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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겸손한 사람
조회수 | 2,699
작성일 | 07.08.31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예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말과 행동에 있어서 겸손을 강조해 왔습니다. 존대말이 따로 있고, 인사를 할 때에는 큰 절을 하거나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이는 것 등이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의로서의 겸손은 평등한 인간 관계가 아니라, 높고 낮음을 강조하던 봉건사회의 인간관계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분과 직업, 촌수등 갖가지 요소에 따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결정되고 겸손은 주로 아랫사람에게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겸손은 주로 아랫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들 누구나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고,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남으로부터 겸손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시며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1.4)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예의로서의 겸손이나 무안을 당하지 않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겸손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신을 자랑하여 내세우지 말고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교만은 온갖 죄의 근원이 됩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원죄는 바로 교만의 죄인것입니다. 하느님의 위치에 오르려는 교만,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교만이 결국 하느님의 은총을 잃게 하였고 고통과 죽음을 자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도 겸손해야지만 주님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겸손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으므로 어른에게 매달립니다. 마찬기지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오로지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겸손한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뿐만아니라 이런 겸손한 사람을 높이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겸손한 사람, 이웃에게도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의로서의 겸손을 넘어서서 겸허한 마음, 가난한 마음의 겸손을 드러냅시다. 겸손한 마음에서 겸손한 말과 행동이 나오지만, 겸손된 말과 행동을 통하여 더욱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겸손한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며, 높이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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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홍랑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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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위해 자기를 내어 놓으라고...

오늘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라고 합니다. 끝자리에 앉는 사람이라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합니다. 당신 스스로도 마지막 자리를 선택했고 아무도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왜 스승은 끝자리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교황 요한23세를 기억하시지요. 그분이 그럽니다.

사람은 저 하늘나라에서 만들어 졌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보내졌지요. 남을 위해서 자기를 내어 놓으라고 말입니다. 영혼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삷의 전부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큰 감격이었던지요. 몇 날, 몇 칠 동안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생에 대한 모든 물음들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그렇지요. 스승처럼 남을 위해 자기를 내어놓으라고 우린 이 땅에 보내졌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입니다.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사랑하는 거지요. 용서하고 싶지 않아도 용서해야 하며, 나누고 싶지 않아도 나누어야 합니다. 나를 내어 줄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유야 잘 모르겠지만 우린 그렇게 만들어졌는걸요.

끝자리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럴 때만이 남을 더 잘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었습니다. 사제인 나는 어디 있는지? 끝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얼굴이 없습니다. 그분의 자비로운 미소가 없습니다. 그분의 마음이 아니고 그분의 가슴이 아닙니다. 아무 제한이 없는 전적인 사랑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제 얼굴에서 한 사제를 보지만 하느님의 얼굴은 보지 못합니다. 자기를 완전히 바치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전례에 잘 참석하는 것으로, 겨우 계명 몇 개 지키는 것으로, 결국엔 자기 과시뿐인 약간의 선행만으로 우린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끝자리는 끝자리에요. 변명은 궁색하죠. 늘 '모든 이가 나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면 싸우는 일도, 나를 고집하는 일도 없습니다. 몇 마디 말 때문에 상처입고 원수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필요해서가 아니면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지 마세요. 유행이라는 것에서 좀 더 자유롭고, 소박한 생활 습관을 가지세요.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우기지 마세요. 잠시 맡아가지고 있는 걸요. 제때에 내 놓지 않으면 다시 거두어 가실 것을요. 이 자리가 내 자리라고, 나만이 할 수 있다고 말하지도 마세요. 그곳에서 아직도 할 일이 많고, 내가 필요하다해도 너무 오래 머물진 마세요. 얼마나 잡음이 많은지요. 생기가 없고 죽어가는 걸요.

우리가 끝자리에 머물 줄 안다면 사람들은 우리 얼굴에서 스승을 보겠지요.

원주교구 김찬진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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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에 앉아라”

“허영심·이해득실, 극복해야할 장애”

자신을 가장하여 자신을 좀 더 그럴듯하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허영심입니다. 이러한 허영심이 병적으로 발전하면 자기도취적 성격장애를 가져옵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으로 대인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장애의 특징은 인정에 집착하게 되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에 잠겨 타인의 찬사와 존경을 요구합니다. 성격장애 중 가장 흔하며 또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만 문제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보이는 사람과는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허영심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삶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강력하고 생산적인 힘이요, 최소한의 허영심은 우리를 죄책감에 빠지지 않고 활동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허영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는 허영심이 삶의 중심을 외부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삶의 중심이 외부로 옮겨지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다른 사람의 독단적인 평가에 맡기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의 욕심은 끝없이 다른 사람의 찬양을 갈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욕구가 성취되지 않을 때 우리는 타인보다 낫다는 사실을 강요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헐뜯게 되는 우를 범함으로 결국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는 비 복음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자리다툼을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자리다툼. 2000년 전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재 필자는 자치단체로부터 사회 복지시설을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기에 가끔 외부 행사를 하게 됩니다. 이때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누가 언제 축사를 해야 하고, 누구를 어디에 앉혀야 결례가 되지 않는지 등등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말은 쉽습니다만 실제 생활에서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어려운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애정을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더러운 오물도 자신의 것이라면 달라지는 것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인간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러기에 『과대평가를 하지 않는다』란 말은 객관적이란 말과 함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을 벗어난 눈, 「나와 너의 관계」를 벗어난 제3의 눈, 즉, 하느님을 의식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잔치에서 자리를 정하는 이는 초대한 사람이 자리를 정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이점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초대자, 하느님을 의식할 때 우리는 매일 우리를 유혹하는 허영심에서 벗어나 겸손이란 그리스도인의 처세술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비하 없는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는 되갚을 능력이 없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요구합니다.

한마디로 이해득실에 따른 대인관계를 넘어서라는 말입니다. 이해득실을 따진다. 계산적이다. 이 말들은 분명 우리의 머리에서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말입니다만,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즉, 『이해득실을 따진다』란 말은 머리에서는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선택의 기준입니다만 실제 생활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이 바로 이 말이요, 때로는 정의와 공평이란 가면으로 많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유혹의 마음입니다. 특히 시장 경제를 우선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해득실에는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정신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말이겠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이해득실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 이해득실을 넘어서야 하는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실망과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의 대부분의 원인이 바로 이 이해득실에 있기 때문이고, 또 인간이 사기나 도박 등 각종 헛된 욕심에 빠져 삶을 탕진하게 되는 것도 결국 비용과 보상을 따지는 이해득실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고 의지적인 삶」, 이해득실을 극복해야하는 당위입니다.

요약해 봅니다. 허영심과 이해를 따지는 마음. 모두가 극복해야할 대표적인 장애물입니다.

물질과 인간을 통해 이해득실과 인정을 추구하는 우리 삶의 자리에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이해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연습,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장애물에서 해방하는 길이 아닐까 오늘 복음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원주교구 홍금표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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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에 구원이 달렸다
루카 14, 1.7-14 : 겸손 천국 거만 지옥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가 남보다 낫길 원합니다. ‘내가 남과 같다. 남과 다를 게 없다. 평범하다.’고 생각되면 왠지 슬퍼집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라도 돋보이려고 합니다. 용모로, 지식으로, 재산으로, 높은 자리로, 명성으로, 실력으로, 재주로, 언변으로 뭐든지 남보다 돋보이려고 합니다. 남들보다 나은 게 있어야 자기만족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되려고 하고, 남을 다스리려고 하고,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이 윗자리를 좋아하는 것도 이런 마음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거나, 남보다 알아주지 않는다거나, 윗자리를 권해주지 않는다면 섭섭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낮은 자리를 싫어하고, 남이 나를 떠받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나보다 못하고 낮은 사람이 있어야 희열을 느끼고, 나보다 잘하고 높은 사람만 있으면 거북해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심리가 늘 작용하기 때문에 갈등과 싸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려거든 최저의 자리로 내려가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하고(마르코 9,35),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마태오 20,27),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사람이다.”(루카 9,48)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왜 본능을 거슬러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겸손한 이를 끌어올리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고,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야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은총을 더 받습니다. 정녕 하느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습니다.(집회서 3,28) 거만한 자의 마음속에는 악의 잡초가 뿌리내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겸손하게 살기란 참 힘듭니다. 겸손은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요? 구원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겸손을 위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이들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낮은 자가 되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덧붙여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우리 주변에 부유한 이웃만 가득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도 점점 더 거만해집니다. 거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재난만이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할 때 우리도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보답이 기다립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선교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는 봉사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리 저는 이를 부축해주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눈먼 이들의 길잡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할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만 모이는 특별한 잔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위선 때문에 화가 날 것입니다. 그것이 지옥입니다.

오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꼭 집어서 묵상해봅시다. 겸손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 천국이고, 교만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 지옥이니까요.

손용환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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