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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낮은 문 - 겸손의 길"
조회수 | 2,526
작성일 | 07.08.30
찬미 예수님
지난 주, 연중 제21주일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이번 주일 독서와 복음에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인 천상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낮은 문” 이라는 또 하나의 관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생활은 마치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험난한 광야 생활을 거쳐 약속의 땅인 가나안 복지로 나아갔듯이 이 세상의 온갖 유혹과 시련이라는 좁은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나그네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또 하나의 문 즉, 겸손이라는 낮은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좁기도 하지만 문턱이 너무 낮기 때문에 목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뻣뻣한 사람들은 결코 들어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겸손의 반대인 교만은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인 동시에 우리 인간 본성에 가장 깊게 뿌리 박혀 있는 죄악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보듯이 하느님과 같아지고자 했던 아담과 하와의 교만은 우리 인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으며 시시때때로 고개를 쳐든 이스라엘 민족의 하느님께 대한 반항과 불순종은 스스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리하는 결과를 빚어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보지만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을 통해서 나를 보고 우리 이웃들을 통해서 나를 되돌아보기 때문에 늘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비록 순간적인 잘못을 범하더라도 늘 하느님과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전반부는 겸손하라는 것, 후반부는 거저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겸손과 사랑은 결코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이야말로 사랑을 실천하는 밑바탕이며 그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늘 자기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아픔이나 모자람에 대해 눈길을 돌리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낮은 문을 스스로 거부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곧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겸손으로 사랑을 실천하셨는지 바오로 사도는 힘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비 2, 6-8).”  

마산교구 조정제 오딜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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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3,17-18.20.28-29
히브12,18-19.22-24ㄱ
루카14,1.7-14

오만은 모든 죄의 뿌리이다.

묵상길잡이 : 「오십 보 백보」,「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오십 보 백보」일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을 아는 사람은 결코 오만하지 않을 것이다. 오만은 모든 죄(罪)의 뿌리이고, 멸망으로 가는 문이다.

1.새끼손가락도 없으면 병신이다.

하루는 손가락들이 모여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다. 엄지손가락이 “그래도 손가락 중에는 내가 최고다. 항상 제일(第一)을 주장할 때나, 두목을 표시할 때는 나를 치켜드는 것만 봐도 알 것이다.”하며 자랑하였다. 그러자 둘째인 금지가 나서서 “하늘의 별을 가르킬 때도, 이것저것 지시를 할 때도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며 자기자랑을 하였다. 그러자 가운데 손가락인 장지가 나서면서 “그래도 키도 내가 제일 크고, 생긴 것도 내가 제일 멋쟁이가 아닌가? 뭐니 뭐니 해도 손가락 중에는 내가 제일이다.”고 하였다. 그러자 넷째인 약지가 나서면서 “병들어 약을 다려 먹을 때는 항상 내가 저어야 하고, 목숨이 위태로울 때, 막힌 혈(穴)을 뚫으려면 내가 피를 흘려야 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였다. 그러자 제일 작아서 보잘것없고, 쓸모없어 보이는 새끼손가락이 가만히 듣고 있더니 “나도 중요한 약속을 할 때나, 귀를 후빌 때는 필요하고, 내가 없으면 병신인데!”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우스운 이야기는,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제 나름의 자존심은 있게 마련이고, 또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보여도 모두 제 할 몫이 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2. 제 잘난 맛에 산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착각은 “나는 주인공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위한 조연 내지 단역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할 때도, 모든 사건을 볼 때에도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은 보지 못하면서, 남들의 얼굴 생김새, 몸매, 옷매무새, 걸음걸이, 말투 등등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 이렇게 인간은 신체구조나 의식구조가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판단하고 살아가게 마련인지 모른다. 그래서 모두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할 수 있다. 이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남들이 보기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 모습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일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바로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교만을 낳는 것이다. 여기엔 “나는 너와는 다르다.”, “감히 나하고 맛 먹으려고!”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자만은 초등학교나 사춘기 학생들에게나 어울릴 유아적인 미성숙이 아닐까? ‘오십 보 백보’,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다. 하느님 보시기에 돈 있고, 많이 배우고, 잘났다고 뽐내는 인간들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우리는 온갖 위선으로 자신의 치부(恥部)를 가리고 포장한 자신이 하느님 보시기에 어떨지를 자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오만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나 두려움이 없는 증거이다.

3. 교만은 악의 근원이고, 겸손은 덕의 근본이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고 하신다. 누가 교만한 사람인가?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나 약점이 드러나면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디질 못한다. 누구나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지만, 오만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교만을 더욱 못 견디어 한다. 뿐만 아니라, 교만한 사람은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다. 오만한 사람은 누구나 그를 싫어하기에 참된 친구가 없고 고독하다.

교만 중에 가장 역겨운 교만은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다. 일을 좀 맡아 달라고 부탁을 받으면, 내심으로는 좀 더 애걸하기를 기다리면서 온갖 겸손한 어투로 사양하는 것은 참으로 역겨운 모습이다. 그러면 참된 겸손은 무엇인가? 참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선(비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겸손은 진실과 가장 가까운 것이다.

오만 방자함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기에 모든 죄악과 불행이 거기에서 나온다. 오늘 제 1독서에서는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집회3,18.28)고 하신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은 항상 맘의 평화를 누리고, 모든 덕이 싹틀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오셨고, 특별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죄인들과 가까이 하셨다. 성체성사를 통해 ‘훅- 불면 날아 가버릴 만큼’ 자신을 무한히 낮추시고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밥으로 내 놓으셨다. 지극한 겸손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음으로 그분이 주시는 평화와 구원을 체험하는데 신앙의 길이 있다.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주님, 저희 마음을 당신의 마음과 같게 하소서.” 아멘.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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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있는 그대로의 자신

그리스도인 곧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며, 예수를 주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앙인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또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방금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 곧 우리는 한마디로 낮은 자리에 앉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인들이란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자기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마치 자기가 그 잔치의 주인공이나 되는 양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거만하고 오만스러운 인간이 되지 말고,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도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예수는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의 이 말씀을 바탕으로 해서 참된 겸손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하고 우리도 진정으로 겸손한 신앙인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일이 겸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비굴하게 낮추고, 그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겸손일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계산된 마음으로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행위도 겸손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만함이며 거짓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겸손이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주제 파악을 하는 것을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겸손의 첫걸음이며,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한 마음으로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 내가 누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나는 내가 설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히 분간하게 됩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앉아도 되는 사람인지, 아니면 낮은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자기의 행동이 어떠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따라서 겸손의 첫걸음은 정직함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로 바라볼 수 없고 그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가정에서, 이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가 어디이며,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압니다. 터무니없이 비굴하게 자기 자신을 비하하면서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이일 저일 온갖 일을 간섭하는 사람, 아무런 협조도 하지 않으면서 뒤꽁무니에서 남을 헐뜯기나 하는 사람,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면서 형제들을 비판하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또 자신의 위치와 그에 합당한 처신을 하지 않는 오만한 사람이 많은 곳에는 늘 미움과 싸움과 분열과 불화가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만 합니다. 더불어 사는 것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가정이 그렇고 우리 사회가 그렇고, 우리 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모든 공동체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려면, 그 구성원들이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면서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자면, 가정 공동체 안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혹은 자기가 어떤 생활을 해야 할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또 남편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아내로서의 자신의 위치, 자식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 가정 공동체가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잘나고 똑똑한 남편, 잘나고 똑똑한 아내, 잘나고 똑똑한 자식들만 있는 집안은 얼마 못 가서 콩가루 집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공동체만 그런 것이 아니겠지요? 주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설자리 앉을 자리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오만한 사람이 많은 사회 공동체, 그런 본당 공동체는 늘 말썽과 불화와 분열 속에서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이란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나의 설자리와 앉을 자리를 구별하는 것이며,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 겸손이 또한 모든 공동체를 사랑과 일치로 이끌어 주는 가장 기본적인 덕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겸손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덕이지만, 동시에 하느님 자녀답게 사는 데, 또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본적인 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자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리고 주님의 제자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회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추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회개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루가 복음 11장 15절 이하에는 잃었던 아들의 비유, 곧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오만 방자했던 작은아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는 오만한 사람은 처음에는 제 마음대로 즐겁고 유쾌할지 모르지만, 그의 마지막은 불행과 비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난 작은아들은 돼지우리 가운데서 돼지가 먹은 구정물을 먹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작은아들이 자기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은 돼지우리 안에서입니다. 작은아들은 절망과 비참 가운데서 비로소 자기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됩니다.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들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작은아들은 그 때 눈이 뜨여서 자기가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용서를 청하리라 마음먹게 됩니다.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된 그는 겸손해져서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회심하여 새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거짓 없이 바라보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 성탄 기념 성당이 있습니다. 그 성당 안에는 예수께서 태어나신 동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성당의 문은 너무 낮고 좁아서 몸을 굽히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되이 이 세상에 오신 예수의 탄생지에, 거만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겸손해지는 사람만이 그 성당에 들어가서 예수의 탄생지를 순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겸손한 사람만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는 오만한 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뿐 아니라 내침을 받게 됩니다.

또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이지만, 용서받아야 할 죄인임을 아는 겸손한 사람은 다른 형제들의 허물과 약점을 참아 줄 줄 알고 용서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늘 오만하고 하느님 앞에 고개 숙이지 못하는 거만한사람이 이웃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흥을 보며 허물을 들추어 형제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지요.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 늘 교만한 사람이 자기의 모습은 보지 않고 형제의 허물만 보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일치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사람, 자기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서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되기 위해서도 겸손해져야 합니다. 끝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시작이자 바탕입니다. 끝으로 오늘 우리가 들은 제1 독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듣겠습니다.

“너는 들어라. 매사를 유순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리라. 훌륭하게 되면 될수록 더욱 더 겸손하여라. 주님의 은총을 받으리라.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들에게만 드러내신다. 주님의 능력은 위대하시니, 비천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영광은 빛난다. 오만한 자의 불행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뿌리가 그에게 깊이 박혀 있는 까닭이다. 총명한 사람은 격언의 뜻을 되새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귀 기울여 남의 말을 듣는다.”(집회 3, 17-20. 28-29).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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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복음적 덕행

오늘의 말씀은 겸손을 가르칩니다. 겸손은 신경증적 자기 비난과는 다릅니다. 대부분의 극단적 감정은 불안감에서, 특히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옵니다. 우리 시대는 고도의 경쟁 사회 안에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이 문화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좌절과 절망은 교만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지면 새롭게 태어납니다. 깊은 침묵 중에 하느님 현존의 지지를 끊임없이 받게 되면, 다른 사람의 반대를 받거나 이용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깊은 기도의 평정 속에서 우리는 새 사람이 됩니다. 자기비하감이나 복수심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모욕과 수치에서 무언가를 배울 만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겸손은 하느님과 내 자신과 이웃과 피조물에게 정직한 태도입니다. 하느님께 정직한 태도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참된 안전이시고, 무조건적인 사랑이시며, 만물의 지배자이심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의 주님, 내 바위, 내 성채이십니다. “하느님, 당신은 가련한 이를 위하여, 은혜로이 집을 마련하셨나이다.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화답송)

하느님께 정직해지면 내 자신에게 정직해집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전부이시기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압니다. 하느님을 깊이 신뢰하면, 우리 내면의 어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기 굴욕이 겸손에 이르는 길입니다. 영적 여정은 성공담이 아니라 연속된 자아 축소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자기 포기의 여정입니다.

겸손을 통해 세상 프로그램에서 점점 자유로워집니다. 많이 소유하고 높아질수록 겸손해지기 어렵습니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제1독서) 가난과 무력함의 한가운데에 이르면 자유를 맛보며,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선행에도 이기적인 동기가 섞여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우리의 선행을 들추어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자기를 잊는 것입니다. 자기를 잊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거짓 자아를 끝장내 주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하느님께서 행하시도록 동의하고 순명합니다.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 극단성이 아니라 단순성을 추구합니다. 결국 겸손은 단순히 존재하고 단순히 행하는 자유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을 닮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리 2,5-11)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생동안 겸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겸손에 우리 각자를 초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이청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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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누구를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 것인가?

요즘 권력자들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인간이 저토록 뻔뻔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적반하장賊反荷杖, 인면수심人面獸心, 파렴치破廉恥 따위의 한자성어가 눈앞에 겹칩니다. 권력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거짓말 정도는 얼굴 하나 일그러짐 없이 할 수 있어야, 윤리니 도덕이니 예의니 제 이익 제출세를 위해서라면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는 배짱 정도는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성경 말씀들은 ‘겸손’謙遜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로운 스승들은 한결 같이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쳤건만, 오늘날 미련스런 통치자들은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전에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humilitas’후밀리따스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원은 바로, ‘흙’ humus입니다. 아무 귀할 것도 없는 ‘흙’, 가장 낮은 자리를 메우고 있는 ‘흙’이 겸손이라는 말의 뿌리입니다.

창세기 2장 ‘인간창조’에 관한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당신 입김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흙’과 ‘하느님의 입김’은 인간의 두 뿌리입니다. ‘흙’은 인간의 ‘비천함’을, ‘하느님의 입김’은 인간의 ‘고귀함’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성서에서 겸손이란, 인간의 존재의 한 뿌리가‘흙’(비천함)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흙의 속성인, 낮음으로 귀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은 인간의 다른 뿌리인 ‘하느님’(고귀함)이라는 속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해줍니다.

반대로 ‘교만’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느님 높으심을 넘보는 탐욕으로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복음 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교만한 모습도 불쾌하게 여기시지만, 초대한 이에게도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하고 분부하십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까? 아니, 잔치까지는 아니더라고 누구와 이웃하며 친구하며 지내고 있습니까?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낮은 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덜 가진 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주위에 둘러보면 우리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분명 없지 않을 것입니다.

난데없이 해고당한 노동자도 있고,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가난한 사람들, 북녘의 우리 동포들, 몸이 불편하신분,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사시는 분 등…. 우리가 이웃하며 지내야 할 분들, 우리의 잔치에 초대해야 할 분들입니다.

<마산교구 하춘수 신부>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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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남에게 보이려는 겸손은 아닌가?

“윗자리에 앉지 마라.” 명령하십니다. 왜?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으면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기 때문에… 반면에 “끝자리에 앉아라.” 명하십니다. 왜? “너를 초대한 이가 앞자리에 올라앉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제라는 신분으로 본당에 있다 보면 예수님처럼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초대받을 경우가 있습니다. 초대받은 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참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부분 상석은 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 자리 끝자리에 앉아 있는 분을 한사코 상석에 앉으라며 몸을 떠미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윗자리에 앉을 분을 모셔오면서 전반적인 위치 이동이 이루지는 광경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따라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실천적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잠시 나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복음적 삶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겸손을 가장한 나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는 거짓 겸손도 숨어 있는 경우가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기도 할 때에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마태 6,1-18) 겉으로만 좋게 보이려고 하는 자(갈라 6,12)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에 대한 시선에 집중하다 보니 가장된 겸손이 자연스러움으로 자리매김 되어지는 것은 아닌가 성찰해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음을(루카 14,7)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만이 나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만이 나의 낮은 자의 모습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낮추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해 보는 오늘입니다.

▮ 마산교구 한주인 마태오 신부 2016년 8월 28일
  |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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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겸손 : 천국 입장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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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그 일에는 목적이 있고,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자주 목적과 방법을 혼동할 때가 있다. 신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사랑>이라고 쉽게 대답한다. 하긴 초등학교에서부터 예수님은 사랑을 가르치셨다 하고 배웠으니…분명 성경과 교회는 예수님의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의 죄 때문에 잃어버린 <하느님의 나라>를 되찾아주시기 위해서라고 가르친다. 하느님의 나라가 목적이요, 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하신 것이 사랑, 회개, 기도, 겸손, 나눔 등등이다. 하긴 이런 이론적인 것이 우리 신앙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인 오늘 복음과 독서의 내용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인 <겸손>에 대한 가르침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오 18, 3)“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보 4, 10) 겸손은 예수님의 가르침임과 동시에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차피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야 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하느님이시지만 비천한 인간으로 오셨고, 악령으로, 질병으로, 물질적인 부족으로,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들의 친구이셨고, 끝내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끌어안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부활과 성부 오른편에 자리하시는 영광을 입으신 것이다.

우리는 자연 안에서 진정한 겸손의 모습을 보고 배운다. 잘 여문 이삭은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가장 강한 힘을 지닌 물은 언제나 아래로 흐르며, 담는 용기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요구에 따라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리 찾기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겸손을 가장한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자. 명예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 중요한 존재라고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 권력과 높은 자리에 대한 집착으로 모든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할 것이다.

보르지아(Borgia)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을 깊이 새기자. “나를 낮추느라, 주님을 배신한 유다 밑에 있으려 했더니, 벌써 주님께서 그의 발치에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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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배진구 베드로 신부
2019년 9월 1일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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