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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조회수 | 2,058
작성일 | 07.07.27
오늘의 복음에서 제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할 기도의 내용과 기도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 안에 기도는 단순합니다. 목욕재계(沐浴齋戒)로 준비를 하라는 말씀도 없고, 치성(致誠)이나 제물(祭物)을 바치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기도에 요구되는 복장도 없고, 기도하기 위해 가야 하는 장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할 내용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내용입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하느님을 부르면서 기도는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있는 공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무서운 심판자로 군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는 하느님과 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그분이 아버지이시기에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그분이 우리의 생명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베푸신 생명이면,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아 살아야 하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 병든 이를 고쳐서 미래를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두려워할 분이 아니라 배워서 실천해야 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루가 6,36 참조)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오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그분을 이용하여 우리의 소원을 이루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온 세상이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하여 아버지를 받들어 사는 자녀가 될 것을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아버지로 계시는 나라가 이 세상에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가 제일 먼저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원하는 것이 자녀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온 세상 사람들의 실천 안에 함께 계실 것을 빌고, 기도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는 우리의 양식을 우리의 노동으로 얻습니다.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입만 벌리고 앉아서 하느님이 먹여 주실 것을 기다리겠다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노동으로 얻은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은혜로우심에 감사한다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또 이어집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보아도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생각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조건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것을 원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서 아버지의 은혜로우심을 그 이웃에게 실천하고 감사드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로써 오늘의 기도는 끝납니다. 유혹은 하느님 나라와 반대되는 삶의 공간입니다.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우리 삶의 공간입니다. 게쎄마니에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시오”(38).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를 부르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유혹은 하느님을 생각하지도 부르지도 않는 삶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 한 사람 잘되자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자세입니다. 제자들은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혹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들은 각자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신 다음 예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설명하십니다. 친구를 졸라대는 사람과 같은 신뢰심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적극성과 신뢰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를 말씀하는 선언입니다. 선언만으로는 부족해서 예수님은 듣는 사람을 설득하는 말씀도 하십니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설명하고, 선언하고, 또 설득하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라고 애써 말씀하십니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이 우리 자신 안에 갇혀서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은 당신의 숨결인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루가복음서는 우리가 하느님에게 조르고, 구하고, 문을 두드려서 얻어내어야 하는 것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착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큰 신뢰심으로 다가가야 하는 분은 하느님입니다.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 안에 아버지로 살아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조르고, 구하고, 문을 두드리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우리의 삶에 살아 계시면 우리가 변합니다. 인색하던 사람이 관대하게 됩니다. 명예와 허례허식을 탐하던 사람이 섬기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인간이 고상한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실패를 무릅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실패를 넘어서 하느님의 일을 조금 배울 수 있습니다. 성령은 실패를 무릅쓰고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우리 마음의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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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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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오늘 우리는 주님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가르침 속으로 첫 발부터 들여봅시다. 틀림없이 주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었을 한 제자가 기도가 다 끝나고 나서야 뚱딴지 같이 불쑥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주님께 청했습니다. 기도할 때면 어쩜 그렇게 분심이 가득한지, 잠은 또 왜 그렇게 오는지. 이런 걱정 저런 근심 겨우 잠재우고 용맹정진을 해도 그분은 실루엣보다 더 희미하게 느껴질까 말까합니다. 오늘 청하는 제자도 그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래도 제자인데'하고 생각할 때, '더 깊은 차원의 기도가 목말라서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들에서 스승께 기도에 대한 청원을 드렸지 싶습니다.

현대의 신자들 사이에도 같은 요구가 절실한 것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다고 혼은 내면서도 정작 기도를 가르쳐 주는 이는 찾기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를, 대 데레사를, 십자가의 요한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하고 생각들 합니다. 성령기도회에 각종 기도 모임에 렉시오 디비나, 성서 공부 등에 발길이 부쩍 느는 것도 다 그 탓일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불가의 참선으로 돌아서 버리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젠 교회가 수도회에 갇혀있었고, 어려운 학문이나 고상한 신비에 묶여 있었던 기도 수련을 쉽고 대중적으로 풀어 제시해야만 할 때입니다.

이러한 요청 앞에, 예수께서는 먼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병행 구절인 마태오 6,9-13이 전하는 내용이나 우리가 외고 있는 형태보다 짧고 간단하게 전해줍니다. 그리고 나서, 예화를 통해서 '구하라, 찾아라, 두드려라'는 확신에 찬 부단한 마음의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응답을 이렇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기도에는 '꼭 이루어지리라'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효력 만점인 기도를 찾으려 골머리 싸매거나 이것저것 다 끌어다 붙이며 안달할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 다음엔 끈질긴 인내와 기다릴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당장 답을 얻으려거나 성급히 굴수록 자기 자신에게 매이고 기도는 자신만의 독백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귀와 입이 없으신 분이 듣고 말씀하시는 방식에 익숙해지기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기도는 수련이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운다'는 격언도 기억했으면 합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표현방식이 다르듯이, 대화인 기도 또한 그렇습니다. 갓난아기가 말을 배움과 같이 자신이 직접 끊임없는 노력에서 얻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제자에게, '항구히 기도하라'고 권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에 목마른 우리에게도 같은 답을 주십니다. 기도법의 수집가가 아니라 기도의 수련자가 되라 들려주신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부산교구 권동국 라우렌시오 신부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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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上의 하느님 나라, 敎會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기도 안에는 후세의 천국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하느님 왕국의 건설에 동참하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질서와 부조리, 불신과 폭력이 난무하는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 세상의 구원은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부터 올 것인지 망막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여 언젠가 구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이며 희망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의 징표가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 마는 가장 중요한 징표는 뭐니 뭐니해도 一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 인간 상호간의 일치,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얻고자하신 구원의 징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치를 형제적 사랑으로, 눈에 보이는 징표로 삼으라 하십니다. 그러기에 敎會란 이 하느님나라의 요소, 즉 일치를 갖추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하느님나라의 구체적 모범이 되어야합니다. 영적인 갈증과 뭔가 새로움을 향한 목마름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이 분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현실적인 고독을 느끼고 있다면, 하느님 나라의 모델로서의 교회는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하면서, 서로를 주님 안에 한 형제, 한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낱말의 의미가 체험되지 못하고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비신자들이 우리 공동체를 바라보며 하느님 나라의 징표를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나라는 만남과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맛 볼 수 있는 소공동체가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하겠습니다. 말로써 입술소리로써가 아닌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따사로운 공동체 건설을 위해 다시 한번 우리의 자세를 되짚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산교구 강영돈 라우렌시오 신부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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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도하는 것

오늘 복음 말씀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벗을 위하여, 한밤중에 문을 닫아걸고 있는 다른 벗의 집에 찾아가, 빵을 꾸어주기를 청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집주인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라고 일러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인 창세기의 말씀 역시 복음의 말씀처럼 끊임없는 간청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죄악 때문에 사람들의 원성을 듣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나서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주님께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하여 끊임없이 간청합니다. 말씀을 듣는 우리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난’(콜로 2, 12)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 안에서 우리가 하는 기도는 먼저 끊임없는 간청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기도는 정성 어린 기도이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는 겸손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올바른 기도는 하느님 앞에 오르리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집회 35, 20)

하느님을 신뢰하며 드리는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게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게 합니다.
기도는 더 깊은 기도 안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며,
기도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게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희망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9∼10)

<부산교구 이승훈 신부>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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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어린아이처럼 청하십시오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청하곤 합니다. 이러한 기도 가운데 모든 문제가 풀려나가는 것을 경험하며 하느님의 존재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아무 답도 없으신 하느님 때문에 절망하며 하느님의 존재마저 부인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이 종종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하느님은 제가 기도하는 걸 별로 안 들어 주시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기도해야 들어주실까요?”

그러면 저는 농담 삼아 이렇게 답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실 때까지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들어 주시든지, 아니면 당신 생각을 바꾸어 주시든지 할 겁니다.”

우리는 대개 기도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며, 그분의 나라가 오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도 청하지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용서, 구원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간절히 청하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청할 뿐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수난 전날 밤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잔을 치워달라고 청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은 필요하다면 기꺼이 우리들 마음도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이러한 변화는 기도하는 이만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래도 여전히 제 뜻에 대한 미련이 남습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을 때에는 제가 바라는 일을 아버지께 청합니다. 또 어떤 때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도처럼 저에게 부담스러운 십자가가 주어질 때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예수님 기도처럼 “그래도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입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제 뜻하고 아버지 뜻이 좀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제가 부리는 어린양에 아버지가 넘어가시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어떤 기도든 마지막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모든 것은 아버지 손에 달려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보니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올바로 이끄실 것이니, 세상에 두려울 것도, 청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도 어린아이처럼 제가 바라는 것을 아버지께 청합니다. 제가 무엇을 청하든 그분께서는 언제나 귀 기울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청이 당신 뜻에 합당하면 들어주시고, 그러지 않으시면 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7월 24일
  |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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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청하고, 찾고, 두드려라.

신앙인들은 매일 매일을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매 순간 기도드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오는 많은 일 속에서 기도하기 힘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세상의 일에 마음이 머물 때, 하느님보다는 세상의 일들에 마음을 집중하다 보니 그렇습니다. 그럴 때 즉시 하느님을 생각하고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드릴 수 있는 기도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주님의 기도’입니다. 가장 쉽게 예수님을 떠올리면서 할 수 있는 기도이기에 언제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미사 때나 성당에서만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 일터에서, 즉 삶의 자리에서 잠시의 휴식과 같은 예수님과의 짧은 만남입니다. 그 짧은 만남이 있기에 일상의 삶이 주님을 통해서 활력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을 가진 가톨릭 신자로서 드리는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가장 확실한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만,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지속적으로 마련해 놓는 것부터 기도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의지와 마음이 하느님께 향할 때 기도는 삶의 일부가 됩니다.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일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청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면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그 청함을 들어주실 것이고, 만일 우리가 청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것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결국 기도를 하면 그것이 올바른 것이든 올바르지 않은 것이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루카 11, 9)

▮ 부산교구 민병국 요한 신부 : 2016년 7월 24일
  |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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