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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아름다운 중재자의 삶
조회수 | 504
작성일 | 16.07.22
[광주] 아름다운 중재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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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독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구해 보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애절한 노력이 감동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본래 소돔과 고모라는 지금의 사해 남부에 위치해 있던 도시로서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던 악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에는 모두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들 뿐이요 사람답게 사는 의인이라고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구제불능의 도시였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그 도시를 구하기 위해 하느님께 매달립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썩을 대로 썩어서 타락한 도시였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받을 수 있도록 체면 불구하고 하느님께 매달리며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소청을 기쁘게 들어주셨지만 그러나 의인이 단 열 명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때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가 사해 남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진으로 인해서 푹 가라앉아서 지금은 사해 바닷 속에 묻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해가 그 이전의 사해보다 더 커졌다는 것입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두 도시를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하느님, 바로 이 중간에 서서 아브라함은 중재자로서 아름답고도 감동스런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은 그처럼 살맛나는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면 그건 추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재자의 길은 대단히 고달프고 험난합니다.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보람있는 길이요 멋지고 위대한 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중재자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있던 벽을 허물어 버리고 화해와 용서로써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당신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성부는 그래서 당신 아들의 희생을 보시고 인류를 죄에서 용서해 주셨으며 닫혔던 천당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중재자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죄 없이 얻어맞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남이 맞아야 할 것을 내가 맞음으로써 그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방에서 마루로 나오다 넘어져서 울었습니다. 아기는 아픔보다도 걸려 넘어졌다는 그 자체 때문에 속이 상해서 웁니다. 이때 빨래를 하던 엄마가 갖가지 방법으로 아기를 달래 보지만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아이스크림 사 준다는 것도 싫으며 매맞는다는 것도 겁이 나지 않습니다. 속상하니까 웁니다.

이때 엄마가 회초리를 들고 와서 문지방을 막 때립니다. 그러면 서 "이놈, 너 왜 우리 아기 넘어뜨렸니? 나쁜 놈, 매 좀 맞거라." 하면서 때립니다. 그러면 아기가 그 모습을 보고 속이 풀어져서 울음을 그칩니다. 여기서 문지방은 아무 죄 없이 얻어맞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아기를 달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참으로 악한 시대입니다. 나라 곳곳에 썩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건물만 썩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에 썩은 오 물이 들어가니까 사회의 모든 부문이 썩어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사건을 비롯해서 각종 대형 사고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나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일은 제쳐놓고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살맛이 납니다.

우리는 그래서 중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친구를 위한 중재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서 빵을 꾸어 달라고 귀찮게 조릅니다. 주인은 성가셔서 대답도 하기 싫은데 뻔뻔스럽게도 계속 조릅니다. 그러자 주인은,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하도 귀찮게 구니까 친구의 청을 들어줍니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도 자기가 먹으려고 빵을 꾸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기 위해서 체면불구하고 밤중에 어려운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운데에서 욕먹으며 요청하고 조정하는 자를 중재자라 하며 이들의 기도를 중재기도라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중보자, 중보기도라고 합니다.

세상은 중재자들에 의해서 구원받고 있습니다. 악인이 아무리 많아도 의인들이 많기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용서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멋지게 살도록 합시다. 진정 사람답게, 양심 바르게, 그리고 하느님 사랑으로 살도록 합시다. 거기에 인생의 참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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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강길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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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하느님, 당신이 정말 필요합니다!”

“하느님, 당신이 정말 필요합니다!”

이러한 외침은 삶의 위기와 함께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부르짖게 되는 간절한 하소연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삶의 도전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이러한 위기와 절망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온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며 도와 달라고 청하라는 것입니다. 한두 번 청하는 것으로 포기하지 말고 막무가내로 성가실 만큼 끈기 있게 청하라고 일러주고 있습니다. 마치 몸뚱아리 하나로 구르고 소리치고 우는 아이처럼 말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의 청원으로 때가 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물을 술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을 보면 이사야 예언자가 야훼의 말씀이라며 히즈키야 왕에게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히즈키야는 벽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야훼께 기도하며 매우 슬프게 울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의 생명을 연장해 줍니다.

이것은 운명을 바꾸는 기도의 힘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기도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당신 벗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꺼이 마음을 바꾸셨던 예를 거듭해서 보여줍니다. 아모스 예언서 7장 1절-6절을 보면 아모스 예언자가 야곱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자 야훼께서 ‘그만 해 두겠다’ 하시면서 당신을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32장에서 긴 논쟁 끝에 마침내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시게 하는 데 성공합니다. 오늘 1독서인 창세기 18장 20-3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간청을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여섯 번이나 간청을 드리자 하느님은 여섯 번이나 마음을 바꾸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기도에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에게 당신 계획을 자세히 계시하심으로써 그들의 기도를 통해 당신의 마음과 계획을 바꾸시는 분임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무엇인가를 청할 때 한 번으론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마치 친구가 귀찮아서 빵을 내어주듯이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께도 귀찮을 만큼 우리의 청원을 반복해서, 쉬지 말고, 지칠 줄 모르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그런 끈질긴 간청에 마음을 움직이실 것 입니다.

▮ 광주대교구 박붕수 신부
  |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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