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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낮춤을 배우자
조회수 | 2,234
작성일 | 07.08.30
연중제 22주일인 이번 주일 복음 성경은 낮춤에 대해서, 그리고 진정한 자선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혹시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또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주인이 와서 너에게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 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무안하게도 맨 끝자리에 내려앉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미 언제부턴가 우리 시대는 홍보 시대, 또는 PR시대가 되었습니다. 혹자는 PR을 해석하기를 “피를 흘리면서까지 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우리 시대는 홍보시대입니다. 국가든, 기업이든, 회사든, 상품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나 알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회사도 알려져야 그 회사에서 만드는 상품이 잘 팔리고 좋은 가격을 받게 됩니다. 연예인도 알려져야 몸값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알려지게 하기 위해서, 유명세를 타게 하기 위해서, 기업이나 연예인들이 홍보에 쓰는 돈과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 사람은 자기가 드러날 때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서 분수 이상으로 자기를 과장하고 과대하게 드러내고자 하게 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됩니다. 창세기의 설화 이야기에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 동산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면서도 하느님께서 금한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짓고, 그 죄의 결과로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게 하였던 일도 따지고 보면 격에 어울리지 않게 과대하게 자기를 드러내고자 했던 교만때문입니다.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기만 하면 피조물인 인간도 창조주이신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결국은 범죄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첫 인간 아담과는 달리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없이 자기를 낮추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자, 곧 하느님이시면서도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첫 인간 아담은 피조물이면서 하느님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세상에 죄와 죽음을 초래하였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면서 자신을 낮추시어 피조물인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써 인류에게 다시금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혼인잔치에 초대받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는 오늘 복음 성경의 말씀은 예수님 당신 친히 이미 자신을 낮추셔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심으로써 몸소 이 말씀의 가르침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체 사진을 찍을 때에 항상 가운데 자리, 제일 중심 위치에 서서 사진을 찍히려고 유달리 신경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회의석에서 필요하지도 않는데도 꼭 자기 말을 한 마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건이 안되면서도 꼭 명품만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이 꼭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속내라고 단적으로 평할 수는 없습니다만, 여하튼 격에 어울리지 않게 드러나고픈 마음이 생길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대구대교구 김정환 미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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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는 없다, 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말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이 말이 진실임을 실감하 게 됩니다. 우리가 이웃으로부터 어떤 호의를 받았 다면 분명 그것을 갚아주어야 합니다. 또 누군가 나 를 도와주었다면 그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어야 합 니다. 주는 것이 있어야 받는 것이 있으며, 주는 것 과 받는 것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는 것을 세상 사람 들은 정의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의 질서란 정의에 바탕을 두고 만 든 것입니다. 물건을 사고 팔 때 정당한 값을 치러 야 하고(교환정의), 사회에 공헌한 만큼 재화와 명예 등의 혜택을 받아야 하며(분배정의), 사회의 선을 위하여 공동체 구성원으로써 합당한 세금을 비롯한 사회적 의무를 지켜야(법적정의) 합니다. 만약 이러한 질서를 어기면 사회적 비난을 받을 뿐 아니라,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의가 이루어질 때 세상은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들 사이에, 친한 친구 사이에, 함께 사는 이웃사이에 정의만 고집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여유 그리고 인정이 없어짐으로 세상은 참으로 삭막해져 살 맛나지 않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정의에 따르면 나와 관계가 있고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사람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 것을 요구하십니다. 약삭빠르고, 영악한 사람들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보답이나 대가를 고려하지 않고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행위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회정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정확히 계산하며 살아가도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사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당신의 형제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께 돌려드릴 수 없는 은총을 공짜로 받았으니,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과 배려의 잔치를 공짜로 베풀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을 닮을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다움을 간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구대교구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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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미국 제16대 대통령이었던 링컨이 하루는 집무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누군가를 만나야 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급히 나오는 바람에 꼭 챙겨야 할 서류를 빼놓고 말았습니다. 백악관 수위실을 지나갈 때쯤 서류를 두고 온 사실이 생각난 링컨 대통령은 근무하는 수위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급히 나오다가 서류 하나를 빼놓고 왔는데 자네가 젊으니까 얼른 가서 가져올 수 있을 걸세. 책상 위에 보면 노란 봉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을 좀 가져다주게나." 수위는 링컨의 말대로 서류를 가지러 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놀랍게도 대통령이 수위인 자기 자리에 앉아서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각하께서 이렇게 하찮은 자리에 앉아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링컨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자네가 나를 위해서 대신 일 해주는데 내가 자네 자리에 앉아서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세상 사람이면 누구나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오르는 사람일수록 온유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갖기 보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거만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링컨은 오늘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처럼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이든지 기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남을 위하는 마음을 먼저 가지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겸손한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억지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아도 주님 말씀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낮출 때, 우리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하는 자만심을 버리고, 나에게 있는 단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럼 없이 고백하며 겸손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해야겠습니다.

2007년 9월 2일 대구대교구 주보 편집부 제공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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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낮은 자의 하느님

“신부님,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열심히 기도해도 그분의 존재를 가슴 깊이 느끼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름대로 꽤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들 중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아직 하느님보다 내가 더 높은 곳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올라가려고만 하는 내가 지극히 낮은 곳에 계신 그분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내려갈 때 비로소 주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됩니다. 내가 그토록 똑똑한데 성경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오겠습니까? 내가 누구보다 뛰어나고 높은데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겠습니까?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 될 때 진정으로 우리는 낮아질 수 있고, 그 내리막길에서 비로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도 많고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는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납니다.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집회3.20) 왜냐하면 하느님 역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실 만큼 지극히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르스의 성자’라 불린 요한 비안네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겸손은 모든 덕(德)을 엮어놓은 묵주와 같고, 교만은 모든 악(惡)을 엮은 묵주와 같습니다.” 나무에 뿌리가 없으면 나무가 지탱할 수 없듯 사람에게 겸손이 없으면 다른 모든 덕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반면 교만에 빠지면 하느님과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인간 원죄의 시작이 교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신앙인은 자신을 굽히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낮추는 그만큼 하느님이 높여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 질 것이다.” 그리고 드러내지 않는 그만큼 하느님이 갚아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에게 받는 것보다 하느님께 받는 것이 훨씬 더 값지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까요?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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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낮은 자의 하느님

“신부님,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열심히 기도해도 그분의 존재를 가슴 깊이 느끼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름대로 꽤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한 분들 중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아직 하느님보다 내가 더 높은 곳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올라가려고만 하는 내가 지극히 낮은 곳에 계신 그분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내려갈 때 비로소 주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됩니다. 내가 그토록 똑똑한데 성경 말씀이 내 귀에 들려오겠습니까? 내가 누구보다 뛰어나고 높은데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겠습니까?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 될 때 진정으로 우리는 낮아질 수 있고, 그 내리막길에서 비로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도 많고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오묘한 신비는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납니다.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집회3.20) 왜냐하면 하느님 역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실 만큼 지극히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르스의 성자’라 불린 요한 비안네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겸손은 모든 덕(德)을 엮어놓은 묵주와 같고, 교만은 모든 악(惡)을 엮은 묵주와 같습니다.” 나무에 뿌리가 없으면 나무가 지탱할 수 없듯 사람에게 겸손이 없으면 다른 모든 덕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반면 교만에 빠지면 하느님과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인간 원죄의 시작이 교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신앙인은 자신을 굽히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낮추는 그만큼 하느님이 높여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 질 것이다.” 그리고 드러내지 않는 그만큼 하느님이 갚아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에게 받는 것보다 하느님께 받는 것이 훨씬 더 값지고 은혜로운 일이 아닐까요?

<대구대교구 이억수 필립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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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에서 나온 처세술 이 있습니다. 이런 처세술은 전해지는 격언을 되새기고,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데서 얻어 집니다. 경주에는 300년 동안 12대를 이어온 부잣집 이야기가 있습니다. 집안의 부를 지키 는 가훈이 전해지는데 참 흥미롭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얻으려다 화를 입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일만 석 이상 모으지 말고 남는 것은 사회에 환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주변 사방 백 리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나눔으로 좋은 평판을 얻을 뿐 아니라 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흉년에는 토지를 사들이지 않음으로써 원성을 받지 않게 했습니다. 사랑방에는 나그네들을 후하게 받아들이고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덕분에 그들에게서 방방곡곡의 세상물정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경주 부자는 독립자금을 대고, 광복 후에는 토지개혁을 겪고,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기증하기까지 후대 사람들에게 부자의 지혜를 전해주었습니다.

안식일 날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은 밥상머리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각자의 처지에 맞는 자리가 있습니다. 윗자리를 탐내려다 자리를 내어주는 것보다 끝자리에 있다가 윗자리로 불려 올라가는 것이 더 나은 처신입니다. 율법학자라면 그런 지혜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겸손한 이는 사람들의 사랑과 하느님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의 재난은 약이 없습니다. 교만의 죄악이 마음에 뿌리내렸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자선은 현세에서의 처세술만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위한 가르침입니다. 하늘나라는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어린이 와 같이 낮추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도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입니다. 겸손함은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통합니다.

요즘의 식사 접대는 상업적이거나 어떤 목적 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초대에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초대하는 사람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심 없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들, 장애우 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에 대한 초대는 그들이 갚지 못할 지라도 그들을 돌보시는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지혜의 책인 탈무드에는 베푼 돈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가르칠 뿐 아니라 사후에까지 동행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구호는 ‘하느님의 의’ 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 참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늘나라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나라에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낮은 이 들과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는 이들을 당신의 식탁에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겸손과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살다가 현세 에서 갚음도 받겠지만, 무엇보다도 큰 행복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잔치에 초대받는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김봉진 안드레아 신부 2016년 8월 28일
  |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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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함께 더불어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게 하소서.

▪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초대받은 자와 초대한 자가 등장한다. 초대받은 사람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초대받은 사람은 초대한 사람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하는 사람 또한 초대받는 사람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초대라는 말마디는 이렇게 서로의 의존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너라는 존재가 있어야 되는 말마디가 초대라는 것이다.

비유에 나타나는 초대의 자리 또한 나와 너가 어우러지는 혼인잔치의 자리였다. 예수시대의 혼인잔치는 먹고 즐기는 잔치라기보다는 ‘공동체적 사건’이었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먹거리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말 잔치였다. 나 혼자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자리였고, ‘우리’ 속에 나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 그런 잔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8절)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윗자리’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함을 말해 주는 자리다.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음을 자각해야 할 자리다.

초대받은 자가 스스로 윗자리에 앉고자 한다면 더 높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고, 이 무시가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든다.(9절) 스스로 윗자리에 앉으려 하는 사람은 초대라는 말마디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함께 더불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는 닫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윗자리와 상반된 ‘끝자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끝자리는 흔히 생각하듯 자기 낮춤, 겸손 또는 자기비하의 자리가 아니다. 비교우위에 근거하여 남보다 더 못한 자리가 아니라 남에게 영광을 받을 자리이기 때문이다.(10절) 끝자리는 내가 아니라 상대를 통해 내 가치가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다. 끝자리는 상대로 인해 만들어지는 내 자리의 시작이다. 내가 찾아나서는 자리가 아니라 남이 나를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는 자리, 이 ‘끝자리’는 나와 너가 만나는 ‘우리’의 자리가 된다.

▪ 묵상(Meditatio)

세상이 자꾸만 더, 더, 더 좋은 것에 빠져들고 있다. 남보다 더 배워야 하고, 남보다 더 벌어야 하고, 남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고 자꾸만 세뇌시키는 것 같다. 경쟁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이 당연한 것이라 말들 하겠지만, 왜 경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경쟁을 통해 내가 남보다 더 좋은 것을 얻어 누리게 되었다면, 타인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사회적 책임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백 원을 벌면, 그 백 원을 벌 수 있게 한 공동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제 능력이 뛰어나도 무인도에서 백 원을 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루카복음은 특별히 우리에게 사회적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촉구하는 복음이다. 내가 살아가는 곳은 공동체의 자리다. 공동체는 더불어 살아가야 할 자리이지 나 혼자만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너를 희생시키는 자리가 아니다.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감사해야 할 내 삶의 은인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기도(Oratio)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3,1)

▮ 대구대교구 박병규 신부
  |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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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겸손은 모든 행동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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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루카 14,8)는 말씀이 더욱 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서품 10주년(2001년)을 기념해서 동기 신부님들과 함께 이문희(바울로) 대주교님을 모시고 중국 상해를 방문했었습니다. 교민 신자 분들이 초대한 식사 자리에서 별생각 없이 빈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앉은 자리가 대주교님께서 앉으실 자리라고 해서 무안하게 일어섰던 일이 있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집회 3,20)는 말씀이 겸손의 가치를 더욱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 내적 삶의 바탕이 되는 기본적인 덕으로서 신앙생활의 모든 행동의 출발점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웃에게는 정직하게 표현하고 사랑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요즈음 겸손은 신앙의 차원이 아니면 실천하기가 어려운 덕목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겸손은 수치스럽고 굴욕적이며 천하고 비열한 것들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은 한줄기 빛으로 다가옵니다. 결점이 많아서 걱정하는 동료 수녀에게 “당신이 결점 때문에 매번 넘어지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이니 놓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수녀의 나약함을 사랑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만으로 채워진 영웅적 행동보다는 불완전함에서 드러나는 겸손이 더 많은 영적 유익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겸손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생태계의 온전함을 위해서도 겸손한 덕의 실천이 모든 인류에게 요구된다.”(「찬미받으소서」, 224항 참조)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보다는 자기를 앞세우기가 쉽습니다. 겸손의 덕을 꾸준히 실천하면서 제2독서에서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히브 12,22) 안에서 흥겹게 잔칫상을 받는 준비된 이들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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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손무진 요한 신부
2019년 9월 1일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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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   [대전] 이제는 내려놓아라.  [4] 2350
603   [청주]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라.”  83
602   [의정부] 사랑이란, 하느님을 위해 온갖 피조물을 벗어버리는 것  [2] 2486
601   [군종] 눈높이 사랑을 향한 버림  [2] 55
600   [제주]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1] 2394
599   [전주] 신앙생활  117
598   [광주] 삶을 헤아리면서…  62
597   [안동]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5] 2749
596   [부산] 내 삶의 첫째가 무엇인가?  [9] 2363
595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제자는 소유를 버리고)  [3] 1881
594   [수원] 참된 사람살이  [4] 2320
593   [인천] 겸손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7] 2658
592   [청주] 겸손으로의 초대  [1] 419
591   [마산] "낮은 문 - 겸손의 길"  [6] 2527
  [대구]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낮춤을 배우자  [7] 2234
589   [수도회] 낮은 자리 높은 자리  [5] 1964
588   [서울] 겸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  [8] 2580
587   [부산] 초대와 윗자리  [7] 2290
586   [안동] 낮아지고 내어줌  [3] 2232
585   [광주] 낮추는 삶, 섬기는 삶을 살자  [2] 2792
584   [전주] 초대  [3] 78
[1][2][3][4] 5 [6][7][8][9][10]..[20]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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