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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겸손과 사랑
조회수 | 1,985
작성일 | 09.12.19
어제 신문에서 흥미있는 기사를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래리 스튜어트라는 분이 26년 동안 비밀 산타클로스로 나섰었다가 지난달에 얼굴과 신분이 공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공한 기업가로 미국 전국을 돌면서 익명으로 금액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비밀 산타의 역할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어떤 분의 도움을 통해서 되었다고 하네요.

1971년 겨울 휴스턴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던 당시 회사가 망해 이틀 동안 쫄쫄 굶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그는 한 식당에 들어가 이침을 시켜 먹고서 지갑을 잃어버린 척을 했지요. 바로 그때 식당 주인이 자리로 와서는 바닥에서 20달러를 주운 척하며 “이 사람아, 돈을 떨어뜨린 것 같네.”라며 곤경에서 구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는 연말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나눠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난달 ‘래리 스튜어트’라는 이름이 공개된 뒤 많은 사람들이 편지와 전자우편으로 자신도 ‘비밀 산타’를 해보겠다는 뜻을 알려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자선은 바로 그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결국은 전 세상을 이러한 사랑과 감동이 움터 나오는 곳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그러한 모습을 우리에게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주님의 모습과 역행을 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우선 내가 잘 되고 봐야 한다는 생각, 내가 저 사람보다는 윗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등등……. 바로 내가 기준이 되다보니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겸손과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교만과 욕심으로 가득 찬 모습을 스스로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엘리사벳이 성모님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물론, 또한 친척으로 가까운 사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누구보다도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향해 최대의 존경을 표시합니다. 아직 성모님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또 어떻게 알고 그러한 예를 취할까요?

만약 저 같으면, ‘내가 마리아보다 더 나이가 많은 손위 언니니까 대접을 받아야 돼.’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이와는 달리 최대의 대접을 성모님께 행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겸손한 마음, 자신을 낮추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었고, 성모님 안에 계신 예수님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겸손과 사랑의 모습을 갖춘 또 한 명의 산타가 되면 어떨까요? 그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도 더욱 더 가깝게 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물론, 이 세상에 새롭게 오시는 예수님도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성탄 준비를 하세요.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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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간직해야 될 말, “희망”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희망’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가 나올 것’(제1독서)이라는 희망,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실현되리라’(제2독서와 복음)는 희망이 오늘 전례에 참석하는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사실 지난 4주간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구세주 오심을 애타게 기다렸다. 나름대로의 절제의 생활을 통해, 자선과 나눔의 삶을 통해 그리고 통회와 고해성사를 통해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였던 우리는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들은 대로 주님의 말씀과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지니고 살아온 것이다. 마치 구약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 안에서의 희망을 지니고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구세주 오심에 대한 희망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기대와 희망 속에서 지내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겪었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은 그들이 간직한 희망을 포기하게 했고, 좌절된 삶으로 추락하게 만들었다.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알려주고, 희망을 잃지 말고 굳건한 믿음으로 기다리라고 했건만, 느껴지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이었기에 공허한 외침처럼 들리기도 하였고, 보이지 않는 그분의 사랑의 가시적 현현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를 느낀다. 이러한 구약시대의 모습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경제적 어려움 앞에서, 폭력과도 같은 정책 앞에서의 무기력함을 느끼면서, 개인적 고통과 어려움을 느끼면서 우리는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고, 이겨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는 하느님을 만나면서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우리 자신을 많이 발견한다. 보이지 않는 그분의 사랑은 묘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 느껴지지도 않고 대답도 없는 하느님을 원망하다 못해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희망을 일깨워준다. 구약의 모든 백성이 힘들어했던 그들의 삶에서 끝까지 구세주 오심을 기다렸던 것처럼, 희망을 잃지 말고 기다리라고 우리를 독려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꼭 오실 것이고, 그분은 우리 삶의 한 가운데에서 태어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성모님의 모습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굳은 신앙으로 남은 대림시기를 보냈으면 한다. 각자가 마음에 간직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정신철 세례자 요한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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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제님께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탤런트의 미모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우와, 진짜 예쁘다.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그런데 바로 그 옆에서 이 형제님이 아내가 그 말을 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이에요. 남편이 못생긴 자기를 빗대 놓고 하는 말같이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 차갑게 쏘아붙였습니다.

“그렇게 예쁘면 그 애랑 살아.”

남편이 아내가 예쁘지 않다고 말했습니까? 그렇다면 저렇게 예쁜 여자랑 살고 싶다고 말을 했습니까? 모두 아니지요. 스스로의 얼굴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그 말이 꼭 자신을 빗대어 놓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열등감을 우리 모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쁘고 아름다워 보이는 탤런트들 역시 이렇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성형 수술을 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각종 화장과 옷으로 자신을 꾸미고 있습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열등감 외에도 내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열등감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많은 고민과 상처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부족하고 나약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고민과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진정한 마음이 담긴 따뜻한 위로가 우리의 고민과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성모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엘리사벳이 살고 있었던 에인카렘까지는 꽤 먼 거리였지요. 더군다나 성모님께서는 홀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셨을까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졌다는 것, 더군다나 이 아기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는 것,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사실을 당시 15세의 나이였던 성모님께서 받아내기에는 너무나 큰 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던 것이지요.

엘리사벳은 성모님께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을 엘리사벳은 이렇게 외치심으로 위로와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음을 전해주십니다.

엘리사벳의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이웃들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위로와 힘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위로와 힘보다는 상처와 아픔을 전해 주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힘들어하고 지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힘들고 지쳐있는 사람,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위로와 힘을 전해 주는 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전해 주는 이가 되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을 닮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대림초의 불도 모두 다 켜졌고, 이를 통해 예수님의 성탄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남은 시간을 더욱 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위로와 힘을 전해 주는 사람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전해 주는 사람만이 예수님 맞이할 준비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친절한 행동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헛되지 않다(아이소푸스).

조명연 신부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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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어느덧, 대림 제4주일입니다. 이제 성탄이 이틀 남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그때 성모님보다 6개월 먼저 세례자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이 말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는 매일 성모송을 바칠 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의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성모님께선 매우 불행한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은총이 가득하고, 복되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의 본뜻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 7장 14절에서 아하즈 왕을 향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1장 9절에도 아하즈 왕의 아들이 히즈키야임을 말합니다. 열왕기 하권 16장과 18장에 따르면 아하즈는 주님을 거역했지만, 히즈키야는 “자기 조상 다윗이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18장 7절에서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 주셨다.” 이처럼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이가 바로 주님을 잘 섬겼던 히즈키야 임금이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신약에 와서는 주님께 대입시킵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은 이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처음, 중간, 끝에서 각각 나타내며 복음서 전체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처음 부분은 1장 23절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했던 말을 다시금 반복합니다. 단지 젊은 여인을 처녀라고 번역하여 반복합니다. 중간 부분은 18장 20절에서 말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마치며 마지막 절인 28장 20절에서 말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도 바로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생활 안에서 주님께서 함께하실 때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탄을 앞둔 이 시간, 우리의 삶 또한 성모님과 같이 임마누엘이 될 수 있도록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기쁜 성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보소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인천교구 이우진 신부
  |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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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처와 희망을 담아내는 말! 아멘!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자주 쓰는 설교패턴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억양을 강하게 하여 “믿쓥니까?” 하고 묻고 “믿습니다.” 하고 답을 합니다. 둘째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여러분들과 그 가족에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부분입니다. 성당에서는 개신교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습니다.”라는 식의 표현을 자주 하진 않지만, 매 주일과 대축일에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믿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부활 때 세례 서약 갱신과 세례성사 때 신앙고백으로 믿음을 표현하곤 합니다. 이렇게 믿음을 표현하는데 “아멘.”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멘’이라는 표현을 믿음과 신앙의 모범으로 가장 적절하게 응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트레이드 마크인 이 말씀은 사실 ‘아멘!’ 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표현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뜻대로 되시기를 빕니다.’와 같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성모님과 엘리사벳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말로는 다 표현 할 수 없는 것들을 함축하고 있는 한마디입니다. 큰 시험과 도전을 준비하는 이에게 간절함이 담긴 ‘아멘’, 큰 수술을 앞둔 사람과 그 가족을 위한 기도 중의 한마디 ‘아멘’, 시련과 고난,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에게 기도할 때 간절함이 담긴 한마디 ‘아멘’. 이렇듯 기도를 할 때 빠질 수 없는 한마디 ‘아멘’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담아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멘’이라는 말 한마디에 온갖 정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실 정성과 간절함이 담긴 ‘아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공통분모요, 공감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과 예수님은 모전자전으로 상처를 통해서 성장하셨고, 상처를 통해 사람들을 더 깊이 바라보았으며, 상처를 통해 사람들을 이해하고, 상처를 통해 성장에서 성숙으로 변화되어, 죽음에서 부활의 은총에 이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아멘’이라는 말 한마디는 상처와 희망, 가능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멘’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이를 지나치게 남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얼토당토 않은 것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하고 ‘아멘’을 외친다면, 그것은 자기합리화나 정당화를 기도로 포장하는 허풍이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말과 진심 어린 말이 있듯 온갖 것들을 담아내어 표현하는 ‘아멘’과 입으로만 외치는 ‘아멘’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 앞에서 얼마나 진지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말씀하셨는지 헤아려봅니다. 진심 어린 기도, 정성 어린 기도는 ‘아멘’이라는 말 한마디에 상처와 희망을 모두 다 담아낼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성모님께서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신 그 모습처럼 ‘아멘’이라는 외침 속에 우리의 상처와 함께 희망을 담아내어, 간절함과 정성을 담아 기도합시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 인천교구 강성욱 스테파노 신부 - 2015년 12월 19일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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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영국 국기를 만든 중세시대의 영국 왕이었던 제임스 1세는 뜨거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 신앙심을 바탕으로 아주 작은 죄도 엄격하게 다루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어떤 도둑이 남의 양을 훔쳤다가 사형선고를 받았지요. 그는 곧 닥쳐올 사형을 어떻게 모면할까를 고민하다가 왕의 신앙심이 두텁다는 것을 기억했고 이런 꾀를 생각해서 간수를 불러 요청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몸, 죽기 전에 성경이나 다 읽고 싶습니다. 임금님께 제 뜻을 전해 주십시오.”

왕은 이 말을 전해 듣고는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경을 다 읽은 뒤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도둑은 이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사형집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매일 성경 한 절씩만 읽고는 더 이상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왕은 그를 풀어주며 집에 가서 성경을 읽도록 시켰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며 충분한 시간도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너무나 서두르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없으며 그래서 극복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환의 불이 모두 켜진 대림 제4주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 대림 기간 동안 고해성사를 통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준비들을 하면서 대림시기를 잘 보내겠다고 다짐했지만, 벌써 대림시기의 막바지에 들어서 있네요. 이제는 시간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고, ‘또 망했구나.’라면서 실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은 단 한 번의 변화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직전에 구원을 얻었던 주님 옆의 십자가에 있었던 도둑을 기억해보십시오. 당시 중죄인이나 정치범에게 가해졌던 십자가형을 받을 정도라면 그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도둑이었을 것입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은 한 번의 회개와 주님께 매달리는 변화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이제 틀렸어.’는 마음을 접고, 대신 ‘지금 당장 하자.’라는 마음의 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변화를 통해 뜻하지 않게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향해 이렇게 외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5년 12월 20일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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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저뭅니다. 얼마 전 복음에서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을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마태 18,12 참조) 돌아보니 잃은 양 한 마리는 커녕 아흔아홉도 못 챙기며 살아왔습니다. 또 제 한 몸 돌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교회와 교우님들께 민폐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한 해를 걷고 보니, 길이신 주님과 같은 길을 걸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우둔함은 악보다도 훨씬 위험한 선의 적이다.”(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에서)라는 말씀이 두렵습니다. 우리 삶은 ‘열심히 살았느냐 보다 제대로 살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그랬잖습니까?

불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사찰에서 염불하고 설법하던 스님과 옆 동네에서 웃음을 팔고 술을 팔던 주막집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지옥으로, 여인은 극락으로 갔습니다. 스님은 염불을 외웠지만, 마음은 주막에 있었고요. 여인은 술은 팔지만, 마음은 스님처럼 염불하며 살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랍니다. 스님 삶은 공염불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신앙도 그러기 쉬우니 참 두려운 일입니다. 잘 산다는 건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인권 주일에 주교회의에서 보낸 영상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이 시대에 ‘잘 사는 길’쯤 되겠습니다.

어머니이신 땅을 공경하라(땅),
생명이신 물을 사랑하라(물)
자연에 부담을 주지 마라(에너지),
생명의 밥상을 차려라(먹을거리)
우리의 몸을 존중하라,
하늘을 더럽히지 마라(교통)
단순하고 소박하라(주거),
흔적을 남기지 마라(생활 폐기물)
더불어 살아라(공동체),
사는 법을 함께 가르치고 배워라(교육과 문화)

한 세상 잘 산다,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연과 음식과 내 몸을 존중하고, 소박하게 ‘더불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건 곧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니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임신하고 엘리사벳을 찾아봅니다. 사마리아와 광야를 지나는 1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랍니다. 굳이 나서서 엘리사벳과 ‘더불어’ 애환과 기쁨을 나눕니다. 서로의 ‘몸’ 안에 일어난 일이 주님 하신 일임을 깨닫습니다. 또 그게 행복이라고 기뻐합니다. 이 시대에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사는 자체가 민폐다 싶기도 합니다만, 이미 더 큰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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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정연섭 베드로 신부-2018년 12월 23일
  |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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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   [대구] 첫기적  [2] 1632
492   [춘천] 주님이 주신 ‘축제의 삶’ 살자  [3] 1984
491   [의정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3] 1941
490   [원주] 가나의 혼인잔치  [1] 161
489   [군종] 기적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입니다  1657
488   [대전]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혹시 ‘기적을’  126
487   [청주] 하느님의 자기 낭비  [1] 1664
486   (녹) 연중 제2주일 독서와 복음 [가나의 혼인-첫 기적]  [5] 1511
485   [대전]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 마무리를 잘 합시다.  [1] 1952
484   [수원] 깨어 기다림의 표본: 마리아  [3] 2373
483   [부산] 구원과 행복의 원천인 믿음  [6] 2106
482   [수도회] 행복은 말씀과 함께  [3] 497
  [인천] 겸손과 사랑  [6] 1985
480   [춘천] 행복하십니다.  [5]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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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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