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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조회수 | 2,748
작성일 | 07.09.08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그 뜻은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쟁에 임하던 임전훈(臨戰訓)이라고 합니다. 몇해 전인가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보다가 결전을 앞둔 이순신의 방에 있는 글귀였던 기억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이순신 장군의 당시 마음 이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앞두고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혈연의 인연을 끊고 자신의 위치와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결단입니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과 모든 장수와 병사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전장에 임했기에 결국 우리 민족을 일본침략의 칼 아래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13척의 배로 300여척의 일본 전함을 상대해서 대승을 거둔 것은 세계 해전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합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뒤집고 대승을 거둔 것은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 덕이기도 하겠지만,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정신이 이순신을 비롯한 모든 장병에게 있었기에 승리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내 가족과 나의 행복과 생명을 민족과 다른 사람을 위해 포기할 수 있을까요? 나와 내 가족의 행복과 평화가 아니라 더 큰 가치, 즉 민족과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을 오늘날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행복과 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일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웃는 현실입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이웃에게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는 일이 우리사회에서 커다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적인 탐욕에 눈이 멀어 국가와 국민들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 물질적인 손해를 입힌 공무원과 정치인의 부정부패는 우리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참으로 참담한 각종 사고와 사건의 현장을 손 놓고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개인적인 욕심과 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과 가족, 타인에게 커다란 상처와 고통을 주고 맙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장 26~27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이 내세우고 있습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 임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에게 내세운 임전훈과 비슷한 의미의 말씀입니다. 결국 비우고 버려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인간적인 걱정을 비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와 자식, 친지에 대한 걱정, 인간적으로 누리고 싶은 욕심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비우고 버릴 때 참으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내 욕심과 걱정의 틀에 사로잡혀 있으면 결국 우리는 그 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아니 언제나 새로운 일을 함에 있어서 발목을 잡혀 결단의 순간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은 모두 개인적인 욕심과 걱정을 떨쳐버리지 못한데서 일어난 결과입니다.

결국 개인의 욕심과 인간적인 걱정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신과 가족, 타인과 사회가 함께 사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산다는 의미이고, 더불어 함께 사는 상생의 사회를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더욱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욕심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나와 가족, 타인을 파멸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욕심과 걱정을 비우고 포기해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나도 살고 내 가족, 이웃을 상생의 길, 즉 하느님 나라로 이끌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길에 우리는 늘 놓여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해서 실천할 것인지 이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한 주간의 화두입니다.

안동교구 배인호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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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삼일(作心三日)

연중 23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돌아보시며 - 마치 목자가 뒤따르는 양떼를 걱정하며 돌아보듯이- 당신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길이 쉽게 만은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가 14, 25-26)

어떻게 사랑하는 가족들과 자신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말씀 가운데 제 가슴을 뜨끔하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 (루가 14, 30)

저의 삶이 매사에 의욕적인 시작에 비해 그 일이 마지막까지 가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작심삼일이라는 고사성어를 너무도 잘 지키는 것이 저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계획도 생각도 별로 없이 주어지는 대로 살아갑니다. 창조력은 사라지고 주어지는 것들만 처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마음 한 켠에 불편, 불만족이 가득하면서도 말입니다. 찬찬히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누구나 아직도 화려한 시작에 비해 마무리짓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음의 불편을 안고 언제까지 이런 날들을 보내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자신에게 되묻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불만에 차 있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가르침을 던져 주십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33절)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나만, 우리 부모, 형제 자매, 우리 집안만 등 자신을 위주로 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미워하라고 하신 그것은 바로 이런 이기심입니다. 우리는 좀더 함께 행복해지는 일들에 마음을 써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당장은 바보스럽게 보이더라도 꾸준히 행복을 위해, 참 기쁨을 위해 사는 것, 그것이 내 것을 버리는 행위가 아닐까요? 지금 잠시 풍요로움을 누리기보다,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을 위해 내 것을 포기할 때 우리는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잠시 기억을 우리의 과거로 되돌려 보기만 해도 우리는 버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인정있게 나누며 살았던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이 마음 훈훈하게 해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 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더 따뜻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봅시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 . .

안동교구 이재학 레오비노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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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일요일에 현충사갔었는데 가족들과...
칼두자루가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더군요.
칼에 뭐라고 써있던데...머리가 나빠서...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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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과 제자의 차이

많은 군중을 몰고 다시셨던 예수님이 군중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군중’이라는 단어와 ‘제자’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그분의 기적과 말씀을 체험한 모든 사람들을 일컬어서 군중이라고 표현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군중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누구나가 기적을 보고 싶어 하고, 색다른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큰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큰 손해를 보지 않고서도 신기한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이 보여주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위해서 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군중과 제자의 차이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군중은 예수님께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옆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제자는 예수님이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니까요. 실제로 그 많던 군중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있지 않았습니다.

군중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들도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계산해봅니다. 그래서 공사를 시작하고 기초만 놓은 채 탑을 세우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합니다. 또 전쟁을 치르는 임금은 자신이 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그 상황에 맞게 대처해서 전쟁에서지지 않도록 대처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갈 수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어떤 것이고, 그 십자가를 지기위해서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숙고해야합니다. 그리고 포기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손에서 놓아버려야 합니다. 놓지 못한 것 때문에 자신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위해서 놓아버리는 것은 우리가 군중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사람마다 다른 시기에, 다른 사건들로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다음에는 또 무엇을 내가 손에 쥐고 십자가 앞에서 망설이던 것들을 하나하나 놓아야 할 때가 옵니다. 그 때마다 손에 힘 너무 주지 말고 살아가면 더 행복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김요한 요한 신부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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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예수님을 따르려면”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먼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식과 형제와 심지어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제 십자가를 메고 당신의 뒤를 따르지 않고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우선 먼저 가만히 앉아서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마치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이 우선 망대를 지을 비용이 자신에게 있는지 또한 적들이 쳐들어오는데 그들을 막을 재간이 있는지 따져보듯이 그렇게 따져 보아서 자신이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계산해보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따르는데 자신의 힘이 부친다고 생각되면 아예 그 길로 들어서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가다가 포기하면 아니 감만 못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완전한 무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소유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을 따르면서 완전한 무소유자로서 사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가 있으셨고, 그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실천하며 살 수가 있으셨던 분이십니다.

이렇게 얘기를 해 보면,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얘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라. 그래야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가 있다.” 아마도 기쁘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진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본당 총무가 제게 와서 “신부님요! 제가 돈이 많았더라면 아마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하며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기 친구가 있었는데 돈이 무척 많았다고 합니다. 이 친구는 자기 아버지가 광양만에 투기를 하였답니다. 그 넓은 갯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을 평당 10원에 수 십 만평을 사 두었답니다. 그런데 그 곳에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지요. 갑자기 땅 부자가 된 것입니다. 이른바 졸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땅은 모두 이 친구의 차지가 된 것이지요. 갑자기 부자가 되니까 돈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차를 바꾸고 돈으로 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을 만끽하며 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날도 차를 외제로 바꾸어 타고 총무에게 왔더랍니다. 좋은 차였답니다. 점심 맛있게 먹고 헤어졌는데, 그 좋은 차를 타고 가다가 그만 실수로 바다로 돌진해서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과 함께 저승으로 갔다고 합디다. 그러면서 총무 왈, 돈은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있어야지, 많으면 이런 사고를 겪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걱정을 했지요.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필리 3,18-19)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비움의 극치, 자기를 내어 놓음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또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된 삶의 모습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모습들뿐이니 바오로 사도께서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은 기쁘게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인지를 모범으로 보여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어렵고 힘든 길일지라도 구원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생의 길을 제시하려는 예수님의 삶 앞에 모든 욕심은 부질없는 것임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은 내가 져야 할 십자가려니 생각하고 모든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소유욕을 이겨낼 때 나도 떳떳한 하늘나라의 시민(필리 3,20 참조)이 될 것이란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욕심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도무지 욕심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영성가는 하느님은 “흘러넘침”이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흘러넘치는 사랑, 우리 역시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서 자주 이웃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나누면서 점점 더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연습을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안동교구 박윤정 바오로 신부>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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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말씀을 옮겨보면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지혜 9,17) 하고 가르칩니다. 우리 가운데 사셨던 예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 성령과 함께 사셨습니다. 이미 잉태되실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고, 어릴 때에는 하느님의 총애로 가득하셨고, 세례를 받으실 때 역시 성령을 충만히 받으셨고, 세례를 받으신 뒤 광야에 나가 유혹을 받으실 때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깊이깊이 깨달으셨고, 그것을 맑게맑게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서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쩌면 대단히 어려운 요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라는 말씀으로 들을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내가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쌓은 지식인데, 나를 위해 쓸 시간도 없는데… 사실 그 소유를 버리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요구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생각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야말로 진리라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 때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말입니다.

소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소유는 자신을 위한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위한 나눔의 대상이라고 가르칩니다. 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소유물들, 자신의 능력 이런 것들이 언제나 주님께 합당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의 삶의 기준은 언제나 예수님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젊은이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난 뒤에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유효합니다. 또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무소유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자유로우셨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으셨습니다. 그런 삶을 사셨기에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사실 이런 요구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당신 제자들을 위한 요구였습니다. 제자들이 참으로 자유롭게 당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부의 축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시편 49,12 이하에서 “그들이 속으로는 자기들의 집이 영원하고 자기 거처가 대대로 이어지리라 생각하며 땅을 제 이름 따라 부르지만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 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을 따르며 그 말을 좋아하는 자들의 운명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다짐해 봅니다, 내가 다리에 아직 힘이 있고,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안동교구 박윤정 바오로 신부 2016년 9월 4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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