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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겸손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조회수 | 2,657
작성일 | 07.08.30
요즈음 현대사회를 ‘무한경쟁사회’라고 일컫습니다.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고 더 갖고 싶고 더 잘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무척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꿈나무라고 하는 어린아이들부터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수많은 과외와 수업으로 훈련되고 단련되어 가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조금은 슬프게 만듭니다. 더 높은 곳으로, 더 좋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은 사람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선물로 주었지만 영혼의 피폐함을 부작용으로 가져왔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바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높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는 바리사이파 지도자들에게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가 14,11)라는 말씀을 통해 높은 위치의 사람들일수록 가져야 할 덕목이 바로 겸손임을 강조하십니다.

대청도에 살면서 자연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섬생활을 하면서 넓은 바다를 보며 이 바다와 같이 사는 사람이 멋지게 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바다는 넓은 가슴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좋은 것이라 하여 받아들이고 나쁜 것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내면화시킬 줄 아는 모습을 가르쳐 줍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바다는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고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진정한 겸손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다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내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선물로 선사합니다. 또한 바다를 보며 교만과 오만한 마음은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정도면 문제없다”라는 생각으로 바다를 대하는 이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겸손이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바로 자신의 뛰어난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자신을 낮추는 바다와 같이 하느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라는 말씀과 같이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는 이에게는 그만큼의 더 큰 하느님의 선물이 주어지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겸손이 얼마나 필요한지 더욱더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의견만을 피력하고 다른 이들의 의사를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일을 추진하고 성사시켜 나가기가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좋은 모습으로 일이 마무리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조금은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하느님께 봉사하고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예”라고 대답해 주시는 분들과 함께 하는 일들이 더 좋은 모습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분들일수록 바다와 같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과 순종적인 모습으로 내면에서부터 좋은 영적열매들을 잉태하고 탄생시킵니다.

이번 한 주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며 우리들 내면에서도 좋은 영적열매들을 잉태하고 탄생시키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다처럼 멋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인천교구 김미카엘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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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신부보다 열심한 신자들

서운동 성당에 둥지를 튼지 4년. 다른 본당 신자들과 대화하다 보면 “성당이 어디에 있느냐?”, “이름이 왜 그래요, 뭐가 그렇게 서운해요?”라는 이야기를 늘 듣습니다. 이 기회에 잠깐 소개를 드리면 서운동 성당은 작전동과 계산동 성당에서 분리된 지 5년 정도 된 신설본당으로 현재는 공장이었던 건물을 수리하여 성전과 교리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이 ‘토지구획 정리 사업 지구’라 올해 안으로 다른 곳에 임시성전 터를 마련해 이사가야 하고 땅이 정리 되는대로 성당을 지으면 되는 곳이지요.

처음 이곳에 부임했을 때는 솔직히 건축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건축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 제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어렵고 힘든 건축을 하기 보다는 돈이나 많이 모아놓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은연중에 이런 뜻을 비쳤더니 신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럴 수가 있냐? 배신이다. 한 배를 탔으면 같이 내려야지 중간에 어디로 가느냐? 누군 고생하고 누군 편히 쉬려고 그러느냐!’는 등등 공갈과 협박(?)을 서슴지 않더니 나중에는 ‘신부님 걱정 마세요. 설계는 설계사가 하고요, 집짓는 건 건축가가 그리고 감독은 감리사가 합니다. 아! 돈은 우리 신자들이 모을 테니까 신부님은 기도나(?) 하세요’ 하며 살살 달래더군요. 그 말에 홀딱 넘어가 교구 여건이 허락된다면 짓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정말이지 이 어려운 시기에 건축금을 모으기 위해 개인뿐만 아니라 구역별로 고생들이 너무 많습니다. 안쓰럽다 못해 눈물겹습니다.

한편 보좌신부는 물론 수녀님이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이 겪는 불편과 어려움이 어디 한두 가지 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제 걱정해 주는 신자들이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그리고 전출과 전입세대가 너무 많아(작년 1400세대 중 442세대가 전출, 272세대가 전입함) 사람이 자주 바뀌지만 부르심에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답니다.

또 기도는 얼마나 잘 하는지요. 제 특기가 기도요 취미가 성체조배인데(?) 저를 능가합니다. 아픈 신자가 있으면 각 구역별로 성당에 모여 9일기도 하는 것은 물론 얼마 전에는 단체에서 주관하는 본당행사를 위해 54일 동안 기도를 바치기도 했답니다. 개인과 가족을 위한 기도는 물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고 멋있는지 모릅니다. 이런 신자들 안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자기를 낮추며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잔치를 벌이는 의인’(루가14,11-13참조)의 모습을 봅니다. 더 나아가 이들을 통해 세상은 훨씬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느낍니다.

참! 서운동이라는 이름은 상서로울 ‘서’(瑞)에 구름 ‘운’(雲)자로 상서로운 구름이 늘 머물러 있는 동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서적으로 풀이하면 ‘야훼 하느님께서 현존해 계시는 곳, 성령의 기운이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뜻도 되지요. 이름도 멋지지 않나요?

인천교구 김영욱(요셉)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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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가치"

주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들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가십니다. 거기서 주님은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 다음(루카 14,2-6),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보시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깊이 새겨야할 두 가지 내용을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는 식사에 초대받은 손님들을 향해, 윗자리가 아니라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권고하시고(루카 14,10), 다른 하나는 식사에 초대한 주인을 향해, 부유한 이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4,13).
 
사실 수종은 붓고 부풀어 오르는 병입니다. 주님은 삶에서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는 교만한 마음을 수종을 앓는 사람에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기로 선택한 신앙인들의 삶도 자신만을 위하는 교만으로 한껏 부풀어 올라 있을 적이 많습니다. 세상이 갈망하고 열광하는 힘을 얻으려고 우리 모두는 내적으로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교만이라는 수종을 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교만은 주님의 뜻에 반대하고 저항하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이런 삶에는 거짓이 진실인양 부풀어 올라 진실을 가리고 있습니다. 비움, 가난, 겸손, 종이라는 신앙의 덕목들이 주는 아름다움이 가려있고, 오히려 권력, 부, 교만, 자기중심적 삶이라는 세상의 가치들만이 중히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니 늘 윗자리에 앉고 싶어 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서로 만나고 식사에 초대하는 경우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삶을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주인공 의식이라는 증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만연한 주인공 의식이란 자신의 자아만을 내세워 모든 것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용어는 연극과 관련이 있습니다. 연극에는 주인공과 조연이 있습니다. 조연은 연극을 이끌면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주인공 의식이란 자신의 삶에서 조연은 없고 자신만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증상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은 각자 삶의 현장에서 조연의 역할만을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꾸고 바라보면,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인 자신도 사실 다른 사람의 삶에서는 조연일 뿐입니다. 공동체 삶에서 자신은 주연일수도 조연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당연한 진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직 자신만이 옳고, 오직 자신만이 그 일을 맡아 할 수 있고, 오직 자신만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교만으로 살아가곤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자신만을 위해 움켜진 부와 허영과 교만을 통해, 늘 '좀 더'라는 탐욕을 마음에 불러일으키고 그것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몰입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자신만을 위해 움켜진 부와 허영과 교만을 멸망에 이르는 3가지 단계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좀 더' 움켜줘야지, '좀 더' 윗자리에 앉아야지, '좀 더' 높아져야지 하는 탐욕은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며, 결국에는 자신을 주님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구조가 주는 이런 가치들은 결국 지나가고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경고합니다(1요한 2,16-17).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거기에는 영원함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가치를 가르쳐 주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를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3-14).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과 책임과 봉사는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양심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데서 시작하는 신앙의 가장 고귀한 실천적 행위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루카 4,18), 심지어 당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25,40).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여정을 선택하신 주님의 삶은 우리를 위해 가장 낮은 자리를 선택하신 주님 사랑이라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놀라운 주님 사랑은 무엇인가를 늘 필요로 하는 가난한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여기에 세상과는 구별되는 신앙인의 가치 기준과 행동 양식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시편 68,6-7).

홍승모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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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악의 뿌리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은 사연이다. 한 가족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한다고 했다. 그 주입식 교육이란 “아빠는 왕이다”라고 아들에게 매일 가르치는 것이다. 그 덕에 아들은 “아빠는 왕입니다”라고 잘 외쳐댔다. 그러던 어느날 집에 손님들을 많이 초대하였고, 아빠는 그 손님들에게 “우리 집에서 내가 누군지 알아?”하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으스대려고 아들을 불렀다. “아들아, 아빠가 누구지?”라고 묻자 많은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아이는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들을 보자 아빠는 귓속말로 주입시켰던 말을 알려주었고, 재차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아빠가 누구라고?” 아들이 대답했다. “아빠는 개입니다.” 이런 대답이 나온 이유는 바로 아빠가 아들에게 귓속말로 “왕, 왕, 왕, 왕”이라고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이를 개가 짖는 소리로 알아 들은 것이다. 집안의 왕이 개(?)가 되는 순간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초대를 받는다. 예수님 뿐만 아니라 많은 손님들이 초대 받았다(루카 14,1.7). 아마도 바리사이파 지도자의 집에 초대 받은 손님들은 초대한 사람의 격에 맞는 사회적-종교적 지도층 계급이었으리라고 가늠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시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행동은 우리들의 삶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누구나 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그런 자신의 위치를 -앞의 이야기에서 본 아빠의 모습처럼- 남들 앞에서 으스대며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마치 내가 세상 모든 것을 움켜쥐고 다스리는 양 행동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거만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질타하신다. 제1독서인 집회서에서는 이러한 오만한 모습과 행동으로 찾아오는 “재난에는 약이 없으며” 그 이유는 바로 “악의 잡초”가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집회 3,28). 더 나아가서 주님의 은총과 총애를 받기 위해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욱 낮추는 겸손을 요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오묘한 신비를 드러내시리라 약속하신다(집회 3,18-19).

예수님께서는 더 나아가 당신을 초대한 사람에게 누군가를 잔치에 초대할 때 친구나 친척 혹은 잘 사는 사람들을 초대하지 말고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초대하라고 권유하신다. 눈 앞에 보이는 이득만을 쫓지 말고 하느님께서 주실 은총을 보며 자신의 것을 나누라는 말씀이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겸손하지 못해 악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는 오만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송태일 안셀모 신부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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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려서부터 남을 이기도록 배우고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배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최후의 만찬에서도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곳 요양원에서 근무한지도 벌써 4년째가 됩니다. 요즘은 어르신들이 웬만하면 90세 너머 사십니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하면 오래 사시는 것이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인 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도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에 마음에 상처가 많으시면 남과 갈등을 일으키고 공격적이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기 쉽습니다. 치매가 있거나 자신의 절제력이 무너지면 어르신의 성격과 상처가 여과 없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르신들 중에는 인격적으로 매우 성숙되고 겸손하신 분도 계십니다. 부모님을 면회하러 오신 자녀분들도 이미 연세가 50~60세가 넘으신 분들이 대부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르신의 인격과 인품이 그 자녀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됨을 봅니다. 어르신의 인격이 성숙되고 진정으로 겸손하신 분은 그 자녀의 인품도 성숙되고 겸손하게 닮은 것이 보이고 경제적으로도 대부분 중류 이상의 안정된 삶을 유지하는 것이 보입니다. 인격의 성숙과 물질적 안정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듯이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잔치를 베풀 때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요양원에서 보니까 진정으로 겸손하고 인격적으로 성숙되신 분은 이미 그 자녀들까지도 물질적 축복을 받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며칠 전(8월 23일) ‘리마의 성녀 동정 로사’에 나오는 성무일도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우며 얼마나 고귀하고 보배로운지 또 그 안에 얼마나 숱한 재화와 보물, 기쁨과 감미로움이 담겨 있는지 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온갖 관심과 열의와 힘을 다해 고통과 괴로움을 얻으려 할 것이고 비할 수 없이 고귀한 은총의 보화를 얻기 위해 온 세상 모든 이들은 쾌락보다 질병과 아픔과 고뇌를 찾아내려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상을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공로를 측정하는 그 저울을 사람들이 안다면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십자가나 역경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인천교구 정귀호 다니엘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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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방에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냥 무작정 밖으로 나가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비까지 부슬부슬 오는 것입니다. 괜히 기분이 더 안 좋아지더군요. 부슬부슬 오는 비가 마치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거의 1시간 가까이를 걷다가 다시 사제관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우연히 어떤 자매님을 만났는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어제 낮에 산책하시는 신부님을 봤어요. 우산을 쓰고 깊은 사색에 잠겨서 홀로이 산책하는 모습이 정말로 멋있었어요.”

저는 힘들고 어려워서 그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싶어서 산책하고 있었던 것인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런 내가 오히려 멋있게 보였나 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은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다른 사람의 눈에서는 멋있게 보이고 부러워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스스로가 힘들어 할 뿐이지, 엉망진창의 시간도 아니었고 최악의 순간도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미워하셔서 그런 시간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가장 좋은 시간을 주셨는데,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주님께서 가장 좋은 시간을 주셨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들을 내세워서 어렵고 힘들다고 불평불만 속에 빠지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 뜻은 자신을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세상의 기준들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는 것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부유한 이웃들만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그 보답을 하느님께서 직접 해주신다고 하시지요.

인간의 품위는 오로지 주님만이 높여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직접 높여 주시는 그 보답을 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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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높아져야 할 분은?

요즘 신부님들 또는 교우들과 담소를 나누다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신부님(형제님), 아재 악령이 들어와 있습니다. 빨리 쫓아내야 합니다.”

근래 유행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아재”(‘아저씨’의 낮춤말인 사전적 의미로 요즘은 유행에 뒤처진 개그를 하는 사람을 일컬음)를 소재로 삼아 빙의된 학생을 구하기 위해 나선 퇴마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개그프로그램을 따라 하며 함박웃음을 짓곤 합니다.

아재 악령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농담을 하는 요즘 이야기지만 한편으론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영을 쫓아내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바리사이들을 보며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고만 하는 영을 끊임없이 쫓아내야 함을 느끼게 됩니다. 남과 비교하며 더 잘나야 하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높은 곳에 올라서려고만 하는 세상의 현실 앞에서 많은 교우들이 교만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교우들뿐만 아니라 사제로 살아가고 있는 저 또한 교우 분들의 사랑을 과분하게(?) 받은 나머지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섬기기보다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 하며 교만에 빠져 있었던 저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겸손의 영으로 더욱 무장해야 함을 느낍니다. 높아져야 할 존재는 바로 내가 아닌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높아져야 할 존재가 되는 순간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 교만을 몰아내야 합니다. 오늘 제 1독서 집회서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20)

주님의 권능이 크심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 안에 살아갈 때 우리들은 자신을 높이기보다 주님을 높이게 되는 신앙인이 됩니다. 주님을 높이는 사람은 자신의 미약함을 알고 다른 이웃 형제들의 미약함도 이해하기에 주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바리사이처럼 윗자리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 겸손된 마음으로 주님을 높이며 형제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가려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루카 14,10)

▮ 인천교구 송찬 요셉 신부 2016년 8월 28일
  |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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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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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관장 신부님! 젊어 보이세요.”
“몇 살로 보이는데요?”
“오십 대 초반으로 보여요.”
사실 나는 오십대 초반이다. 우리 사무실 직원이 나에게 젊어 보인다고 하며 건넨 말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웃으며 넘겼던 대화가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저런 생각과 맞물려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진짜로 젊어 보이는 건 아니니 ‘젊어 보이는 척하지 마라.’, ‘이제는 나잇값 좀 하고 살아라.’ 척하지 말라는 말은 되새길수록 기분 좋은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내 모습을 바라보면 척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신앙인으로 살지 못하고 신앙인인 척, 사제로서 살지 못하고 사제인 척, 그래서 사랑이 되지 못하고 사랑인 척하면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길 한다. 정의가 되지 못하고 정의로운 척 정의에 대해서 이야길 한다. 자비가 되지 못하고 자비로운 척 자비에 대해서 이야길 한다. 척한다고 진짜가 되는 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언제쯤이나 척하지 않고 진짜로 살 수 있을까?”

Episode 2

얼마 전 교구 사제들이 공유하는 회의록이 이메일로 도착했다. 문자화된 회의록에 “사회복지 담당하는 이상희 신부가 갑질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는 모 신부님의 발언 내용이 들어 있었다. 회의록에서 내 이름이 언급된 ‘갑질’ 부분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혼란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교구청에서 사회복지 7년을 하면서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어느 순간, 본당 신부로서 있을 때의 당당한 모습은 사라지고, 비굴할 정도로 여기저기 고개 숙이는 게 버릇이 되었고,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언어가 습관처럼 되어 버린 일상들. 몇 번씩 거절당하고 상처받는 게 이제는 버릇처럼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갑질’이라는 단어 하나에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갑질이 뭐지?’ 하는 생각에 사전을 찾아보았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짓’이라며 아주 난폭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갑질의 의미를 보고 나니 더욱더 불편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대로 안 되겠다 싶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묵상하고 기도를 했다. 믿음이 약한 탓인가? 아니면 성장이 덜 된 탓인가? 회복이 되지 않았다. 급기야 무례하게 한참 선배인 교구청 신부님께 전화를 해서 퍼부었다. “신부님, 저는 인권도 없습니까?” 오만무례하게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그야말로 하극상 갑질을 하고 말았다. 하극상 갑질을 당한 신부님은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몇 날 며칠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십자가의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대신해 대가를 치르고, 수없이 고개 숙이고, 일상에서 거절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아파하고 절망하면서도 희망하는 것. 그것이 신앙인이고 사제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회복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제쯤이나 갑질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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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상희 마르티노 신부
2019년 9월 1일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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