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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우리를 변화시키는 항구한 기도
조회수 | 2,210
작성일 | 07.07.27
유물론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의 딸이 어느 날 친구에게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무런 신앙도 없이 자랐고 하느님을 믿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낡은 책 속에서 기도문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만약 그 기도에 나오는 하느님이 계신다면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친구가 그 기도문이 무엇이냐고 묻자 칼 마르크스의 딸은 <주님의 기도>라고 대답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 하나가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사실 우리는 이름모를 이 제자에게 감사해야한다. 이 제자의 청을 들어 우리 모두가 매일 반복하는 아름다운 <주님의 기도>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 내용 자체 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자세와 그 정신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 그 자세와 정신은 무엇일까? 우선 예수님은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린 아이가 아빠에게 지니는 완전한 신뢰심과 애정을 가지고 기도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죄 없는 사람들의 숫자를 줄여가면서 야훼 하느님과 애써 흥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끈질긴 요청에는 하느님께서 단 한사람의 의로운 사람이라도 있으면 타락한 도시 전체를 멸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굳은 신뢰심이 담겨있다. 이 신뢰심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청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짧은 비유도 귀찮을 정도로 하느님께 항구하게 청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신뢰심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 신뢰심은 우리 스스로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다. 사실 유다인만큼 기도를 잘 하는 민족도 드물다. 그런데 유다인에게는 “입의 위대한 무기인 기도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라는 속담이 있다. 기도는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 삶에 희망을 불어넣고 방향을 가르쳐 주고 활력이 솟구치게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안에는 많은 성인들이 있다. 그런데 위대한 성인들의 공통된 특징은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를 성인이 되게 한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은 더 온유해지고 모든 것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지며 삶의 유연성을 지니게 된다. 결국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사람을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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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이태혁(요아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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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11, 1~13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모든 기도의 모범 주님기도

오늘 예수님께서는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되는 주님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기도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셨다하여 ‘주님기도’로 불리며, 기도중의 으뜸 기도입니다.

2000년 콘솔라따 선교수도회 사순묵상집에는 주님기도에 대한 특별한 묵상의 글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당신이 다만 세상의 것들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이기주의 속에서 혼자 떨어져 살고 있다면 ‘우리의’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매일 아들로 처신하지 않는다면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분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분과 물질적인 성취를 혼동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뜻을 고통스러울 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약도 없이, 집도 없이, 직장도 미래도 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형제에 대한 한을 품고 있다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죄를 계속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단호하게 악을 반대하는 편에 서지 않는다면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기도’의 말씀들을 진지하게 생활하고 있지 않는다면 ‘아멘’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님기도를 앵무새 마냥 다 외운다고, 수백 번 기도한다고 하여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청하고 찾고 두드려라

우리가 그토록 기도하여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껴 절망 가운데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묵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도와 삶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 2~3)

둘째, 하느님께서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듯 싶어도, 그분은 분명 미래를 내다보시며 또 다른 계획을 갖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느님의 계획을 찾고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에게 주어서는 안 될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에는 하느님께서 절대 들어주셔서는 안 될 기도가 있습니다. 그 같은 기도를 들어 주시면 미래의 우리네 삶이 더욱 불행과 곤경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주님기도의 가르침 뒤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 11)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아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넷째, 우리의 기도가 항구함의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소원을 기도하면서 며칠, 혹은 몇 달을 못 가 포기하면서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항변하면서 원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9~10)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심을 믿고 그분께 향한 굳건한 신뢰와 믿음을 두어야 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 32~33)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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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바위를 민 사람

미국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의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에 출입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이 꿈에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습니다.
8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는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바위가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느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 그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말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 했을 뿐이다.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그는 거울 앞으로 갔습니다. 곧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습니다. 동시에 어떤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었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
하느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인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면서 마지막 부분에 중요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0-13)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과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감사의 지혜’를 청해 봅니다.

<춘천교구 최창덕 신부>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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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하늘을 나는 말(馬)

탈무드에는 유대인 특유의 인내심과 저력을 엿볼 수 있는 ‘하늘을 나는 말’ 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옛날 어느 이방인의 나라에 살던 유대인이 실수로 왕에게 큰 죄를 지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유대인은 왕에게 일 년만 사형을 연기해 준다면 왕이 애지중지 하는 말 (馬)에게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왕은 그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일 년 뒤에 죽이나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이나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일 년의 시간을 허락했다. 천신만고 끝에 형장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그는 보란 듯이 동료 죄수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자랑했다. 그의 무모한 행동에 겁먹은 동료 죄수들이 그에게 “이 사람아, 자네에게 무슨 재주가 있다고 말에게 날개를 달아준단 말인가? 일 년 뒤에 자네가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왕이 알아차린다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땐 어쩔 셈인가?”라고 걱정하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이라도 왕이 죽지 말라는 법은 없지. 어쩌면 일 년 안에 왕이 죽을 수도 있네. 아니면 일 년 안에 내가 병들어 죽을 수도 있고, 목이 잘려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감옥에서 병들어 죽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런데 만일 왕도 죽지 않고 나도 죽지 않는다면 말이 죽을 지 또 누가 아는가? 게다가 일 년 뒤에 말에게 진짜 날개가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세계를 움직이는 유대인의 모든 것,지훈, p.85-86)

우스갯소리 같지만 인생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낙천적인 처세가 돋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입니다. 우리가 세상 삶을 살아가면서 청(=부탁)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 인간의 첫 글자, 사람 ‘人’ 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때 비로소 온전하게 설 수 있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서로간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많은 경우 하느님을 찾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통의 순간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듯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어떠합니까? 고통이 큰 만큼 절망도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럴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낙천적인 자세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는 뼈있는 우스개 이야기처럼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드리면 꼭 비가 온다고 하지요. 그 이유는 비가 올 때까지 그들은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급해 하지 않는 모습, 그리고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청하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아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파라클리토스 성령을 우리는 협조자, 위로자, 보호자, 전구자 등으로 고백합니다.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응답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조급해 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또 다른 감사를 낳으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 춘천교구 이기범 요셉 신부 : 2016년 7월 24일
  |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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