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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초대와 윗자리
조회수 | 2,289
작성일 | 07.08.3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느 바리사이파 지도자의 집에 초대받아 가셔서 식탁에 앉아 계십니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집주인과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초대한 이에게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초대합니다. 오늘도 결혼식에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부의금을 낼 때, 이미 그들에게서 받은 것이 있거나 아니면 후일 우리 차례가 오면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이해타산을 앞세우는 사회의 관행이요, 풍습입니다. 그러나 초대는 다음에 초대를 받을 것을 계산해서는 안 되고, 어떤 이해타산을 위한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다시 보답을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해타산에 빠릅니다. 가진 이에게는 관대하고 못 가진 이에게는 인색합니다. 생색나는 일에는 돈을 쓰고 생색나지 않는 일에는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해타산을 넘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라고 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잔치석상에서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보시고,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말씀하십니다. 낮은 자리를 택하는 현명한 처세술을 가르치십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질주에는 긴장과 반목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 질주에서 이웃은 모두 타도해야 하는 경쟁자로만 보입니다. 우리가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혹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무자비하게 형제 이웃을 대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분열과 분쟁과 분파를 조성합니다.(갈라 5, 20)

사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길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는 문제로 말다툼하였기에, 예수님은 “너희는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 26)고 하십니다. 주님은 겸양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유다 문화에 속한 인간과 사회의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시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너희는 이해타산에서 해방되어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나만 군림하겠다는 유아독존적인 자세와 교만을 버리고, 낮은 자리에 갈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부산교구 김기홍 베리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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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처신

예수께서는 오늘 겸손의 중요성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지도자 집에 들어가셔서 음식을 드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함께 모인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흔히 생기는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실 예를 들어서 가르치십니다. 만일의 경우 잔칫집에 전혀 대단하지도 못한 사람이 일찍부터 와서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고, 뒤에 귀한 손님이 오게되어 주인이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에게 아랫자리로 내려가 앉으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매우 난처하고 부끄러운 처지가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사람이 자진해서 말석에 앉아 있는데 주인이 와서 그를 더 좋은 상석으로 안내한다면 그 사람은 겸손한 처신으로 인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겸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서 겸손의 덕을 닦아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진정 겸손의 덕을 닦기 위해서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용서, 베푸심 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나임을 인정할 때, 내가 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오늘의 내가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감격하고 감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나타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겸손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사랑과 선행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공생활 중에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선행을 베푸는 것이 가장 가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인간은 그 사귐에 있어서 그 대가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무조건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팔을 벌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 대한 보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 나눔을 통하여 그 사람은 자기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얻게 되고 하느님께서는 더욱 풍성히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 지상의 삶에서 내 자신 안에 쌓아두고 감추어 둔 것은 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시에 인연을 마감하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따라 올바로 관리하고 그것을 절대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눈 것은 나의 죽음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그 모든 것이 나를 반기며 영원한 행복에로 초대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김태형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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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해타산에 빠릅니다.

루가 14, 1.7-14.

복음서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모습들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서 하느님 자녀가 되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어느 바리사이파 지도자의 집에 초대받아 가셔서 식탁에 앉아 계십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신경 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 그리고 원칙 하나를 교훈으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은 또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들은 집주인과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후일 그들은 집주인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행입니다. 결혼식에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부의금을 낼 때, 우리는 이미 그들에게서 받은 것이 있거나 아니면 후일 우리 차례가 오면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초대합니다. 이해타산을 앞세우는 우리의 관행입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하는 대우를 받고 싶고, 사람을 초대하거나 무엇을 베풀 때는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관행입니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낮은 자리를 차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초대할 때는 되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베푸는 잔치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베풀어서 그들을 행복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관행과 예수님의 권고 사이의 거리는 자기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소중한 나머지 우리의 주변은 우리가 이용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잘 되고 우리 자신이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과대포장 합니다. 입은 옷으로, 가진 자격증으로, 주어진 지위로, 가진 돈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시선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베푼 것을 되돌려 받아야 합니다. 되돌려 받지 못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하게 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이 우리만을 보는 우리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나는 하느님 자녀의 삶은 다릅니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실천에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중심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높이고 드러내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자비롭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비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상대방의 수준으로 낮춥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돌봅니다.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고 높이시면, 우리는 소신껏 살지 못하고 모두 위축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욕구 충족을 위해 우리는 전전긍긍 노심초사하며 노예와 같이 살 것입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오로지 지도자 동지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이북의 주민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 하나가 스스로를 높여도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비참한데, 하느님이 스스로를 챙기고 높이면 우리는 소신을 버려야 하고, 자유롭게 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또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또한 “그대들은 나의 벗”(요한 15,14)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에게서 자유롭게 배워서 자유롭게 하느님의 자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스스로를 낮추셔서 세상에는 자연 질서가 있습니다. 계절 따라 자연은 변하고, 계절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자유로운 인간이기에 우리를 감동시키는 인간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감동하고 행복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삶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시는 하느님이 중심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도 스스로를 낮추고 관대하게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질주에는 긴장과 반목과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 질주에 이웃은 모두 타도해야 하는 경쟁자로만 있습니다. 우리가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혹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무자비하게 달렸을 때,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외면한다 하더라도, 어떤 씁쓸함과 어떤 후회는 외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해타산에 빠릅니다. 가진 이에게는 관대하고 못 가진 이에게는 인색합니다. 생색나는 일에는 돈을 쓰고 생색나지 않는 일에는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도 나 한 사람 잘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도 돈을 바쳐야 은혜를 베푸신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도 돈을 내어야 병을 고쳐 주시는 것 같이 말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습니다. 한국이 경제 성장을 조금하면서 돈은 과대평가되었습니다. 교회들도 사람들도 모두 돈을 향해 달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근성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이해타산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런 해방은 한 번 깨달아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는 실패를 무릅쓴 꾸준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일도 되돌려 받지 않고 베푸는 일도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는 것, 준만큼 받아야 하는 이해타산의 철칙은 우리의 뼈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관행과 그 철칙은 우리의 살과 피가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살과 새로운 피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실천이 우리를 비추어야 하고 예수의 몸과 피인 성체성사가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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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기

물이 맑으면 얼굴을 비춰볼 수 있듯이, 참 맑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일그러진 모습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온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을 처음 만나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할 만큼 착한 심성을 갖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그리스도인들 같던 이 땅의 사람들이 이제는 세례를 받아도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바로 보지 않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라서 행복합니다.
죄 많은 사람이라서 행복합니다.
낮은 자라서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낮은 자라서 주님께서 높여주실 것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가난하고 부족하기에 주님께서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죄 많은 사람이라서 주님께서 용서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산교구 김인한 신부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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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늘 복음(루가 14, 1. 7∼11)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파 지도자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맞는 말이면서도 행동으로는 행하기가 정말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돈이 많으면 더 벌고 싶고, 왜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더 오르고 싶을까요? 아마도 인간 본능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본능을 거슬러 행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찾고 신앙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낮은 자리로 가려고 하는 마음은 주님을 닮고자 하는 겸손의 자세에부터 출발합니다. 겸손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라 합니다.

예전에 ‘교회 홍보 매체를 통하여 신자들이 바라는 사목자의 모습’이라는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문 조사 결과 신자들이 바라는 사목자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것을 추구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는 주님을 닮은 사제, 신자들을 어버이처럼 따뜻이 대하는 사제,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않고 낮은 자세로 사시는 사제 등 오늘 복음처럼 높은 자리를 추구하지 않고 낮은 자리를 찾고자 하는 사제였습니다. 어떤 공직 모임에서도 자리를 배정하는 담당자가 늘 걱정하는 것은 다양한 공직 사회에서 계급이 확실히 정하지 못한 사람의 자리를 배치하는 것이 참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왜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자리에 앉아야 하느냐고 항의를 할 때도 많다고 합니다. 좌석의 위치에 따라 사람이 평가되고, 평가받는다고 생각하는 세상에 대하여 참된 자리의 위치는 그 사람의 내면적 인격의 가치에 의해서 판단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정치 사회, 공직 사회, 교육 사회 등 우리 사회 전반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봉사가 아닌 군림의 자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자들이 사목자에게 바라듯이, 세상 사람들도 주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우리 신자들에게 바라는 모습이라는 설문 조사를 하면 어떠한 것들을 요구할까요? 우리가 사목자에게 바라는 것처럼, 아마도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은 작은 것부터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우리 각 개인의 모습,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좀 더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랑의 공동체로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김형근 신부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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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바리사이, 이들은 지켜보고 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초대받은 이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 율법에 충실하기만 하면 의로운 줄 알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바리사이와 율법교사들은 사회적으로도 대접을 받는 계층이었으니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가 당연히 신경이 쓰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 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자리’는 단순히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자리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우상의 자리, 유혹받는 자리를 경계하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들에겐 귀에 거슬렸고 맘 편히 들을 수 없는 말씀(루카 11, 37~54 참조)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도 초대를 받으셨으니 과연 어떤 자리에 앉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간 힘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 12∼13)

당시의 유다문화에서는 인간의 불행을 죄의 결과라고 보았고, 율법은 죄인들과 식탁에 앉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들을 초대하여 보답을 받지 못하는 친절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할까 하는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합니다.

세간에 학위(學位)를 가지고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학사, 석사, 박사 학위 보다 더 높은 학위가 있는데 술사, 밥사, 감사, 봉사라 합니다. 엄청난 경제력을 가지고도, 위대한 학벌을 가지고도 생각만큼 마음만큼 할 수 없는 자리가 술자리요, 밥 먹는 자리라는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감사할 줄 아는 자리, 봉사할 줄 아는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초대합니까? 또 초대를 받아 어느 자리에 앉습니까?”

<부산교구 김성규 안드레아 신부>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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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공감

오늘 복음 중에 예수님께서는“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 11)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겸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겸손의 시작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배려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공감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면서 그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몰지각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겸손은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돌아가신 울아버지 울어머니 겸손하라 겸손하라 하셨지만 지금까지 안되는 것 딱 한가지 그건 겸손이라네 겸손 겸손은 힘들어 겸손 겸손은 힘들어”- 조영남“겸손은 힘들어”중

생후 네 살이면 표현된다는 공감하는 능력이 오히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옅어진다고 하니‘육체의 성장과 영혼의 성숙을 함께 이룬다는 것이 참 힘든 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공감 능력이 뛰어나신 분이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의 사정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행동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하나뿐인 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루카7, 11 참조) 그녀의 슬픔을 너무나도 잘 아셨기에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에 대한 연민이 필요합니다. 그들 앞에서 나는 상관없다고 하기보다‘나 역시도’하고 겸손해지는 것이 공감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대신 겪으신 그리스도를 닮은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공감한다면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그 슬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공감한다면 그들을 매도하거나 조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래된 경기침체 탓으로 삶이 팍팍해져 타인의 아픔을 모른 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겸손해질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 부산교구 김혜연 신부 2016년 8월 28일
  |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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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낮출수록 높아진다

로마 그리스 시대 학교에서는 설득의 기술인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을 높일 수 있는지를 가르쳤습니다. 설득력을 지니려면 자기 말에 합당한 자격을 지녀야 하는데, 수사학은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자격을 적절히 자랑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바오로도 이러한 기교를 사용하곤 합니다(필립 3,4-6).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수사학과는 정반대로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하지 말고 낮추라고 권고합니다.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도 어리석은 가르침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로 복음을 선포하려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지켜내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18).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결코 설득력을 얻을 수 없다면, 복음의 설득력은 자신을 높이는 데서 오지 않고, 낮추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필리 3,7-11; 1코린 12,1-5).

그런데 여전히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 자체가 삶의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독서와 복음이 자신을 낮추고 죽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결국 자신을 높이고 살려내기 위함입니다(집회 3,18; 루카 14,10-11.14). 이렇게 보면 복음은 단순히 고통을 즐기라는, 슬픔을 즐기라는 마조히스트적 가르침이 아니라, 진정 자신을 높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자 합니다. 다만 알려주는 길이 일반적인 길과 다를 뿐입니다.

많은 이들은 세상의 관점에서 높은 자리, 높은 지위, 많은 재물을 얻는 데 행복이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 앞에서 높은 자가 되는 것,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 영원한 삶이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를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과 이웃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이들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 뜻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느님과 거리가 멉니다. 그런 이들은 아무리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 앞에서 높은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가련하고, 가난한 이들이 얼마나 행복한 이들인지를 노래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의 손길을 갈망하고, 그분께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이 자신을 낮추라는 것은 일부러 남 밑에 들어가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주님께서도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같이” 되셨습니다(1필리 2,6-8). 그러니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예수님의 길을 따라 자신을 낮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 그러하였듯이 우리도 들어 높여 주실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2016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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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   [부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9] 2461
621   [대구] 아버지의 마음  [3] 2380
620   [원주] 머리의 논리보다 가슴의 논리로 살자  [3] 2649
619   [춘천] 주님께서 돌아오길 기다리십니다.  [2] 98
618   [대전] 하느님 앞에 좀 뻔뻔해집시다.  [2] 2119
617   [청주]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73
616   [광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2715
615   [제주] 화해와 용서  65
614   [전주]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1] 82
613   (녹) 연중 제24주일 독서와 복음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4] 1894
612   [수도회] 제자됨의 길  [4] 2432
611   [수원] 제자들의 선택  [5] 2327
610   [인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7] 2488
609   [서울] 예수님을 따라갈 때 내려놓아야 할 것들  [9] 2717
608   [마산] 적극적인 포기  [4] 2577
607   [대구] 동행  [3] 2397
606   [춘천] 십자가를 보물로 여기십시오  [3] 2486
605   [원주] 천국행 네비게이션  [2] 68
604   [대전] 이제는 내려놓아라.  [4] 2350
603   [청주]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라.”  83
602   [의정부] 사랑이란, 하느님을 위해 온갖 피조물을 벗어버리는 것  [2] 2486
601   [군종] 눈높이 사랑을 향한 버림  [2] 54
600   [제주]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1] 2393
599   [전주] 신앙생활  116
598   [광주] 삶을 헤아리면서…  62
597   [안동]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5] 2748
596   [부산] 내 삶의 첫째가 무엇인가?  [9] 2362
595   (녹) 연중 제23주일 독서와 복음 (제자는 소유를 버리고)  [3] 1880
594   [수원] 참된 사람살이  [4] 2320
593   [인천] 겸손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된다.  [7] 2658
592   [청주] 겸손으로의 초대  [1] 418
591   [마산] "낮은 문 - 겸손의 길"  [6] 2526
590   [대구]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낮춤을 배우자  [7] 2234
589   [수도회] 낮은 자리 높은 자리  [5] 1963
588   [서울] 겸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  [8] 2579
  [부산] 초대와 윗자리  [7] 2289
586   [안동] 낮아지고 내어줌  [3] 2232
585   [광주] 낮추는 삶, 섬기는 삶을 살자  [2] 2792
584   [전주] 초대  [3]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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