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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있어야 할 자리에….
조회수 | 2,225
작성일 | 06.12.16
내 책상 위는 늘 어지럽다. 온갖 잡다한 서류와 책으로 책상(冊床)이 책산(冊山?)이 되고 만다. 그래서 한 달에 한번 대대적으로 정리 작업을 하지만 늘 그때뿐이고 금세 서류가 또 쌓이고 책과 자료들로 넘쳐난다. 혼자 살기에 망정이지 늘 잔소리에 시달렸으리라.

예전에 보좌 신부를 할 때 청년 집에 저녁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말이 초대지 김치찌개에 소주 한잔하러 갔는데, 녀석의 방을 들어가 보니 너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오늘 손님들 온다고 열심히 청소 했구나?” “아뇨. 늘 이런데...” 궁금했다. 어쩜 이렇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고 깨끗한 방을 유지 할 수 있는지... “그래? 그 비결이 뭐니?” (나에게는 적어도 ‘비결’이였다.) “비결요? 그런 거 없고요. 음... 그냥 각각 물건의 위치를 정하고요 그 물건을 쓰고 나면 다시 그 자리에 갖다 놓는 거예요. 그럼 따로 정리할 필요가 없어요.” 뭐 대단한 비결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각각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맞는 얘기다.

저녁에 내방에 들어와보니 가관이었다. 그래! 있어야 할 자리로 옮겨보자! 책은 책꽂이에, 옷은 옷장에, 빨래는 빨래통에.. 얼추 정리가 된듯하지만 아직도 부산하다. 왜 그럴까? 주인 맘대로 때론 책상에, 소파에, 탁자에, 재수 없는 날은 화장실에 헤매고 다니던 물건들이 ‘전 원래 정해진 자리가 없는데요?’하며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물건들도 많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것들도 많았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 어디 내 물건들뿐이겠는가? 흐트러진 내 마음, 내 영혼, 내 육신은 있어야할 그 곳에 있었던가?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 된지도 벌써 3주가 흘렀다. 우리가 매년 첫머리에 이런 저런 정리를 하고 계획을 세우듯 한해를 돌아보며 난 제자리에 있었는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는지 아님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였는지, 되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의 아들딸로 그 자리에 있었는지, 사제 수도자라면 있어야 할 그곳에 있었는지,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엄마로서 그 자리에 있었는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면서 궁색한 변명과 과장된 치장만 하지는 않았는지….

이제 곧 예수님이 오신다. 그분께서는 늘 필요한 그 자리에 계셨다. 가난하고 병든자를 위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위에 계셨고, 구원의 완성과 희망을 위해 부활의 모습으로 계셨다. 그분은 언제나 늘 항상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계셨다.
난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주님이 물으신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모든 것들이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는 ‘~ 다울 때’ 입니다. 개나리꽃은 개나리꽃다울 때, 장미꽃은 장미꽃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됩니다. 아름다움은 일부러 꾸미고 변화시키려 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충실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들이 먼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애써 꾸미려 하지 마십시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내 모습에 충실할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 임현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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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

오늘 복음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심판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회개를 행실로 보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그러자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첫째, 군중입니다. 군중에게는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분배의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서의 형제애를 말합니다.
 
어떤 형제들에게는 없고 나에게는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나에게 은총으로 주신 것이기에 나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것을 형제들이 나누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형제애에서 나오는 나눔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리들입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루카 3,13)고 말합니다. 세리는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선한 이와 악한 이가 따로 구분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완벽한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완전한 것을 요구하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비를 베풀어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군사들입니다.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 14)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군대 조직과 같은 집단이나 게토화된 그룹 이름으로, 또는 자기들 이익을 위해 하느님이나 정의의 이름을 빌어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형제애를 통한 나눔, 마음에 차지 않고 부족한 이들에게 베푸는 자비, 자기들만이라는 집단 이기심에서 벗어나 선행의 열매를 맺는 일이 바로 주님의 기다림을 준비하는 신앙인의 열매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우리가 청원하는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꼭 들어 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11).
 
그러나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한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위로를 해 봅니다. 나의 믿음이 약하구나, 또는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옳지 않은 것을 바랬구나, 또는 내가 청한 것을 다른 방법으로 이미 주셨는데 나는 모르고 있구나, 또는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떤 깊은 속뜻이 있으시겠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위로들이 주님께 청원한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문제는 주님께 청원의 기도를 올렸다면, 그 기도가 실현되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닙니다. 주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를 통해 청하는 바를 스스로도 책임을 지고 응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다면,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제로 대화하고 용서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들끼리 만이라는 집단 이기심에서 벗어나도록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구체적으로 희생과 봉사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오신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이제 모든 것을 묻고 새로운 시기를 맞을 희망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이 되셨듯이, 우리도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살과 피를 담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는 질문에 응답이 돼야 합니다.

▶ 홍승모 신부
  |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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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 우리 본당 관할 구역을 이곳저곳 걸어 다녀 보았습니다. 사실 이 동네는 제가 어렸을 때, 놀던 곳이었답니다. 즉,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이 동네에서 보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지역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걸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이 바뀌었더군요. 불과 2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선 제가 살았던 집을 찾아보았습니다. 집이 커서 눈 쓸기가 무척 힘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집. 그런데 그 집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더군요. 대신 그 자리에는 빌라 건물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시간만 나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야구를 하면서 뛰놀았던 공터를 찾아가보았습니다. 역시 그 넓은 공터는 사라진지 오래고 대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습니다. 또한 학교 여학생들 놀려준다고 개구리를 잡던 늪지 역시 높은 아파트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더군요.

조금 서운하더군요. 어렸을 때의 나의 흔적들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니까 말이지요. 이제는 단지 내 기억의 한 자리로만 있을 뿐, 직접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서운한 감정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정말로 빨리 세상이 바뀌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과 20년 전의 이야기인데…….

어쩌면 이렇게 바뀌는 속도는 앞으로 더 빨라질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람들도 참 빨리 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것은 변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조차 변하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나의 첫 번째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첫 번째 자리에 위치시켰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예수님보다 세례자 요한이 더 유명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따랐고, 이 정도의 인기라면 충분히 어떤 세력을 만들기에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그런 세력을 만들지 않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자기 본연의 임무인 예수님을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세례자 요한의 위치에 서 있다고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구세주라고 생각하면서 따르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아니다.”라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런 겸손의 모습이, 그리고 자신의 임무에 끝까지 충실한 그 항구함이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요?

겸손하지 않은 모습, 세상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불안한 나의 모습들이 예수님과의 간격을 더욱 더 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빠름에 너무나 쉽게 변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대한 사랑은 변하지 말도록 합시다.

▶ 조명연 신부
  |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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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친구

우리 교회는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지냅니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마굿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뵈올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난한 이웃들과 가진 것을 나누는 자선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최고의 준비이며,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셋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가장 좋아하고 신뢰하는 친구였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좋아하기는 했지만 첫 번째 친구보다는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먼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성문 앞까지만 같이 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를 찾아 갔습니다. 그 친구는 말했습니다. “기꺼이 함께 가주겠네.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나가는 것이 친구 아니겠나?”

이 이야기에서 첫 번째 친구는 재산입니다. 재산이 제 아무리 많고, 또 그것을 아주 사랑할지라도 죽음이라는 먼 길을 떠날 때에는 남겨 두고 빈손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입게 되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나 봅니다.

두 번째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역시 묘지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 이후에는 혼자 가야 합니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자선)입니다. 평상시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마지막인 죽음에도 동행을 해줍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에 있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을 보면 선행이라는 친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의 길까지 함께 쫓아가서 심판 때 그를 변호해 주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친구는 바로 선행이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진짜배기 친구와 함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면 어떨까요?

▶ 정인화 야고보 신부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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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나누는 것

자신의 길보다는 주님의 길을 닦으신 세례자 요한

오늘 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분이 오시니,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겸손하게 메시아가 오실 길만을 닦고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하였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잘 가는 사람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善行 無轍迹)”고 하여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공을 세우고도 타인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지만, ‘무철적 약경(無轍迹 略境)’의 말처럼 메시아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였고, 평생 무소유로 가난을 실천하다 순교하신 분입니다.

소유보다는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

5백여 년 전 에라스무스는 <바보예찬>에서 대담하게 교회를 비판합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신부님, 교황님께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난을 사시고, 모든 세속적인 일에 대해 경멸하고, 그리스도의 현명함이 단 한번만이라도 이분들의 정신을 점령한다면, 엄청난 부, 하느님의 명예, 수많은 고관대작의 분배, 다양한 세금, 향락의 날들 등 얼마나 많은 보물을 잃어버릴까? 대신 진정한 회개를 위한 단식, 기도와 눈물이 들어설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교회가 복음으로 회귀(回歸)를 하여 당시 형식과 물질에 질식당해있던 교회를 정화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박해를 당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처럼 나눔을 실천하는 생활태도입니다.

진정한 자선은 내가 아끼고 소중한 것을 나누는 것

세례자요한은 신앙인의 자세는 “자선(慈善)”임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나눔’이란 말을 들으면 물질을 생각합니다. 경제대국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에도 5천만 명이 의식주(衣食住)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하루 10만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 가고,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동포, 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들, 청년실업자들의 슬픔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구상 시인은 생전에 집을 판돈 2억 원을 희사하시면서 장애인문학지 ‘솟대’에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철저히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시를 썼습니다.

이처럼 나눔은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쓰고 남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나눔은 나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 따뜻한 미소, 다정한 눈빛은 훌륭한 자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기주의적인 삶으로 이끄는 알코올중독

우리자신에게 “나는 이기주의자, 개인주의자, 이타주의자 중에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입으로는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산다고 말하면서 마음과 행동은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중독이 문제가 되는 것은 매사에 자기만 알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알코올중독자가 있으면 언젠가는 집과 재산이 술로 변해버립니다. 나 역시 알코올중독 시절에 미사예물을 전부 술로 탕진했고, 세 아들을 모두 신학교에 보내고 아버지를 일찍 여의신 어머니에게 생활비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점이 지금도 가슴 아픕니다. 알코올중독은 나로 하여금 어머니보다는 술을 먼저 찾는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을 살면서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어렵겠지만, 가능하고 쉬운 나눔부터 실천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기쁨을 나누면 배로 늘고,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

▶ 허근 바르톨로메오 신부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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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회개의 증거인 자선

지난 대림 제2주일에 우리는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회개는 그동안의 나의 삶에서 방향을 돌려 하느님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 때마다 양심 성찰을 통해 가슴을 치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일 년에 두 번은 고해성사를 하면서 회개의 삶을 다짐합니다. 그렇다면 양심 성찰을 하고, 고해성사만 하면 회개한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이렇게 회개의 구체적인 증거가 바로 자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본당에서는 김장철이 되면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제가 살고 있는 사제관 앞으로 온갖 김장용 채소와 양념거리들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자 분들은 배추를 가져오시고, 또 다른 신자 분들은 제 다리보다도 두꺼운 무를 가져오시고, 다른 분들은 또 다른 김장용 채소와 양념들을 가져오십니다. 그래서 김치소를 버무릴 때도 고춧가루가 색이 전부 제각각입니다. (올해도 김치소를 버무리느라 허리가 좀 아팠습니다.) 김장을 할 때면 김장 재료의 대부분을 신자 분들이 직접 농사지으신 것으로 사용합니다. 이렇게 김장을 해서 성당 냉장고에 넣어두어 본당 행사에 사용하고, 또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배달합니다. 옛날, 텔레비전 연속극 <전원일기>에 나왔던 양촌리가 바로 우리 동네입니다. 지금은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와서 옛 양촌리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신자 분들이 직접 기르신 농산물로 성당에서 김장을 하고 이웃들과 나누는 모습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에서 땀 흘려 가며 지으신 농산물들을 기꺼이 이웃을 위해 내어놓으시는 신자 분들의 마음이 너무나 고맙고 아름답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면서 자선 주일입니다. 지난 12월 8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특별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황님은 희년 선포 칙서인 ‘자비의 얼굴’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비란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어야 하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 36)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선행, 작은 봉헌까지도 모두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루카 12, 34)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 6, 18)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주일에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회개의 삶을 살도록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회개의 구체적인 증거가 자선임을 기억하고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눌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 인천교구 조용수 베드로 신부 - 2015년 12월 13일
  |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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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호주에서의 일정도 거의 끝나갑니다. 오늘 낮에 마지막 특강을 마치고 내일 새벽이면 이곳 호주를 떠나 한국으로 갑니다. 그래서 내일 새벽 묵상 글은 올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이곳 새벽 시간에 공항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묵상하고 글을 올릴 시간이 없을 것 같네요. 이제 하루 쉬고 15일(화) 새벽에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오늘의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대통령 전용차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 가격이 어마어마하더군요. 왜냐하면 이 차의 성능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지만 무게가 2톤 가까이 나가는, 거의 장갑차 수준이라고 합니다. 방탄유리는 기본이고, 폭발물에 의해 타이어 4개가 모두 펑크가 나도 시속 80Km의 속도로 100Km 정도 달릴 수 있는 런플랫 타이어까지 장착되어 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지만, 신변 안전이라는 이유로 방탄차는 물론이고 많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활동의 제약을 겪는 대통령의 위치가 과연 행복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권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저는 온 몸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전혀 불안하지 않으며,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과연 권력이란 것이 좋은 것일까요? 막강한 힘을 구사할 수는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유를 억압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리가 더 행복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봅니다. 그는 광야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지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인기를 받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고 말만 했어도 세례자 요한은 더 큰 지지와 사랑을 얻었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속여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무조건 복종할 수 있도록 하면 편안한 점이 더 많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할 만한 권력을 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며 더 큰 능력을 지니신 주님이 오심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면서 주님 앞에 작은 자라는 것을 이야기하지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을 걷어 차 버리는 말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순명하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작은 자의 모습이 더욱 더 행복한 삶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작은 자의 모습도 기쁘게 선택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이렇게 주님 앞에 작은 자만이 곧 다가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5년 12월 13일
  |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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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 저축하는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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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전에 베푼 자선은 ‘금’, 병중에 베푼 자선은 ‘은’, 죽은 후에 베푸는 자선은 ‘동’, 말로만 하는 자선은 ‘실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이를 위해서 자선을 베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보다 더욱 어려운 일은 베풀었다는 생각조차 잊는 것입니다.

“신부님 기도해 주세요. 나중에 잘되면 도와드릴게요.” 이는 제가 20여 년 동안 사제 생활을 하면서 자주 들어왔던 말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를 청한 이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잘 살고 있음을 보고 느낄 때는 뿌듯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기도를 청한 이 가 교회에서 보이지 않거나 베풀지 않고 사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는 아직도 성에 안 차거나 잘 안되고 있는 중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잘 베풉니다. 2세대는 그럭저럭. 3세대는 사고나 안 치면 다행입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겪은 고생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닌데….”라고 하면서도 막상 실천하기에는 주저하거나 나중으로 미루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TV를 통해서 모금을 하는 단체를 보면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의 모습, 굶으면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아이의 모습, 전쟁에서 팔과 다리가 잘린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을 많이 사용합니다. 자극적인 실상이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이 전 세계에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더 충격적인 영상을 보여줘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웬만한 자극과 충격이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힘든 것을 알지만 미담을 알려주는 방식이 좋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하시며 인간에게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를 주셨고, 나눔을 통해 더 좋은 세상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감사하는 마 음으로 하느님께 예물을 봉헌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가 가까이 있음을 알고 그들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라.”(마태 25장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난민을 돕자고 하면 우리나라에도 힘든 사람 많다고 하고, 가난한 누군가를 돕자고 하면 그 사람이 게으르거나 환경이 나쁜 탓이라 하고, 노동자를 돕자고 하면 회사가 살아야 한다고 하고, 청소년 활성화를 이야기 하면 노령 인구 가 많아지니까 그쪽에 신경 써야 한다고 하고, 노령화되어가는 교회를 고민하자고 하면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음악의 보배인 그레고리오성가, 다성음악, 고전·낭만시대의 장엄한 미사곡을 살리자고 하면 생활 성가를 이야기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기는 하지만 전부 다 우리의 일입니다. 원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선의를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먼 훗날 하느님을 마주하게 되는 때 하느님 나라에 여러분의 곳간이 채워져 있기를 바랍니다. 인천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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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김선호 루카 신부-2018년 12월 16일
  |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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