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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하늘나라는 끊어버림에서 온다.
조회수 | 2,585
작성일 | 07.06.28
제1독서 : 1열왕19,16ㄴ. 19-21
제2독서 : 갈라5,1. 13-18
복   음 : 루가 9,51-62    

[묵상길잡이]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장례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을 요구하시며,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하신다. 제자됨의 길은 갈림 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름에 있다.

1. 철저히 버려야 완전히 얻을 수 있다.

"버림으로 얻고, 미워함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극복하기 힘든 대표적인 욕심이 물욕, 성욕, 권세욕이라고 한다. 물욕에서 해방된 사람만이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사심이 없기에 많은 돈을 관리하고,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성적(性的)인 욕구를 철저히 끊고 뛰어넘은 사람만이 모든 이성(異性)을 참으로 자유롭게 대할 수 있고, 소유가 아닌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든 권위와 권력이 지배가 아니라, 봉사를 위한 것임을 깨달은 사람만이 참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물건이나 사람에 대해 그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있는 한,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상대방이 나를 소유하려는 것을 느끼게 되면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이 없을 때 참으로 사심 없이 대하고 위할 수 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2. 깨달음을 얻는 첫걸음은 끊어버림이다.

불교에서  특별한 전통과 맥을 이어온 종파는 선종(禪宗)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되기 전부터 중국에는 이미 불교의 교리를 꽃피울 충분한 정신적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선(禪)불교가 중국에 소개되기 이전에 장자(莊子)는 이미 기원전 4세기에 '본질을 꿰뚫어 봄(본질직관:本質直觀)'에 대하여 깊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본질을 꿰뚫어 봄'이란 바로 '깨
달음' 즉 '득도(得道)'를 말하는 것인데, 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말하면서, 심재(心齋), 좌망(坐忘), 조철(朝徹)을 이야기하고 있다.

심재(心齋)란 마음의 재(齋)를 말함인데, 마음이 제 멋대로 오락가락하도록 방치하지 말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을 뜻한다. 즉 심지(心志)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세상만사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깨달음을 얻는데 온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좌망(坐忘)이란, '모든 것에서 마음을 거두어 잊어버림'을 말한다. 이는 '모든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심지어 살겠다는 욕심이나,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마저 끊어버리는 '완전한 자기 비움'을 말하는 것이다.

조철(朝徹)이란, 이는 문자그대로 '아침의 맑음'을 말함인데, 새벽 여명(黎明)이 밝아 올 때 어둠이 걷히면서 온 천지가 제 모습을 드러내듯이 '모든 애착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완전히 비움으로, 어떤 것에도 매임이 없는 고요와 평화와 맑음'을 말함이다.

이런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본질직관(本質直觀)즉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장자(莊子)의 가르침은 이미 선(禪)불교가 말하는 선(禪)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3.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보면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

'하늘나라를 얻음'은 바로 '하느님을 뵈옴'이 아닌가?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추종의 자세를 역설하신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해 모세와 많은 예언자들과 성모 마리아와 사도들을 부르셨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다."(창세기 12,1),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도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겨야 했다. 성모마리아도 일생동안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하는 자세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며 사셨다.

하느님은 양다리 걸치는 것을 용납치 않으시고, '갈림 없는 마음'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은 "너희는 다른 신(神)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神)이다."(출애 34,14)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버려라."(마태18,8) 하셨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때의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버림으로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장례마저도 포기 할 수 있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추종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성생활의 첫 단계는 '정화의 시기'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세상적인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림이다. 나를 비울 때 하느님은 당신으로 나를 채워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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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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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동참의 법칙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마지막이 될 그 길을 향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쉽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는 부분에서 비장함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분이 들떠있었습니다. 싸우기도 전에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처럼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불살라 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그 기세가 하늘을 찌릅니다.

예수님도 그렇지만 제자들도 그 목적지가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지만 제자들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행복한 미래가 보장되는 곳. 예수님께서 왕으로 서게 되는 곳.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빵 두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오천명이 넘는 사람도 거뜬이 먹이시는 예수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도 밀리지 않는 예수님. 예수님의 거침없는 질주에 제자들은 권력에 대한 환영을 봅니다. 새로운 세상의 주역으로 당당하게 설 수도 있다는 희망도 가집니다.

그런 곳이라면 어느 누가 그 길을 마다하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그 길에 동참 할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 길에 함께 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죽음으로 향한 진군이라는 것을 제자들은 모릅니다. 오히려 승리의 나팔을 불면서 환호성을 올립니다. 그 환호가 예루살렘 입성때 최고조에 이릅니다. 부푼 꿈을 안고 가는 제자들과 마지막 전투를 눈앞에 두고 결의를 다지는 예수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제자들은 분명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고난과 희생이 함께하는 길임을 애써 외면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히려 말리고 들었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합니까? 평화? 행복? 더 많은 재물? 권력?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님에 앞서 우리의 욕심이 앞설 때 예수님을 이용하는 예수쟁이라는 비아냥만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마산교구 이우진(요한) 신부>
  |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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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살아봐야 알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간다고 하면 가봐야 알지라고 말하고, 신학교에 갔다고 하면 되어봐야 알지라고 말하고, 신부가 되었다고 하면 죽어봐야 알지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복음 말씀처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주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라는 열정과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살아봐야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해서 조금 지나면 열정도 식게 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잘 가고 있는지 헷갈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신앙보다는 떠나왔던 세상적인 것이 더 좋아 보이고, 안 믿는 것이 훨씬 편하게 여겨지는 것뿐만 아니라, 안 믿는 사람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 때문에 포기하는 것에 대한 미련과 애착, 어리석은 동경이 마음 깊숙이 파고듭니다. 이쯤 되면 믿고 있는 자신이 어리석게 보이게 되고, 신앙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면서 내가 꼭 믿고 살아야 되는가 하는 회의가 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불바다로 변했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아내가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자신이 두고 온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리지 못해 뒤를 돌아다보아 소금 기둥이 되고 만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엘리사 예언자는 제1독서에서 쟁기를 잡은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쟁기를 잡고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는 엘리아 예언자로부터 자신이 하느님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이 잡고 살았던 쟁기를 부수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새로운 쟁기를 잡고 죽을 때까지 하느님을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충실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님을 믿고 살아 갈 수 있기 위해서는 매 순간 순간 “내가 누구를 믿고 있는가?” “왜 믿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주님께로 나아가게 만들지 못하고 자꾸 뒤돌아보게 만드는가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길이신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하고” 진리이신 그 분 안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고” 생명이신 그분 안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움은 우리를 변함없이 살아보게 만들고 참된 행복에로 이끌어 주게 될 것입니다.

<마산교구 진선진 마태오 신부>
  |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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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O Jesu O Jesu

O Jesu O Jesu me dilecte amabo Te perfecte a tenus quam abero ab hoc seminario(오 예수, 나의 사랑하올 예수여, 나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리니 당신에게서나 이 신학교에서 결코 떠나지 않으리다). protege nos intuere O Jesu dilectissime(지극히 사랑하올 예수여, 우리를 온전히 보호하소서).

싱그러운 여름 향기 잔잔히 스며드는 유월 이맘때면 한 번쯤 입가에 흥얼거려지는 노래 ‘오 예수.’이 노래는 신학교에서 방학을 앞둔 신학생들이 부르는 9일 기도 노래입니다. 방학을 눈앞에 둔 희망과 시험을 코앞에 둔 부담감이 이 노래와 함께 특유의 조화를 이룹니다. 그래서인지 ‘오 예수’는 신학교 시절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이 노래의 노랫말은 오늘 복음 말씀처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라는 내용을 비롯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네 삶에 항구함과 전인전 투신을 요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 노래에는 못자리(seminarium, 신학교) 안에서의 삶을 방학 중에도 계속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약속, 청원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몸은 신학교를 떠날지라도 마음은 못자리(신학교)에서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역시 ‘오 예수’의 노랫말처럼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따름의 삶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따르면 이 소명과 추종의 삶은 언제나 항상 충실히 하는 항구함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즉시 이루어져야 하는 긴급함을, 온전히 모두를 내던지는 전인적 투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세속적 질서와 가치를 뛰어넘는 또 다른 삶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당시 사회 통념상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던 아버지의 장례, 그리고 기본적 인간의 도리로 여겨지는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행위마저도 뛰어넘는 또 다른 가치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질서 안에 사는 우리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 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따름의 삶이 이처럼 결코 쉬운 삶이 아니기에,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따름의 삶에 얼마나 충실하며 사는지 지난 삶을 되돌아봅니다. 아울러 지금 사제로서 살아가는 이 삶이 또 다른 방학은 아닐까 생각하며 신학교 향수를 떠올리면서 ‘오 예수’를 불러봅니다. O Jesu O Jesu ∼ ♪♬

<마산교구 전병이 요아킴 신부>
  |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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