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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세례자 요한의 회개의 세례
조회수 | 1,422
작성일 | 12.12.06
오늘이 벌써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두 번째 대림주일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시고 구원자이시며, 영원한 삶에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라’는 외침을 듣습니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황량한 벌판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르고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을 기다리며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

요한이 이렇게 힘주어 외친 회개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회개한 삶일까요? 회개는 단순한 내적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방향전환이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이번 대림시기에는 부부싸움도 하지 않고, 담배도 끊고 가정과 교회에 충실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은 내적변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회개는 우리 삶의 근원이요 목표인 하느님을 등지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온 삶을 청산하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방향전환인 것입니다. 이 점은 ‘아버지께 되돌아온 아들의 비유’(옛날에는 ‘탕자의 비유’라고 함)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버지를 저버리고 객지에서 제멋대로 살던 아들이 아버지께 되돌아가는 비유의 말씀은 회개한 사람의 가장 좋은 예입니다. 전인적인 방향전환이라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현대인은 너나 할 것 없이 너무나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앞만 보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나무 가지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일 년에 적어도 두 번씩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하느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순시기와 대림시기가 바로 그 때이지요. 특히 대림 시기는 년말연시와 맞물려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 삶에로 나아갈 수 있는 아주 좋은 때입니다. 혹시 중요한 것을 빠뜨리지 않았는지?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붙잡고 안절부절 하지 않았는지?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다 옳은 양 생각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뒤돌아보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방향을 바로잡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세례자 요한은 지금 이순간도 저 황량한 광야에서 우리를 향해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사회교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인권주일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모든 사람은 존엄합니다.(인간존엄성의 원리) 부유한 나라와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연대성의 원리) 정책결정에 있어서 집단이나 기구들은 개인의 역할과 창조성을 존중해야합니다.(보조성의 원리) 공동선은 인간성을 완성시켜갑니다.(공동선의 원리) 사랑은 우선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드러나야 합니다.(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 지상의 모든 자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져야 합니다.(경제정의의 원칙)

형제자매 여러분,
2000여 년 전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외치신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되새기고 대림 제2주간을 지내며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도록 합시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 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루카 3,4)

안동교구 김영필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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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만족할 줄 아는 삶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살면서 특별히 '인간의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인권주일이다. 인권은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부여하신 선물이기에 그 자체로 존엄하다. 존엄하기에 누구나 존중받아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든지 인권을 강조하지 않은 때는 없었다.

우리나라 헌법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1조 2항)고 천명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는 그 자체로 존엄하므로 그 어떤 제도, 법보다도 우위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권리를 가진다.

오늘 복음사가가 요한 세례자 입을 빌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6)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구원받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모든 사람이 주님 구원을 받게 될까.

물론 대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그 구원에 대한 믿음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구원은 언제나 소수의 가진 자들이나 힘 있는 자들 것이고, 다수의 일반 서민계층은 홀대받고 변두리로 밀려나는 신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무렵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월만 흘렀지 인권 상황은 개선됐다기보다 오히려 더 악화해가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부여해주신 인권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홀연히 등장한 이가 있었다. 바로 요한 세례자다.

그는 요르단 강 부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통해 주님께서 오시기에 앞서 실종될 대로 실종된 당시 인권 상황을 고발하고 바로잡아보려 노력한 분이다. 불행하게도 그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모여든 회개의 주인공들은 결국 침해된 인권을 보호받아야 할 가난한 서민이고 보면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백성의 지도자나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종교 지도자들, 학자들과 부자들은 거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의 변호자로 자처하던 종교인과 정치인, 지식인과 경제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들 대신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던(마르 1,6-7) '한 가난한 노숙자'가 홀연 주님께서 오실 길을 마련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돼 세상을 향해 외쳤다. 요한 세례자가 광야에서 첫 번째로 일갈한 것은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루카 3,7-8)는 것이다. 그러자 모여 있던 군중이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는다.

요한이 그들 질문에 첫 번째로 대답한 것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였다. 군사들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3,14)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못 가진 이와 나눌 줄 아는 삶과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삶(필리 4,11-13)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3,16)고 너무도 분명하게 고백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광야에서 외치는, 주님의 길을 고르게 마련하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나보다 못한 이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돼야 할 것이다.

사실 나눔은 타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이자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출발점이고, 만족은 자신의 일상생활 하나하나를 모두 주님께 맡겨드리는 순종과 겸손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던가. 그렇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누구보다 먼저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 가진 자와 배운 자, 힘 있는 자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돼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 땅에 빛이고 희망이신 주님께서 오실 길을 고르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안동교구 신대원 신부
  |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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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요한의 선포

예전에 보좌신부로 있을 때 어떤 청년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부님들이 왜 정치에 관여를 합니까?’ 마침 다른 청년들도 함께 모여 있던 자리였기에 이 기회에 사회교리에 대해서 말해주면 좋겠다 싶어서 관련된 교리들을 이래저래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준비되지 않은 어설픈 설명이어서인지 그 청년은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금 설명을 했어야 하는데 결국 그러지 못해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비자 교리를 하게 되면 사회교리에 조금 더 신경이 쓰입니다.

교회에서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것과 관련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창세 1,26) 인간을 지어내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模像)으로 창조되었기에 존엄성을 지니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의 보편적 권리인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주일로, 그 주간을 사회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점점 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진행된 물질만능주의와 무한경쟁사회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존엄성의 가치를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맞물려 정권의 권력자들 또한 약자의 보호나 국민들의 권익보다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국민들을 이편, 저편으로 나누어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세례자 요한이 행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선포는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해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로서 주님의 길을 마련한 사람입니다. 죄로 인해 무너진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회복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킨 것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념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요한의 선포가 없었거나 소극적이었다면 세상이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조금은 더뎌졌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으며,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특별한 은총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우리가 이제는 요한의 소명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평화에 대해 당당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요한의 선포를 우리 삶의 자리에서 완수한다면 성탄절은 연인들의 축제일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 안동교구 정성호 세례자 요한 신부 - 2015년 12월 6일
  |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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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 감사하기(Give and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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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이들, 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자선 주일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배고픔에 시달리고, 집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병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하고 고통받고 천대받는 이들의 벗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에 그리스도의 사랑 실천 운동을 대중화해서 실천한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천교구에서 했던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이었습니다. 참 좋은 운동이었고 의미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사회 일각에서도 낮은 수준에 머문 나눔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1%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유언사이트’라는 것이 있는데 이곳에 들어가서 유언을 해 놓으면 그대로 해줍니다. 법적 효력도 물론 있습니다. 가령 재산의 50%는 학교에 장학금으로 주고 50%는 무료급식소에 주라고 유언을 해 놓으면 그대로 해 준다는 겁니다.

이런 물질적인 나눔과 아울러서 시간 나누기, 노동 나누기와 같은 ‘품앗이 운동’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피아노학원 강사인 젊은 엄마의 어린아이들을 이웃집 아주머니가 봐주면 자신은 이웃집 아주머니의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는 겁니다.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옆집 아주머니가 김장을 해 주면 그 할머니는 아주머니 집에 가서 집안 청소를 해 주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방식에서 주고받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바로 품앗이 운동입니다. 나눔의 대안적인 방식으로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야 할 겁니다.

품앗이 나눔의 방식처럼 나눔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참 할 수 있는 것이어야 좋은 겁니다. 이런 운동이 확산이 되면 나눔이라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고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바꾸어 주는 계기도 됩니다. 또한 나눔의 문화가 빈약한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숙한 단계로 끌어 올릴 수 있게 됩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며 무저항주의자이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을 지닌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의 일에 아무 관심도 없이 오로지 피안의 세계에 잠겨 악기나 연주하면서 지내는 종교는 종교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

지금 굶어 죽어가는 이웃이 옆에 있는데, 지금 추위에 떨고 얼어 죽어 가는 이웃이 옆에 있는데, 아파서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기도만 하면서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겁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십시오.’ 이렇게 말만 하는 종교는 종교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굶어 죽어가는 이웃이 있으면 밥을 주고,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에게 연탄 한 장이라도 사 주고,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는 함께 고통에 동참해 주어야 종교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어여삐 여기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교우 여러분들 중에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성녀 마더 데레사가 우리에게 남긴 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내어줄 것을 얼마만큼 갖고 있느냐보다는 우리가 얼마만큼 자신을 비우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비워야만 가득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나눔을 실천할 때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나눔의 영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주고나서 잊어 버리는 겁니다.(Give and forget) 더 나아가서 ‘주고 감사하기’(Give and Thank you)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내가 나눠 주었는데 상대방이 받아줘서 오히려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나눔은 복음적인 나눔이 됩니다.

자선 주일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 보고 늘 나누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비우고 뭔가를 이웃에게 나눌 때 그리고 ‘주고 감사하기’(Give and Thank you)를 할 때 그곳이 바로 구원이 베풀어지는 곳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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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교구 김시영 베드로 신부 : 2018년 12월 9일
  |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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