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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낮아지고 내어줌
조회수 | 2,231
작성일 | 07.08.30
얼마 전 교육계와 우리 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킨 전 동국대 교수 신정아씨를 기억하시지요. 신정아씨는 미술계에서 소위 잘 나가는 인재였다고 합니다. 올해 광주 비엔날레 예술 감독을 했고, 제법 유명한 사설 미술관에 큐레이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분이 학력을 위조해서 교수가 되고 감독이 되고 큐레이터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예일대에서 공부를 했고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미술계 일부에서는 신정아씨의 기획능력을 인정했다는 사실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능력은 있으되 학위를 허위로 위조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도덕적 불감증이 불러일으킨 일입니다. 일단 거짓으로라도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보자는 속셈이지요. 인정을 받으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테고, 탄탄대로의 성공의 길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한 개인의 명예가 실추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미술계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고, 꿈 많은 학생들에게 허탈감과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분명 한 개인의 그릇된 비도덕적 명예욕이 낳은 참담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정아씨가 학위를 위조했지만 실력은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또한 우리에게 생각할 화두를 던져줍니다. 실력보다는 학벌과 파벌이 우선시되는 교육계의 풍토, 특히 미국발 학위라면 검증절차도 별다른 효력를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미국 사대주의에 물든 교육계의 관행, 이것이 우리사회의 현주소인가 싶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교육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 망라해서 학벌과 파벌, 족벌, 지연, 여기에 더해서 미국 사대주의가 합세해 우리 사회를 비뚤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실력이 있어도 이러한 프리미엄이 없다면 남들이 알아주는 자리엔 언감생심,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스스로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려 할수록 우리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겸손을 미덕으로 삼아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 자신도 함께 높아졌던 우리 조상들의 겸양의 정신을 이제는 보기 힘들어 졌습니다. 한껏 자신을 높이고 과장해야 대접받고 인정받는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조상들의 미덕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이지만 이제 그러한 모습은 쉽게 찾기가 힘듭니다. 누가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누구를 찾아 그 탓을 돌리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되돌아보아야겠지요. 우리 자신이 모두 이 사회를 비뚤어지게 만들었으니까요. 물론 그 탓을 굳이 따진다면 자라나는 어린이, 청소년들이 아니라 기성세대 어른들이 더 많은 책임을 가져야겠지요. 권위가 인품이나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 권력에서 나온다고 믿고 그렇게 달려온 어른들의 책임이 큽니다. 뒤와 옆을 애써 외면하고 앞만 보고 달려온 탓입니다. 주위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외면하고 나 자신의 행복과 부(副)를 위해서만 달려온 탓입니다. 이러고서는 사회가 정상적이길 바란다면 그야말로 도둑놈 심보입니다. 저마다 편협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우리 사회가 겸손과 희생을 통한 상생의 사회이길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겸손의 미덕으로 살아주길 바라는 것은 너무나도 몰염치한 생각입니다.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연의 끈을 동원해서 남보다 더 높아지기를 바라는 못된 심보는 버려야 합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나를 지탱해 주고 대접받을 것이라는 편협한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가장 가난하고 겸손하게 사셨던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분이 되셨습니다. 자기희생과 내어줌으로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장 11절)라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이셨기에, 그분은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며, 인류의 구세주로 우리 앞에 계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들은 자기 욕심 다 부리고 허세와 이기심에 사로잡혀 산다’고 핑계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삶과 말씀이 바로 복음(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겸손의 삶을 살아갈 때 세상도 겸손해 지는 법입니다. 내가 낮아지고 내어 줄때 예수님께서 주셨던 하느님 나라는 우리 사회에서 커나갈 것입니다.

안동교구 배인호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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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여라

예전에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동양철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시는 외래 강사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연세가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저희 신학생들에게는 아버지 연배 정도 되시는 분이셨습니다. 수업을 하면서 잘 못 알아듣는 부분이 있으면 자유롭게 질문을 하고 때로는 저희들에게 질문을 던지실 때도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은 서양철학을 기초적으로 배워서 동양철학에서 사용하는 철학적 용어들이 익숙지 않아서 교수님과 저희들은 서로 서로 이해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희 신학생 중 한 명이 교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유학에 관계된 내용이었는데 교수님께서 자신은 잘 모르겠으니 다음 시간에 공부해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철학적인 내용이라 그냥 대충 이렇고 저렇다고 하면 저희들도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넘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 연세 많으신 교수님이 아직 어린 저희들에게 그것도 자신의 전공분야인데 부끄럽게 여기시지 않고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대답하실 수 있다는 것은 그 분의 인품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 신학생들은 그 이후 그분을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그분의 훌륭한 가르침에 감사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는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사람은 참으로 사랑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 보다 미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겠으며 남을 힐난하거나 비난하겠습니까?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필요한 첫 번째 덕은 '겸손'입니다. 자신을 내 세우지 않고 낮출 수 있는 사람만이 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 줄 수 있겠습니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를 먼저 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초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인 사랑을 많이도 듣고 배우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늘 어떻게 하면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 고민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에 늘 찾아갑니다. 병든 이를 찾아가 돌보아 주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든지 불의한 일을 당한 사람을 위해 변호해주거나 외로이 홀로 지내는 이들에게 말벗이 되어 주는 일들을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덕목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이 결여된 상태에서 하는 그러한 희생과 봉사는 또 하나의 자신의 욕심인지도 모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희생한다는 자만심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이미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에 다른 무엇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느님 앞에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겸손 되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께 자신을 '종'으로 겸손 되이 돌아보셨듯이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도 '주님의 종'으로 쓰여 질 것을 기도해야겠습니다.

안동교구 정도영 베드로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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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겸손 : “누가 너를 잔치에 초대하거든 끝자리에 앉아라.” (루카 14,8.10)

“누가 너를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앉아라.”라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일화가 있어 함께 나눠볼까 합니다.

신학교 3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몇 일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연락이 와서는 입대기념으로 콘서트 표를 끊어놨으니 서울로 올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수의 노래는 예전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달빛에 술잔을 기울이며) 즐겨 듣고 불렀기에 선뜻 승낙을 했습니다.

콘서트 장으로 가는 이들의 행렬이 지하철역에서부터 이어졌고, 또각거리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에는 그들의 흥겨움이 묻어났습니다. 콘서트 장은 초만원이었고, 찾은 이들의 들뜬 마음으로 후끈거렸습니다. 무대 앞은 특별석으로 매우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데도 그 자리는 벌써부터 매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콘서트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모두가 서서 기다리며, 가수의 이름과 노래를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콘서트는 앉을 새도 없이 세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고, 저도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하다가...아뿔사!

갑자기 이런 생각이 저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습니다.

‘저 무대 위에 서 있는 이가 예수님이라면? 이 자리가 성당이고 저 무대가 제대이며, 저 노래들이 성가라면? 성당으로 오는 이들의 발걸음이 지하철역에서 봤듯이 그렇듯 가볍고, 성가를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가 콘서트 장처럼 이렇듯 우렁차고 힘차다면...... 가수의 한 마디와 노래에 사람들이 환호하고 울고 웃듯이, 독서와 복음으로 봉독되는 말씀과 강론에 사람들이 환호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찬의 기적이 일어나는 제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자하는 신자들로 성당 좌석이 채워진다면 그 미사는 얼마나 복될까? 나에게, 우리에게, 안동교구에, 한국교회에 그런 날이 올까? 예수님 시대에는 분명 그러했을텐데, 갈릴레아 호숫가와 회당에는 예수님을 찾아와 치유와 위로 받으며, 기쁨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이렇게 많았을 텐데’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목자와 양떼는 어떻습니까? 무엇에 힘을 얻고, 무엇에 기쁨을 얻으며,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까? 오늘날 우리 자신들의 영혼과 정신과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봅시다.

거짓 겸손과 거짓 평화로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위한 첫자리보다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현실에 타협하는 끝자리에만 머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소외되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 심지어 힘없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자연 생명에게서 마저 자꾸만 멀어져 가고, 그들과 함께하는 자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느덧 끝자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끝없이 맴돕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일에 나 자신을 투신하는 것입니다. 나의 거룩함과 선행과 애덕이 세상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 그들이 뒤에서 뭐라고 말할지에 대해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것이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라면 주저하지 맙시다. 그런 일이 있다면 누구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일을 행하여,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칩시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빛이 되고 등대가 되어줍시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진정한 예배요, 겸손이며 첫자리입니다.

남상우 토마스모어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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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끝자리에 앉아라”

연중 제22주일이면서 순교자 성월의 첫날입니다. 교회는 ‘신앙의 해’를 맞이하여 “신앙의 재발견과 교회의 쇄신”이라는 주제를 앞세워 순교자들의 열정적인 신앙을 재조명하고, 동시에 신앙선조들이 살았던 교우촌이나 치명하였던 장소 등에 순례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 신앙인들의 삶이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치명 터나 교우촌 등지에 순례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 시대를 위하여 순교할 순교자는 왜 없는가라고 한탄했다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상대방더러 순교자가 되기만을 바라고 자신은 그저 성지를 순례하는 순례자이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순교자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할까요? 지난 주일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라고 하셨고, 또 오늘은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10) 하셨고, 이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라고 하십니다. 순교자의 태도는 순교하기 전에 우선 “끝자리에 앉을”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1-13)라고 고백할 줄을 아는 사람이 결국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이는 곧바로 바보나 등신 취급을 당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늦게 들어왔으면서도 남들보다 앞자리에 앉아야 하고, 공부라면 언제든지 남들보다 앞서야 하고, 재산이나 권력이라면 그것으로 남들을 내리누를 수 있을 만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우리시대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그 논리는 다분히 탐욕적이며, 상대방을 굴복시켜 주저앉히거나 끌어내려 기어이 끝자리로 내몰려는 반인륜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마지막까지 통하면 참 좋겠지만, 그러나 세상의 일이란 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질 정도로 그렇게 녹녹하기만 한 걸까요? 인류가 걸어 온 역사를 되짚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부터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권력은 기껏해야 십년을 못 넘기고, 화려한 꽃이라도 열흘을 넘기는 경우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우리네 인생살이도 결국 아무리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써도 십년도 못가는 권력, 열흘도 못 넘기는 꽃일진대, 저마다 권력을 탐하고 재물을 축적하려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차라리 함께 서로 돕고 의지하고 나누고 섬기며 살 생각을 한다면 모두가 1등의 삶, 화려한 삶을 살고 누릴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사실 남의 생각을 꾸짖기는 쉬워도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의 틀을 바꾸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생각의 틀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꾼다는 뜻과 같습니다. “회개(悔改)”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닙니까? 못된 마음심보를 고쳐먹는 일, 끝자리에 앉을 줄 아는 일,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일입니다. 순교자성월 첫 날을 보내면서, 만일 주님을 위하여 목숨마저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봉헌한 순교자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현재 우리시대에 만연해 있는 물질과 권력과 학력 등등의 ‘최고지상주의’의 틀을 벗어버리고 주님 닮은 삶, 가장 낮은 곳에 서 있어도 만족할 줄 아는 마음부터 가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해’를 보내면서 “신앙의 재발견과 교회의 쇄신”을 희망하려면, 먼저 끝자리에 앉을 줄 아는 용기부터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 이미 끝자리에 앉아 있는 형제자매들을 존경할 줄 아는 마음부터 가져야할 것입니다. 박해시대를 살았던 선조 신앙인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자기 자리를 이웃들에게 내어 줄줄 아는 삶을 살았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오히려 끝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리는 내어주지 못할망정, 함부로 깔보고 멸시하는 일이 종종 있지요. 한줌도 안 되는 인생 안에서 탐욕을 부리기보다는 오히려 끝자리에 앉을 각오로 힘없고 어려운 이들 편에 서서, 서로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이 회자되지요. “나이를 먹을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라!” 참 괜찮은 말인 것 같습니다.

<안동교구 박윤정 바오로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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