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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조회수 | 545
작성일 | 16.07.15
▪ 그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38-­42)

▪ 묵상

한동안 저는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마치 내가 마르타인 것처럼, 예수님이 왜 마르타의 입장을 배려해 주시지 않는지 섭섭했습니다. 마르타는 집에 오신 귀한 손님 시중을 드느라 혼자 경황이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눈치껏 나와 도와주면 좋으련만 얌체같이 꼼짝도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이야기만 듣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마르타가 예수께 도움을 청하는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마리아의 편을 드시며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누구는 공주처럼 가만히 앉아 예수님 말씀 듣고 싶지 않은가?’ 일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마르타의 항변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마르타의 역할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를 모르실 리 없을 텐데 복음사가가 일부러 이 일화를 넣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곧 이 일화를 통해 우리 삶에서 주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요? 내 인생의 시작과 마감이 내 의지와 무관하고 또 내 삶의 주도권이 내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주도권을 그분께 넘겨야 합니다. 마르타와 예수님의 관계에서 마르타는 자신이 예수님을 접대하는 주인으로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반면 마리아와 예수님을 보면 주도권이 예수께 있고 마리아는 무엇이든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다는 듯 발치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수동적이지요.

‘자녀는 여섯 살 때까지 부모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선사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가 성장하여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부모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은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무능하여 모든 것을 부모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을 때 오히려 더 큰 기쁨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게리 베커의 말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효용 수준은 자신이 얼마나 만족하느냐가 아닌, 오히려 사랑하는 대상이 얼마나 행복해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곧 자녀와 부모의 관계입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시편 131,2ㄷ)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의 상황이라 생각되지 않는지요? 성녀 소화 데레사는 바로 이것을 터득했습니다. 하느님께 작은 자가 될수록 더 충만히 누리는 사랑! 그렇게 볼 때 마르타는 자신의 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잘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시도록 해드리는 것, 그로 인해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예수께서는 달래듯, 설득하듯 두 번씩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10,41)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1-33) 하느님 앞에 무능한 자가 된다 함은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음이 아니라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께 귀를 기울일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고, 그 뜻에 합당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일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일이 됩니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일이 다 이루어지는, 노자가 말한 ‘무위의 도’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바쁜 정도가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은 운전하면서 빵을 먹고, 휴대전화를 받으면서 일합니다. 잠시라도 옆을 보면 그만큼 경쟁 대열에서 뒤처지기에 옆을 볼 틈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질주하다가 숨 좀 돌리게 되면 그만 쓰러져 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많이 필요해서 갯벌과 농경지를 없애는지, 무엇을 더 배워야 하기에 학생들은 집에서 잠만 자고 학교와 학원으로 내달리는지? 왜 빨리빨리 일하는 만큼, 정보가 빠른 만큼, 밥을 빠르게 먹는 만큼, 그만큼 여유가 생기지 않는지? 그 모든 것이 실상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면 왜 포기하지 못하는지 예수님의 발치 앞에 앉아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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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세라피아 수녀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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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두려움과 근심에 빠졌을 때, 당신 아드님 발치에 앉아 우리 인생에 ‘필요한 오직 한 가지’ 를 배울 수 있게 이끌어 주십시오.

▪ 독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에 있는 예수님을 어떤 마을에서 마르타라는 여인이 자기 집으로 “모셔 들입니다.” (38절) 마르타는 자캐오처럼 예수님을 기쁘게 자신의 집에 ‘맞아들이는’ 루카복음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집에 맞아들인다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동생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39절) 라고 루카는 묘사합니다. ‘발치에 앉는다.’ 는 말은 예수님 시대에 스승과 제자 관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당시에 많은 유다인이 스승의 발치에 앉아 단지 가르침뿐 아니라 스승의 삶 자체를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구조적으로 볼 때, 마리아보다는 마르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해, 마리아가 자신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마르타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마르타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문제에 빠져 예수님 말씀을 듣거나 그분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마르타를 어떻게 교육시키는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먼저 두 번이나 마르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두 차례나 부른다는 것은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마르타, 마르타 ! 너는 많은 것을 걱정하고 거기에 방해를 받고 있구나.”  신약성경에서 ‘걱정’ 이란 단어는 날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배고픔, 굶주림과 다른 문제들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반응을 가리킵니다. 걱정과 근심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공통 주제였습니다.

마르타의 문제를 직접 지적한 후 이어서 예수님은 마리아가 “좋은 몫” (42절) 을 택했다고 칭찬하십니다. 걱정과 근심에 싸일 때 마리아는 허둥대거나 기적 같은 도움이 오기를 바라며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대신에 마리아는 모든 문제를 안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가르침을 귀 기울이기로 ‘선택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문제를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식별하기로,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이 그녀가 ‘좋은 몫’ 을 택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는 산상설교에 나타나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인간이 삶에 필요한 것을 보장받기 위해 ‘많은 것’을 걱정하는 태도는 필요한 ‘한 가지’ 것을 갈망하는 태도와 대조됩니다. 근심은 성경에서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녀들을 보호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들의 새들을 먹이시고, 당신의 피조물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마리아의 관상적 삶이 마르타의 활동적 삶보다 더욱 중요하고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루카의 문맥에서 보면 이 두 유다 여성의 이야기는 신앙 여정이 ‘받아들임’ 에서 ‘발치에 앉아 귀 기울이는 것’ 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그분의 가르침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이 제자직의 여정이라는 것을 두 여성 제자를 통해 가르치고자 합니다.

마르타와 동생 마리아는 모두 유다인 여성입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주 유다인들에게 거부당하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데, 이 두 유다인 여성은 예수님을 믿는 이스라엘 안의 남아 있는 사람들, 예수님께만 희망을 거는 가난한 이들을 대표합니다. 여성들은 종종 고대사회에서 무시되었고, 남성과 동등한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두 여성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선교 활동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안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줍니다.

▪ 성찰

근심에 대한 해결책, 인생에 필요한 한 가지, 인생의 목적에 대한 답은 단지 그리스도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가르침을 들을 때만,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길 때만 해결됩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의 문맥에서 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느님 섭리에 온전히 내맡김’ 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 기도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 ? 누가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지낼 수 있습니까 ?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이라네.(시편 15, 1 – 2)

▮ 성 바오로딸 수도회 임숙희 수녀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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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주님은 사람 차별하시나?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를 차별하시며 말씀하시고 마리아는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도 차별이 있는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교와 신부, 사제와 평신도, 사제와 수녀, 수도사제와 평 수사, 이렇게 구별을 짓다보니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사람은 그렇다고 치고 일 자체에도 차별이 있는가? 땀 흘려 일을 하는 노동자와 사무실에 일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사람, 농산물을 피 땀흘려 일을 하는 농민과 도매상을 차려놓고 판매하는 사람사이에 차별이 있어 보입니다.

원칙은 사람위에 사람이 없다는 말과 같이 차별은 인간관계에서 많은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귀하고 천한 사람, 높고 낮은 사람,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 갑질과 무시당하는 사람, 여유로운 삶과 쪼들리는 삶, 자랑과 멸시, 이런 차별에서 갈등을 만들어내어 서로 싸우고 죽음까지 가는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마르타는 분명이 자기처지를 알아 달라고 주님에게 하소연하였는데 마리아편을 들어 준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말의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무거운 것 가벼운 것이 있으며,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분별력입니다. 먼저하고 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삶과 미련한 삶이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불평만 하고 자기 일을 행복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 저는 노인를 돌보는 봉사를 하는데 기도할 시간이 없어 고민입니다. 저는 이런 말로 위로해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상담하려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성당에서 개인기도한다고 당신을 보내면 좋겠습니까? 어떤 때는 공식 기도시간도 궐하게 되는데 지금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까? 안하고 있습니까?

그분은 스스로 신부님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기도하고 있고요. 이제 걱정하시지 말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내가 어디에 있던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처지에 있던지 자기하는 일을 사랑하고 충실하게 임하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병석에 누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도 기도 하는 것이라 의식하면서 살면 기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처지를 실망하고 절망하고 불평불만을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자기 하는 일을 사랑하고 사랑하면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제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도 그 일을 사랑하고 그 일로 인하여 행복한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6년 7월 17일
  |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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