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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조회수 | 2,702
작성일 | 07.04.1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형의 죽음을 통하여 그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 배를 타고 그물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너무나도 허탈한 마음으로 새벽에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우리가 밤새도록 그물을 쳤지만 허탕을 쳤는데 뭐 별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어부인데, 우리보다 누가 이 갈릴레아 호수를 더 잘 안 단 말인가? 그렇게 치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쳤더니 의외로 엄청나게 고기가 많이 걸렸습니다. 그때 사랑하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자 베드로는 단번에 호수로 뛰어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들은 잡은 물고기를 불에 구워 빵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세 번째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좌절과 허탈함 속에서 방황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럴 때 우리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아라."하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똑 같은 말씀을 하시며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좌절과 허탈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설사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주님의 목소리를 간과해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부 고수이지만 초출인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때 엄청난 고기를 잡을 수 있는 큰 기쁨을 안겨 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전교를 할 때에도, 어떠한 일을 할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는 말씀대로 주님 없이는 아무런 결실도 내다볼 수 없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언제나 풍성한 결실과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아침을 함께 드신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물었습니다. 세 번이나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한 사실을 상기하듯, 그래서 베드로는 슬퍼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하시며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가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할 목자로서의 직무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온 교회에 대한 사목직을 부여하시면서 한편 그가 당하게 될 순교에 대해 은근히 예고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곧 베드로의 직무는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물어 보십니다.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떳떳하고 기쁘게 대답합시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여러분의 말과 행동도 달라질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여러분의 삶도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기쁘고 떳떳하게 살 것입니다. 아멘.  

안동교구 정상업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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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여인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설령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해도 그 분을 만날 자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큰 소리로 맹세를 해놓고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는 정작 등을 보이고 말았으니 예수님을 뵙기는 부끄러웠고 찾아볼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배신으로 예수님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먼저 자신을 찾아주었습니다. 더 사랑받았고 더 가까이 있었던 제자였기에 더 죄송한 마음 가득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살아서 자신들을 먼저 부르고 있으니 감개무량했습니다. ‘주님이십니다.’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옷을 추슬러 입고 물에 뛰어드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예수님께 대한 충성스런 제자로 다시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물에 뛰어드는 그의 모습은 더 많이 용서받았으니 더 충성해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보입니다.

이미 그렇게 죄 많은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주셨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며 세 번이나 연거푸 질문합니다. 가슴이 뜨끔합니다. 당연히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자신의 죄스런 과거 때문에 창피합니다. 어떻게 해야 내 속을 다 꺼내놓고 보여드릴까 싶어 눈물이 납니다.

‘지울 수만 있다면 당신을 모른 척 했던 그 순간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차라리 그때 예수님이랑 같이 죽었어야 더 행복했을 것이다’라고 베드로는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슴 아파하는 그에게 ‘내 양을 잘 돌보아라.’하고 자신을 인정해 주십니다.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자신에게 맡기신다는 것은 그만큼 베드로 자신을 인정하시고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며 그를 이미 용서하셨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재신임(再信任)은 그렇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후 예수님 승천 이후에 베드로는 자신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말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를 사용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같습니다. 후에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처형 당할 때 "우리 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는데, 어찌 내가 똑같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말하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얘기할 수 있는 신념을 가지고 살게 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죽으면서까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잊지 않고 살았나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인간으로 한계가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그 누구보다 사람의 약점을 더 잘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할지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주님과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저지르기 전에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님은 용서만을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치유도 같이 주시고 악을 선으로 다시 바꿔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이 부분은 창세기 마지막과 일맥상통합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세기50:20)

나의 죄로 인하여 하느님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처럼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되 더 용기 있게 당신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야합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우리의 죄가 진홍색같이 붉을 지라도 눈처럼 희게 하실 수 있습니다.

▶ 차광철 베다 신부
  |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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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낚는 어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내적 기쁨이 컸겠지만 한동안 약간의 혼란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 다시 나타나실까?’, ‘앞으로 뭘 해야 하나?’, ‘예수님께서 또 다른 일을 맡기실까?’ 등등 복잡한 심정이었겠죠. 우선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 마음을 추스르며 예수님으로부터 답을 얻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을 때 제자들의 수고는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먼저 갈릴레아 호숫가에서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을 부르시며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죠. 이제 예수님은 지상 사명을 마치시고 고기잡이를 하는 그 호숫가에 다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예전에 말씀하셨던 ‘사람 낚는 어부’, ‘천상 어부’로서의 사명을 일깨워주십니다. 153마리의 고기는 당시 갈릴레아 호수에 사는 물고기 어종을 합친 숫자라고 하는데, 이는 제자들을 비롯한 교회공동체가 모든 민족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맡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상징적 숫자입니다. 어떻든 제자들은 앞으로의 소명을 수행함에 있어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분과 함께 할 때 큰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시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지상 교회의 수장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죄스런 과거가 자신의 발목을 잡으면 곤란하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관계가 우선적으로 ‘사랑’으로 맺어져야 함을 일러주고자 하십니다. 똑똑하고 말 잘하고 업무능력을 갖추는 기술적인 관점보다 스승을 향한 마음, 애정이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인간적 실수가 많더라도 늘 주님께 기대며 순수하고 용감하게 달려갔던 베드로 사도처럼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은 후 곳곳에 파견되어 혼신을 다해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봉헌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그분 삶의 방향을 따라 살기로 다짐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굳어진 방식을 고집하기도 하고, 편안함을 추구하거나 세상의 욕망과 흐름에 묻혀 그물을 배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던지기도 합니다. 나는 주로 어느 쪽으로 그물을 던지며 사는지 묵상해 봅시다. 아울러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어떤 대답을 드리며 사는지 성찰해 봅시다.

안동교구 이형철 바오로 신부
  |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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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 제3주일이다.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오늘 실의에 빠져 예전의 일터로 돌아가 버린 당신 제자들을 다시 찾으신다. '작용 반작용'이라는 물리학 법칙처럼, 희망과 절망의 법칙이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적용된 듯하다.

스승이신 예수께 모든 것을 의탁했던 희망이 꺾이자 제자들 삶은 절망으로 바뀌고, 생명의 말씀 대신에 현실의 호구지책을 선택해버렸다.

사실 누구든 자기가 품고 있는 희망이 무너져버리면 실의에 빠지고 낙담하기 마련 아닌가? 낙담하게 되면 그동안 품고 있었던 대의(大義)는 내려놓고 사사로운 이기적 본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세상 풍토이다.

진심과 욕심의 차이는 순천(順天)과 역천(逆天) 차이와 같다. 주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이냐, 아니면 세상의 재산과 권력이냐는 백지 한 장 차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제자들은 토마스처럼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며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접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불신으로 변하고, 그 불신으로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으며, 결국 주님과 함께했던 지난 삶과 언제까지나 함께하겠다던 맹세(마태 26,33)마저 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활하신 분께서는 불신으로 가득 차서 희망마저 접어버린 채 먹고사는 데 급급한 제자들을 다시 찾으신다. 당신을 등지고 떠나버린 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신다. 마치 그 옛날 갈릴래아 호숫가 추억이라도 불러일으키시려는 듯,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신다.

부활이신 분은 결코 못난 사람들이라고 해서 버려두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의 넉넉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품으로 불러 모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는 말씀 대신에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 이하)라고 세 번씩이나 물으시고 또 명령하신다.

부활이신 분이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이 명령은 차라리 요청이나 간청에 가깝다. 왕 중의 왕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배반하기를 식은 죽 먹듯 하는 인간들에게 이처럼 간곡하게 부탁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유명한 '목자의 비유'(요한 10장 참조)를 통해 당신과 뭇 중생의 관계를 설정하신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7절), "나는 착한 목자다"(11절). 양들의 문이기에 양들이 그리로 드나들고, 착한 목자이기에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으며 결코 삯꾼이 될 수 없으시다.

예수께서는 이제 그러한 당신 직분을 철도 없고 의리도 없어 보이는 제자들에게 맡기시려는 것이다. 제자들이 당신께서 가실 길을 함께 걷게 하고, 제자들이 걸어가는 그 길에 당신께서도 함께하시기(마태 28,20) 위함이다.

함께 손 맞잡고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의 참모습이다. 하지만 아무리 주님께서 부르시고 간절한 마음으로 요청하신대도 거기에 대한 응답(신앙고백)은 역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몫이다.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다짐을 받듯이 물으시는 바람에 슬퍼진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7)라고 자신의 진정성을 고백하자, 주님께서는 "나를 따라라"(요한 21,19)고 하신다. 이 따름의 공동체는 부르심과 응답의 공동체이고, 사랑의 공동체이며, 부활을 믿고 부활을 사는 공동체의 참모습이다.

오늘도 부활이신 분, 사랑이신 분께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고 물으신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함께 갈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이 맡겨주시는 직분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부활로 향하는 길이다. 그 길이야말로 이 땅에 사랑과 믿음과 희망, 그리고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샘솟게 하는 길이다.

새로 베드로좌를 물려받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활하신 분과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세우고, 십자가 없이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세속적인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주교와 사제, 추기경, 교황, 그 외의 모든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다"라고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을 건네신다.

이 말씀은 결국 부활하신 분께서 걸으신 그 길을 함께할 사람만이 성실하게 응답하게 될 방향타와 같다.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고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명령하시며 응답을 기다리신다. 그분은 우리의 응답을 보시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며 앞장서신다.

남은 과제는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응답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안동교구 신대원 신부
  |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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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새출발

감동적인 체험

티베리아 호숫가, 이른 새벽 동이 터올 무렵, 숯불을 피워놓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는 모습,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밤새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제자들을 위해 예수께서 미리 숯불을 피우시고 생선을 구워 손수 집어 주시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침식사 전 제자들은 고기잡이에서 특별한 체험을 했지요.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을 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는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졌더니 끌어올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때 요한은 그분이 주님이심을 직감했습니다. 이 장면은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이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연상케 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랐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었고,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계기가 되었었지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에서의 고기잡이에 대한 체험은 제자들의 소명의식을 한층 더 깊고 성숙하게 해주었으리라 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서 큰 결실을 거두었던 체험, 그분 친히 차려주신 아침밥상을 함께 나누었던 아름다운 체험은 제자들의 기억 속에서 두고두고 살아나 미래의 사명수행에 있어 큰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었으리라 믿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아침을 드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아픈 상처를 치유해주시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지상 교회의 수장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죄스런 과거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으면 곤란하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관계가 우선적으로 ‘사랑’으로 맺어지기를 바라십니다. 똑똑하고 말 잘하고 업무능력을 갖추는 기술적인 재능보다 스승을 향한 마음과 깊은 애정이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인간적 실수가 많더라도 늘 주님께 기대며 순수하고 용감하게 달려갔던 베드로 사도처럼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은 후 곳곳에 파견되어 혼신을 다해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목숨까지 봉헌하면서 그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도록 초대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삶의 방식을 묵상하며 성찬의 식탁에서 자주 힘을 얻고, 그분께서 가리키는 곳 배 오른쪽, 주님의 부활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세상 곳곳에 나아가 힘차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합시다. 특별히 아픔이 있는 곳, 그늘진 곳에 먼저 다가가 그분의 희망을 전하도록 합시다. 주님께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정성을 다한다면 그분께서는 함께하시면서 많은 결실을 맺어주실 것입니다.

▦ 안동교구 이형철 바오로 신부 : 2016년 4월 10일
  |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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