하고 20살에는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를 해 그 자긍심이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파주 군수로 가 있던 어느 날 맹사성은 한 고승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했습니다.
 
"스님, 제가 이 고을을 다스리는데 어떤 덕목을 최고로 삼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스님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며 막힘없이 대답했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십시오."
 
그 말에 맹사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화를 냈습니다.
 
"그런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말인데 이렇게 먼 길을 온 저에게 그 말씀밖에는 할 것이 없으십니까?"
 
그 말에는 대꾸가 없던 스님이 녹차나 한 잔 하고 갈 것을 권하자 맹사성은 마지못해 다시 앉았습니다. 그런데 찻잔에 녹차를 따르던 스님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찻물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넘친 찻물로 방바닥이 금방 흥건해졌지요. 화가 난 맹사성이 스님을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행동이시오? 지금 나를 모욕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한 마디 하는 것이었습니다.
 
"찻물이 넘쳐서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서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그리 모르십니까?"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시뻘개진 맹사성은 그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려다가 그만 방문에 머리를 찧고 말았습니다. 그 때 스님이 또 한 마디를 조용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답니다."
 
그렇습니다. 머리를 숙이면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 꼿꼿이 머리를 세우고 상대방에게 숙일 것을 요구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줄줄이 부딪히게 되지요. 삶이 힘들어집니다.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3-14).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과 어우러지기를 좋아하지요. 낮은 계층 사람들과의 접촉을 불편해하며 멀리하고 싶어 합니다. 나에게 득이 안 되는 사람과는 관계하고 싶어 하지 않지요. 우리는 참으로 영악하게 되돌려 받을 만한 사람한테만 빌려주고 나에게 이득이 될 만한 사람과의 친교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 영원한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나에게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며 내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아진다는 말씀과 되갚을 수 없는 이들에게 베풀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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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마음

오늘 복음 말씀은 평소 우리가 갖고 있던 선입관이나 편견을 깨뜨리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루가 14,1). ‘바리사이’라는 말은 왠지 남의 말꼬투리나 잡는 악하고 거짓으로 가득 찬, 부정적인 이미지로 우리 머리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바리사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요한 3,1 이하의 니고데모 참조). 그러나 통상적으로 바리사이는 위선자나 이중인격자의 대표처럼, 예수님의 적대자로 늘 간주되어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에 대한 이런 기존의 시각을 뒤엎고 식사 초대에 응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갖고 있는 선입관을 사려 깊게 재고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예수께서는 두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식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손님)을 향해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식사에 초대한 사람(주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식사에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너는 초대를 받거든 오히려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8.10.11). 여기서 맨 끝자리에 가서 앉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의 행복과 기쁨을 더 배려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짊어져야 할 작은 십자가이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필립비서에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마땅히 지녀야 하는 생각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들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새번역 필립 2,3-5.8-9). 그러나 자기 중심적 행복 찾기는 하느님이 주신 고귀한 사랑의 깨달음을 오히려 방해합니다. 바리사이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이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며 자신들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식사에 초대한 주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이다”(루가 14,13-14). 하느님 나라가 발견되는 자리는 가진 것이 없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믿을 데라고는 오직 하느님뿐인 삶 안에서입니다. 이런 삶에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려는 확고한 의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홍승모 미카엘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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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겸손

무술계의 한 대가가 오랜 연마 끝에 유단자 자격을 갖춘 제자에게 신중한 어조로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검은 띠를 받는 참 뜻이 무엇이냐?"

너무도 쉬운 질문에 자신만만해진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검은 띠는 긴 수련의 끝을 의미합니다. 제가 그동안 연마한 모든 노력의 대가로 얻는 보상입니다."

스승은 제자의 답변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아직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1년 후에 다시 오너라."

실망한 제자는 1년 동안 더욱 열심히 수련을 쌓은 뒤, 다시 스승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스승은 이번에도 작년과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검은 띠를 받는 참 뜻이 무엇이냐?"

한결 성숙해진 제자는 작년보다 훨씬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검은 띠는 수련 과정에서 기량의 진보를 공적으로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이번에도 작년과 똑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너는 아직도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1년 후에 다시 오너라."

한동안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던 제자가 이번에는 인격 수양에 집중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후 다시 스승 앞에 섰습니다. 스승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검은 띠를 받는 참 뜻이 무엇이냐?"

제자는 아주 조심스럽고 겸손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검은 띠를 받는다는 것은 시작을 의미합니다. 더 큰 깨달음을 향한 여정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 대답에 아주 흡족해진 스승은 드디어 "너는 이제 검은 띠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홍병식, 룗성공할수록 겸손해지는 미덕룘 참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겸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는 아침마다 묵묵히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집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이 오면 낙타는 또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조용히 기다립니다.

언제나 주인 앞에 고분고분 무릎을 꿇는 낙타 모습에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매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인 앞에 말없이 무릎 꿇는 모습, 매일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행하는 모습, 주인이 매일 얹어주는 짐을 아무 불평 없이 지고 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낙타는 자신이 지고 가는 짐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낙타에게 짐은 무거우나 짐으로 인해 낙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고통과 십자가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그 무엇이나 그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더욱 겸손해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생각할수록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할 때 사실 우리는 가장 약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가장 강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약자이기에, 또는 무지하기에 뒤로 물러서는 나약함이나 비굴함이 결코 아닙니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는 일입니다.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어놓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는 일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내려만 갑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심연의 밑바닥 거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 2004-08-29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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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길

영세한 사람이면 누구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만 신앙을 떠드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확고 부동하게 믿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깊은 확신도 없고 기본적인 반응도 없이 입으로만 믿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사도신경’에 나타나 있는 볼 수 없는 사실들을 전부 완전히 믿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입으로만 말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자기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뜻을 알며 자기의 소신을 다해서 진리로 삼습니다. 때로는 굳은 신앙을 가진 분들도 신앙의 시련 속에서 의심도 가져 보며 많은 고통을 받기도 하나 그들의 극심한 고통은 결국 그들에게 신앙이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분명히 말해 주었고, 또한 사랑과 생활이 신앙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히 지능에 속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며, 신앙에 동의하는 것은 성총의 능력 아래서의 지적 행동인 것입니다. 굳은 신앙을 가졌다면 성세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 잘 깨달아 용감히 그 일을 ‘선택’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고도 후에 자꾸만 그 선택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은 신앙이 약해진 까닭입니다. 순교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용감히 선택함으로써 그들의 ‘선택의 불변’을 실제로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지상적인 것을 사랑함에 있어서 주님의 뜻에 맞도록, 주님의 뜻에 따름으로써, 이 모든 것을 실로 주께 향한, 주께 온전히 의지하고 매달리는 그러한 사랑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나 그 사랑은 주께 대한 사랑 속에 있는 것이기에 주님께 대한 사랑 안에 묶여지고 그 사랑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 속에 있어 나름대로의 특징하는 일, 특기가 다르나 이 모든 것이 종국에는 천주님 안에 있고 천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며 당신을 위한 살아 속에 있어야 하므로 신앙과 사랑은 하나로 향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루가 14,11) “위대한 자 되리만큼 도리어 자기를 낮추라, 그러면 주 대전에 은총을 얻으리라”(집회서 3,8) “내 마음이 양선하고 겸손함을 배우라”(마태오 11,29)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야고보 1,20)

“온화한 언사는 동료를 많게 하며 원수의 마음도 누그러지게 한다”(집회서 6,5)

“네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줄로 생각지 말라. 두려워하건대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시는 천주님 앞에 네가 남만 못할까 하노라. 네가 무슨 좋은 일을 하였다 하여 교만하지 말라. 네가 무슨 선한 것이 있다면 남들에게는 이보다 더 선한 것이 있을 줄로 생각하여 겸손한 마음을 보존토록 하라. 네가 너를 모든 사람 밑에 둔다고 조금도 해가 없지만 한 사람이라도 너를 높이게 되면 해로울 것이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항상 평화가 있으나 교만한 자의 마음에는 분노와 질투심이 자주 일어난다”(준주 성범 1권 7,3)

“너는 네가 원하고 바라는대로 되지 않는다고 번민할 것이 무엇이냐?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나도 그렇지 못하고, 너도 그렇지 못하고, 세상에 있는 사람으로는 그러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왕이나 교황이라 할지라도 무슨 걱정이나 괴로움이 없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면 남보다 좀 낫게 지낸다는 자는 누구냐? 그는 천주님을 위하여 고통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준주 성범 1권 22,1)

“남의 조그마한 잘못을 책하면서도 나의 더 큰 잘못을 상관치 않고 지낸다. 남들 떄문에 내가 얼마나 큰 괴로움을 받아 참게 되는지는 꽤 빨리 깨닫고 헤아리지만 내가 남에게 끼치는 괴로움은 쉽게 깨닫지 못한다. 자기 사정을 올바르게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은 남에게 대하여 엄하게 판단할 것이 없을 것이다”(준주 성범 2권 5,1)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만족을 누리기 쉽고 평화를 누리기도 쉬울 것이다. 네가 칭찬을 듣는다고 더 거룩해지지도 않고 책망을 듣는다고 더 천해지지도 않는다. 너는 그대로 너다. 너는 네 속이 어떠한지를 잘 살핀다면 다른 이가 너를 가지고 무엇이라 하는지 상관치 않을 것이다. 사람은 겉을 보고 가치를 헤아리나 천주님은 마음에 깃든 것을 보신다. 사람은 행동을 살피고 천주님은 그 뜻을 살피신다. 항상 잘하면서도 자기를 변변치 못한 자로 여기는 것은 겸손한 마음의 자세이다”(준주 성범 2권 6,3).

서울대교구 함세웅 신부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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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습니다. 이제 아침, 저녁으로 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가을입니다. 한국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담장 주위에는 해바라기들이 태양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고, 교외로 나가보면 코스모스들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김장용 무우와 배추의 씨를 뿌릴 때입니다.

벌써부터 사람들은 얼마 남지 않은 한가위 휴가에 대해 얘기를 나눕니다. 우리 선조들은 한가위 때,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들과 하늘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는 차례를 지냅니다.

자기의 때를 아는 겸손함

저는 중학교 다닐 때, 집에 약간의 논이 있었기 때문에, 농사에 대해 조금 경험이 있습니다. 약 3천평의 땅이었지만, 보기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상 논에 들어가 일을 해보면, 땅이 넓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게 됩니다. 또한 농사일은 하루아침에 끝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해나가야 된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비록 3,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배운 것은 자연의 순리였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의 때(時)를 아는 겸손함입니다. 더운 여름에 하루가 다르게 자란 벼들은, 가을이 되면서 이삭이 영글고, 드디어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면 농부들은 기쁜 마음으로 낫을 댑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과 농부의 순수한 마음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농심(農心)은 천심(天心)이란 말도 이해가 됩니다. 순수한 마음이 없이 농사를 짓기는 힘듭니다.

농촌에 젊은이들이 없어서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다느니, 농촌에 시집을 올 사람이 없어 농촌 총각이 비관 자살을 했다느니 하는 기사는, 이제 별로 특종기사가 아닙니다. 현대는, 머리가 비상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전부 대도시로 몰려들어,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봉급을 타면서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영세민으로 전락하고 있는 도시 근로자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요즈음 사회는 무엇이나 최고를 요구합니다. 가정에서는 자녀가 공부벌레이기를 원합니다. 인륜(人倫)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만을 강요합니다. 학교에서도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인격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지지 않는 요령만을 가르쳐줍니다. 그 결과 지금은 어른 무서운 줄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가 필요한 것은 움켜쥐려는 살벌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겸양지덕(謙讓之德)이란 말은 현대인의 큰머리(?) 속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허공으로 사라지는 하느님의 말씀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바로 현대인의 기억 속에서 아득히 사라진 겸손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제1독서에 나오는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집회 3,18)라는 말씀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겸손하게 되면 될수록 너는 더욱 훌륭하게 된다." 또한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19)는 말씀은, 바로 현대인에게 충격적으로 선포하는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현대에는 옛날처럼 기적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나 똑똑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 25).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저히 남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으려 합니다. 더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기가 모르고 있는 것조차 '아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지를 은폐하기 위한 무수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자기의 말도 할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남의 말을 들을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귀 기울여 남의 말을 듣습니다"(집회 3,29).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우리가 너무 자신들의 얘기만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은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삶은 겸손함의 극치

예수님의 삶 자체는 바로 겸손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일생 중에서, 저에게 항상 묵상 주제로 남아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나자렛에서의 삶입니다. 공생활을 하기 전의 30평생 동안 묵묵히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아들로서의 신분을 지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해 나자렛의 삶이 필요했겠습니까? 지식이 부족했겠습니까, 아니면 능력이 모자랐겠습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은 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때를 아무 불평도 없이 기다렸던 것입니다. 마치 누렇게 익은 벼가 농부의 낫을 기다리듯 말입니다.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예수님도 요셉과 마리아에게 고개를 숙이고, 순명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임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직 자신의 때를 겸손되게 기다리는 자만이,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던 겸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14,11).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고백하는 솔직한 태도를 뜻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나약함을 하느님께 진솔하게 인정할 때,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하느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이웃을 억누르려 하지 않고, 그들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품어 안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은 정말로 하느님의 오묘함을 볼 수 있는 조건이며,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동시에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받지도 못하며 초대받을 수도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애덕임을 역설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갖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루가 14,14)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두고 사는 삶이, 바로 겸손한 삶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느님 나라의 삶입니다.

넓은 들판에 황금 물결이 넘실거릴 때를 미리 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맙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자연의 순리를 보면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존중하는 겸손한 태도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11).

서울대교구 최희수 신부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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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천국의 열쇠

조선 시대의 순교자 황일광 시몬(1757~1802년)은 백정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신분의 벽이 높았던 당시, 사회에서 천민인 자신을 형제처럼 여겨주는 신자 공동체를 지상의 천국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천국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서 거기에는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제2독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예수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면서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런 천국은 죽음 다음에 가는 곳이지만, 이미 이세상에서 교회와 함께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보이지 않게 교회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에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미사와 다른 성사들을 통해 필요한 은총을 선사해 주시며, 신자들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임에 함께 계십니다. 교회가 예수님과의 친교 안에서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이미 이 세상에서 천국의 씨앗이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를 황일광 순교자처럼 지상의 천국으로 느끼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을 감싸안고 보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세속의 논리에 편승하여 크고 화려하고 힘센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이신 예수님은 기꺼이 낮아지셨는데, 잔치 석상에서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던 이들처럼(복음) 자리다툼을 하고, 위상 높이기에 연연하지는 않는지요?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심’(창세 3,5 참조) 때문에 순명하지 않아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교만은 천국 문을 닫아거는 빗장입니다. 반면에 자신이 피조물임을 잊지 않고 주님께 순종하는 겸손은 하느님의 큰 권능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제1독서)이고,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일꾼이요 도구일 뿐입니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모두 각자의 처지에 맞게 겸손하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교회는 천국의 맛과 분위기를 낼 것입니다.

현대에는 자신을 앞세우고, 자아실현과 개인의 자유를 거의 절대시하는 풍조가 매우 강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과 영광을 우선시하는 겸손은 남에게 뒤처지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순교자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은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위해 재산과 명예는 물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들이 걸었던 길은 세속의 기준으로는 정말 바보 같은 길이었지만, 실상은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시고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겸손이 천국의 열쇠다!’ 그 열쇠를 받아 천국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서울대교구 손희송 신부>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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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겸손하려 노력하기보다
주님 사랑의 축복에 머물면 더 겸손해지는 삶

하느님의 초대와 축복은 우리 삶의 원동력입니다. 이 초대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임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의 움직임을 분별해 주시는 하느님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초대는 하느님의 사랑이자 주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길이 됩니다. 이 부르심이 축복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주님께 삶의 초점을 두고, 분별하시는 주님의 뜻을 찾아내는 기도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깨달으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사랑은 점점 더 크게 느껴지고 그 사랑이 자신에게 충만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현존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강화되면 겸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후에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가 은총임을 깨닫고 그것에 초점을 두고 감사하게 살아간다면 더욱 겸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를 분명하게 깨닫기 위해 우리는 보잘것없는 사람들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가난하고 장애가 있고 병들고 눈먼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은 노인복지시설이 된 「시몬의 집」은 초창기에 결핵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환자들은 저에게 주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었습니다.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인 「프란치스코의 집」에 살고 계신 어르신들 또한 저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는 것이 삶에서 예수님을 체험하는 길입니다. 그 사람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이 자신 안에서 커져갈 때 더욱 겸손해지는 삶이 됩니다.

겸손해지기 위해 나 자신을 낮추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기도 중에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을 자주 만나면 그분의 사랑으로 살고자 하는 의욕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그들이 우리를 기쁘게 만나주는 것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누는 삶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깨닫고 겸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면 어떨까요?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 서울대교구 김창훈 바오로 신부 2016년 8월 28일
  |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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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끝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드 배치로 어느 날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성주 사람들, 제주 강정, 세월호, 백남기 농민, 일자리를 찾아 절망하는 젊은이들…. 오늘 우리 사회의 끝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헤아려보려니 너무 많은 사람이 떠오르면서 서서히 마음이 아려옵니다. 살아가면서 모두 그 끝자리를 마다하고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끝자리에 앉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태어나실 때 보니, 남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동정녀 어머니를 두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으셨습니다. 그분이 자란 고향 나자렛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별 볼 일 없는 동네였습니다. 그분은 수도 예루살렘에서 유학해 공부하신 것도 아닙니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세상에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역사에서 눈여겨볼 가치가 전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젊은 나이에 세속적으로는 명분이 없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흔들림 없이 세상에서 끝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끝자리를 골라서 앉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떻게 그런 가르침을 주시고 모범을 보이셨는지 궁금합니다. 이것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교회 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면모를 외면하려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 보면 끝자리를 선택하는 솔선수범과 가르침은 아무 가치가 없고 무의미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꼴찌로 살다가 죽은 그 아드님을 아버지께서는 부활로 일으키시고 하늘에서 아버지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는 미사에서 바로 이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끝자리를 선택하셨고, 아버지께서 부활시키셔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겪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 끝자리와 맨 윗자리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꼴찌로 살아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끊임없이 아드님과 함께 계시면서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령과 함께 오늘도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고 구원 활동을 하십니다. 끝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맨 윗자리로 올려주신 첫 사례가 바로 예수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교회는 끝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는 우리는 이 믿음으로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끝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윗자리에 앉도록 봉사하는 것이 하느님을 믿고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 세상 끝자리의 사람들과 연대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무슨 영문인지 어린 초등학생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테러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 불행한 사람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고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이 꼴찌의 사람들과 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히브 2,17). 출생부터 십자가 죽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 신자들도 이 연대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 끝자리에 앉을 것인가? 어떻게 끝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연대할 것인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실천해야 할 과제입니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터와 이웃과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해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멀리 세상 끝으로,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주수욱 신부 2016년 8월 28일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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