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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참된 사람살이
조회수 | 2,319
작성일 | 07.08.30
가을 콩 타작을 생각하면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의 삶을 저절로 묵상하게 된다. 몇 해 전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도리깨질을 하던 나는 도리깨를 던져놓고 콩밭으로 나갔다. 꼬투리가 터져 떨어진 콩을 줍는 것이 쉽지 않은 도리깨질을 하는 것보다 더 알뜰한 일이겠다 싶었던 것이다.

한 바구니 가득 주운 콩을 타작마당에 계시던 아버지께 자랑스레 내밀자 아버지께서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얘야, 그렇게 알뜰히 주우면 날짐승이 한겨울을 어이 나겠니? 땅에 떨어진 건 나누라는 거다. 날짐승도 귀한 목숨 아니냐!”

무의식중에 벌어진 나의 이기심이 아버지의 이 말씀으로 인해 민망함으로 변하고 말았다. 학교 공부를 따로 하지 않은 아버지셨지만, 아버지가 꿰뚫어 보고 계셨던 피조물들의 어우러진 삶은 지금도 내 가슴에 새겨져 있다. 아버지의 지혜와 통찰은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떤 지식보다도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요즘 매스컴에 떠들썩한 학벌 위조 파문은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슬픈 웃음거리이다.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그리고 인정받기 위해 ‘나’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사회적으로 초대받았다고 여겨지는 ‘학벌지향주의’와 사회의 끝자리처럼 여겨지는 ‘무학의 지혜’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 말씀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초대하는 자리의 잣대는 우리가 들이대는 사회적 잣대와는 다르다. 사회적 성공을 마치 이 세상 삶의 성공인 듯 착각하며 살아간다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오히려 부끄러운 끝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임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먹이시는 피조물과 더불어 숨 쉬고 사셨던 아버지가 유난히 그리운 것은 참된 사람살이(더불어 살아가는 삶)를 살아가셨던 아버지의 삶의 지혜를 취하고 싶은 마음이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자리는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부를 모두 내려놓으라는 또 다른 초대일 것이다.

참된 사람살이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은 몇 년 전 이미 아버지를 통해 나를 초대하고 계셨다. 이제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기 위해 아버지의 지혜와 통찰을 내 삶의 방법으로 가꾸어야겠다.

수원교구성경봉사자 김미순 에메렌시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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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겸손한 태도

예수님께서는 일상의 아주 평범한 것들을 소재로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의 짤막한 두 개의 비유는 ‘잔치’라는 소재를 통해 보다 깊고 보편적인 어떤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응하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비유(14,15-24)도 같은 내용이다. 잔치를 우정, 인간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조그마한 사건이라도 현실을 초월한 신적인 메시지에로 개방되어있지 않은 현실이란 없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모든 것들이,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것들이 신적인 것에로 나아가는 길, 상징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그러므로 식사에 초대받았을 때나, 다른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할 때에 취해야 할 사회적 행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잔치에 참여해야할 우리의 태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모두가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11절)고 하신다. 이 비유는 바로 하늘나라에 대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자랑하여 내세우지 말고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올바른 사람으로 자처하고 자기의 특권을 뽐내어 주장하는 사람을 하늘나라에서 제외시키신다. 반대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기에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을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19).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 있어서도, 바리사이파 사람은 마치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랬듯이 하느님 앞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지만, 세리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당하다고 하며 자비를 구한다. 그래서 세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A. Stöger, Vangelo secondo Luca, vol. II, Roma 1969, p. 33).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규범은 겸손이라는 것이다. 겸손을 통해서 낮은 자리를 찾는 것이 하나의 은총이며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의 행위이다. ‘윗자리로’(10절) 불러 올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자리는 절대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 이다. 내가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손에 우리를 모두 맡길 수 있다면 그분이 우리를 크게 만들어 주신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모델이시다. 그분은 첫째이시지만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필립 2,9). 하느님 나라에서의 위대성이란 겸손과 봉사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낮은 사람이 되거나 그들 가운데 있도록 할 때, 우리는 가장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우둔함이 첫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기주의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사심과 계산을 버릴 것을 요구하신다. 잔치를 베풀 때에 똑같이 되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부를 것이 아니라, 되받지 못 할 사람들을 불러서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갚아주심을 기다리라(12- 14절 참조)고 하신다.

여기서는 첫째로 ‘무상성’을 가르치신다. 오직 진실되고 단순하며, 티 없이 맑은 뜻으로 행해지는 행위만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부차적인 계산 때문에 그 행위 자체가 파괴된다면 안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보상’은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14절) 주님께서 주실 바로 그것이다. 이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과 행동의 ‘무상성’을 되찾게 된다. 그 때의 행위가 겸손을 통해 위대 하게 된다.

둘째로는 이 무상성 외에도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바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간과해오고 있지 않았나 한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이들은 바로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며, 오늘날에는 노인, 기형아, 지체부자유자, 마약중독자, 감옥에 갇힌 이, 난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는 것도 겸손의 행위이며 마지막 자리를 택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윗자리에 오르라’는 초대를 받을 것이다.

제1독서의 ‘지혜’의 가르침도 복음과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주님의 능력은 위대하시니 비천한(겸손한) 사람에 의하여 그 영광이 빛나기 때문이다”(집회 3,18- 20).

이제 하느님 앞에 스스로를 낮출 수 있고 겸손된 자세로 주님 앞에 사는 우리의 모습이 진정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될 것이며, 그 겸손한 자세로 더욱더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으로 대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그에 대한 풍성한 갚음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고 바라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 도록 주님께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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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겸손한 사람

수년 전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면서 베들레헴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베들레헴에서 단연 돋보이는 ‘예수성탄 기념 성당’을 들러 보게 되었다. 특히 잊혀지지 않는 곳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장소라고 안내된 방이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작은 돌문을 지나야 하는데, 높이가 낮아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 누구든지 주님을 뵈려면 몸과 마음을 낮추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빤또하(Pantoja, 1571-1618)는 자신의 저서 『칠극』(七克)에서 “교만이 모든 죄의 근원”(집회10,13)이라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겸손한 마음은 훌륭한 덕과 뛰어난 기술을 담는 그릇이다. 그런데 다른 그릇은 부어 넣으면 넣은 만큼 차오르게 되지만, 이 그릇은 부어 넣을수록 더욱더 비게 된다. 그래서 부어 넣을수록 더욱더 담을 수 있게 된다.” 일찍이 노자(老子)도 “뛰어난 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마음에 두지 않기 때문에 덕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덕이 적은 사람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덕이 없기 마련이다. 뛰어난 덕을 지닌 사람은 함이 없어 인위적인 데가 없고, 덕이 적은 사람은 억지로 하여 인위적인 데가 있게 마련이다”라고 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14,7)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이 저마다 겸손해야 함을 강조하신다. 예수님께서 가신 바리사이파 지도자의 집 식사는 분명히 신분과 지위에 따라 자리가 배정될 만 하다. 그러나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좀 더 나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은 가차없이 일침이 될 비유를 말씀하셨다.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겸손하게 처신함이 얼마나 자신의 진가를 간직하는 태도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평소에도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거짓된 위엄과 인사받기를 좋아함과 높은 자리에 앉기를 주저하지 않음에 대하여 나무라지 않으셨던가!(루가11,37-44참조). “오만한 자의 불행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뿌리가 그에게 깊이 박혀있는 까닭이다”(집회3,28). 오만함이 지나치면 안하무인(眼下無人)이 된다(시편 10,5-6참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타인을 배척하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생각 때문에 결국 스스로 고립된다. 눈과 마음이 멀고 아집(我執)과 편견(偏見)에 사로잡혀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끝자리에 앉는 겸손의 덕을 지닌 성숙한 사람이다. 그는 겸손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영혼의 평온함을 유지하여 내적 생활의 성장을 이루며, 하느님께서 그를 높여주신다.

세상에서는 권력과 신분이 앞서고(에제28,2-6참조) 출세나 용모를 자랑함이 당연시 된다. 그러나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히브12,23) 앞에,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히브 12,24) 앞에 그것이 무슨 소용있는가?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 있다”(히브 12,22).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루가14,13) 같은 사람들과도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는 하느님 나라가 신앙인의 자리가 아니던가?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겸손한 사람이다. 사심 없는 맑은 신앙생활과 깊은 겸손의 은총을 간구하자.

수원교구 이상선(요아킴)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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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서 시작되는 겸손”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는 것은 우리의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높여야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인정하며 대우해 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낮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나를 얕보고 무시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그럴수록 더 자신을 낮추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는 것’이라고 집회서가 말해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스스로 낮추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능력과 영광만을 드러내셨습니다. 한결같이 자신을 감추시고 하느님 아버지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신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겸손의 덕을 기르기 위해 먼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덕은 굳건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멸시하고 천대해도 실망하거나 마음 상해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버지께 받는 인정만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데 힘쓰지 않고, 다만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사랑과 은총에만 관심을 둡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아끼시는지 알고, 그분의 사랑을 맛본 사람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칭찬에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낮은 자가 되셨고, 또 우리 역시 그러길 바라시는 예수님께서는 낮아짐으로써 얻게 되는 하느님의 축복만을 원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답 받을 수 있는 일보다 보답 받지 못할 자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을 보상보다 하느님 나라에서 받는 보상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믿음을 두면서, 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삶으로 우리를 들어 높여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이윤섭(요한사도)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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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진정한 겸손은 척(?)이 아니라, 삶입니다.

“자비의 해를 맞아, 아내 미카엘라는 아들과 함께, 오랜 시간 냉담을 한 남편 미카엘을 위해 가족이 함께 떠나는 성지순례를 계획했습니다. 남편에게 이 계획을 처음 이야기했을 때 미카엘은 안가겠다고 거부했지만, 가족이 함께하는 나들이 겸 성지순례라는 점을 강조하자 결국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무더운 한여름 날씨였지만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라, 아내의 마음은 설레고 흥분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남편은 퉁명한 태도로 출발부터 짜증스런 얼굴을 보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성지에 도착한 가족은 그래도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기로 하고 성지 미사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성지의 나무들을 전지하고 있는 관리장으로 보이는 아저씨에게 미사 시간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아저씨는 더운 날씨 속에서 일을 하면서도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고, 오히려 가족이 몰랐던 성지의 다른 좋은 곳까지 소개해 주셨습니다. 참 친절한 아저씨를 만났다고 기분 좋아하며, 성지 미사를 봉헌하러 성당에 들어간 부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관리장이라고 생각했던 그분이 미사를 주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사 후 성지 사무장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분이 바로 성지 담당 신부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겸손한 모습에 감동한 남편은 그날 바로 성지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청했고, 앞으로 냉담을 풀기로 약속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성지순례에서의 소중한만남과 체험이 자비의 해를 맞아 주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아내는 행복한 마음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올해 자비의 해를 맞아 많은 신앙인이 전대사를 받기 위해 성지를 찾아 순례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뜻하지 않은 체험을 통해 전대사와 더불어, 자비하신 주님의 사랑과 축복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신앙인들도 많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바리사이파 지도자의 집에 초대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음식을 잡수실 때 그곳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시고, 사람들에게 겸손한 삶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윗자리를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 안에는 자신이 먼저 다른 사람보다 더 대우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심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음을 경계하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루카 14,8-9 참조).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은 바로 우리가 이웃에게 베푸는 순수한 사랑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루카 14,12-14 참조).

겸손과 사랑의 모습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집회 3,17-18.20 참조).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할 곳이 바로 하느님의 도성이며, 예수님이 계시는 천상 예루살렘임을 제2독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히브 12,22-24 참조).

오늘 전례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겸손하며, 또한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성찰해 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천하는 겸손이 주님께 잘 보이기 위한 겸손한 척(?)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로 사랑을 실천할 때 바로 복음 말씀처럼 “의인들이 부활할 때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라는 약속이 실현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을 되새겨 봅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 수원교구 이재현 요셉 신부 2016년 8월 28일
  |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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