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0 84.4%
[전주] 댁에 평화를 빕니다.
조회수 | 2,219
작성일 | 07.07.06
루가 10,1-12.17-20

사람이면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잘 사는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잘 나거나 못난 사람들, 철부지 어린아이들까지도 평화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원하는 평화는 과연 어떤 것이며 또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또 어떤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진정 지금까지 우리가 원했던 평화와 예수께서 오늘 말씀하신 평화의 관념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시기에 도달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평화의 뜻을 간단히 살펴본 후 우리가 원하는 펴와,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구약성서의 전통적인 평화관념은 첫째조건으로 하느님의 선물로서 완전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행복을 보장해 주는 상태란 곧 우리가 일상생활을 꾸려가는 실존의 유복(裕福)을 의미하며, 자연, 자기자신, 하느님의 三者가 공동으로 화합하여 삶을 사는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두 번째 조건으로 구약성서의 평화관념은 인간의 구원과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영원한 삶을 말하며 정의의 실현이란 온갖 악이 제거되고 오직 선만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서의 평화관념 즉 평화의 원칙적인 관념을 염두에 두고서 지금까지 우리가 원했던 평화와 예수의 평화를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평화하면 전쟁이 없는 안락하고 온화한 생활 상태로 알고 있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쟁의 소용돌이가 없게 된지 어언 25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의 평화관념은 사실상 많이도 변질되었습니다.

전쟁 당시만 해도 어서 전쟁이 끝났으면, 어서 평화가 왔으면 하던 시절의 평화관념은 어느덧 우리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돈만 있으면 평화스럽지 한다던가, 그저 높은 자리에만 앉으면 평화라는 것은 바랄 필요 없지 하는가 하면 뭐니뭐니해도 학력이 있어야지, 학력이 없으면 돈도, 권력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법이야 하는 사람들로 이 사회는 넘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뿐입니까? 좀더 극단에 가깝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별 것 아니야 정력이 좋아서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고 평소에 원했건 일 성취시키면 그것이 곧 평화야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무튼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재력 혹은 권력은 평화, 또는 학력 혹은 정력은 평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관념이 이와 같이 변질된 데는 물론 그만한 원인들이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즉시 손꼽을 수 있는 하나의 원인은 사람들이 생의 목적을 물질에 두고 물질로부터 행복과 삶의 보람을 얻으려 하는 소치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0세기의 물질문명은 과거 지구상에서 그 어느 시대에 이룩했던 물질문명보다 수백배, 수천배 월등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애초에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발명되었던 온갖 물질적인 것들은 이제 와서 사람들의 전신상태 마저 지배하는 괴물, 악마로 둔갑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물질의 다수 획득을 위해 재력이 어떻고, 권력이 어떻고, 학력이 어떻고, 정력이 어떻다고 왈가왈부하게 만드는가 하면 심지어 평화의 최종 목표가 물질인 양 그 물질을 얻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을 확보했을 땐 평화를 얻은 것처럼 소란을 피우는 것입니다.

과연 물질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약속해 주고 있습니까? 물질을 풍성하게 소유한 사람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산더미 같은 물질을 획득한 부자가 평화스럽게 살아보자고 다짐했을 때 세상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비극적인 예화를 루가복음 12장 16-21절에서 읽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물론 물질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를 마치 물질의 선물과 같이 생각하게 되는 데서, 즉 사람의 어리석은 마음이 나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물질을 얻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예로 들면 옛 속담에 “금관자 서슬에 큰기침한다”는 말이 있듯이 권력을 잡으면 권력을 남용한 물질의 확보에 현안이 되고 그러다가 물질에 눈이 어두어진 권력자는 정의를 무시한 폭력을 휘두르다가 스스로의 구원을 포기하고 영원한 삶을 저버리게 되기 때문에 역시 권력 자체보다도 권력자의 어두운 마음을 우리는 질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학력이나 정력의 경우에도 같이 해당되고 있습니다. 결국 평화관념에 대한 변질 여부는 결코 여타의 원인이라기 보다도 오직 한가지 바로 사람들의 간사한 마음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예수의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봄으로써 지금까지 잘못 생각해 왔던 우리들의 평화관념과 비교할 뿐 아니라 우리들의 잘못된 평화관념을 수정함으로써 새로운 평화관념을 갖고 그 평화관념에 의한 진정한 평화를 얻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평화에 대하여 루가 복음사가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라고 2장 29절에서 기록하고 있으며 정력에 의해 평화를 얻고자 했던 행실 나쁜 여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을 때 구원과 함께 주시는 선물이라고(7,50) 기록했고 저녁으로 평화를 얻고자 했던 가련한 병자 부인이 재산을 다 버린 후 마지막으로 예수께로부터 평화를 기대했을 때 틀림없이 생명과 함께 역시 평화를 선물로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8,48)

아무튼 루가 복음사가는 평화란 곧 예수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24,36), 또한 그 평화는 오직 좋은 일만을 지칭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기는 평화는 구약성서에서 전통적으로 말하는 평화관념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우리 생활에 있어서 가져야 할 평화관념과 그 평화의 실현을 위해 취해야 할 태도가 명백해 짐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즉 평화는 물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에게서 얻을 수 있으며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물질을 목적으로 한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의 매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재력, 권력, 학력, 정력을 포기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도 얼마든지 예수의 평화를 얻는 데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복음으로 간직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서 다같이 평화를 얻도록 한다면, 그리고 복음전파를 위해 그러한 것들을 합당하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하트마 간디가 말하는 평화의 조건, “한분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정녕 예수의 평화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전주교구 이순성 신부
450 84.4%
[전주]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도움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사랑으로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려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뽑으셨고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이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온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받아서 세상에 나가는 우리가 오늘 복음의 일흔두 명의 제자와 연결되어 보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우리의 삶에 도 움과 힘, 묵상거리를 전해줍니다.

우리의 “원수”(마태 13,39)는 우리의 이 사명이 멈추거나 지체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원수는 갖가지 것들을 동원해서 우리의 사명에 도전해 오고, 우리를 유혹해 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 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마태 18,20 참조)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공동체를 이루어’(루카 10,1 참조) 이 유혹을 이길 힘을 끊임없이 주고자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의 사명이 계속해서 증거되고 선포되도록 “수확할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루카 10,2 참조)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지체하거나 멈추지 않도록 그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첫째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셋째는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넷째는 병자를 고쳐 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선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지킨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을 돌아다니며 선포를 완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지체하거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선포하도록 그 힘과 도움을 주십니다. 이 힘과 도움에 힘입어 우리는 이 길 안에서 기쁨과 평화, 생명을 얻습니다.

-------------------------------------

전주교구 임범동 사도요한 신부 : 2019년 7월 7일
  | 07.05
450 84.4%
[전주]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

바오로 사도는 선교활동을 하면서도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직접 활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고(사도 18,3),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2코린 11,9).” “나는 앞으로도 지금 하고 있는 대로 하겠습니다.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일한다고 자랑할 기회를 노리는 자들에게 그 기회를 없애 버리려는 것입니다(2코린 11,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2-13).”

바오로 사도가 교회나 신자들이 주는 활동비와 생활비를 안 받은 것은, 무슨 결벽증 같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였습니다(1코린 9,18). 또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거짓 사도들을 물리치려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일한다고 자랑할 기회를 노리는 자들에게그 기회를 없애 버리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그 이유를 나타냅니다. 거짓 사도들은, 사도로 위장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입니다(2코린 11,13).(그들은 거짓 복음을 전하면서 신자들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진짜 사도들은 돈을 목적으로 일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아무 대가를 받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한다.”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돈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돈만 밝히는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알게 되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은“주님만을 믿고, 주님에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주님에게만 의지하면 늘 풍족하지만, 돈에 의지하면 돈 때문에 늘 쪼들립니다. 가지고 있는 돈이 많더라도 쪼들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힘은 마르지 않는 샘에서 솟는 생명수와 같은데(요한 4,14), 세속의 돈은 아무리 마셔도 목이 마르는 ‘생명 없는 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

이 말씀은,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입니다. 사도들은 떠날 때에도 물질적으로 ‘빈 손’이어야 하고, 돌아올 때에도 역시 물질적으로 ‘빈 손’이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일은 돈벌이를 하러 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생활은 돈벌이를 하기 위한 생활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1티모 6,7-8).”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10).”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아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쓸데없는 안부인사 같은 것을 하면서 시간낭비하지 말라는 뜻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속세의 인연에 연연하지 말라는 지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빈 손’으로 떠나라는 예수님의 지시는 사실상 ‘빈 마음’으로 떠나라는 지시입니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빈 마음’이 되어야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데,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빈 마음’이 되어야, 또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7-8).”

--------------------------------------

선교활동을 하다보면,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환영받기도 합니다. 말도 못 붙이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기쁘게 맞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라는 말씀은, “기쁘게 맞아들여서 대접을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주는 대로 먹어라.”라는 뜻입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은,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먹이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맞아들여서 대접하는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와 같습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라는 말씀은,“더 좋은 대접을 받을 목적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알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대접이 소홀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라는 말씀도 “주는 대로 먹어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들도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니라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정생활도 신경 써야 합니다. 가장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동을 하고, 저축을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더’ 부유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재물을 모으고 쌓아두는 것만 생각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단계까지 가게 됩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돈을 따라다니는 것이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 2019년 7월 7일
  | 07.09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539   [원주]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 : 항상 ‘의식’하며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1] 2373
538   [춘천] 사랑 나누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1] 123
537   (녹) 연중 제19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2] 1236
536   [수도회] 자녀들에게 물려 줄 재산은 하느님께 향하는 삶  [3] 2418
535   [대구]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4] 2466
534   [서울] 참으로 부자 되는 길  [6] 2708
533   [수원] “불나방”  [4] 2638
532   [마산] 내 재산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2] 2510
531   [인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 부유한 되었으면 합니다.  [3] 2383
530   [안동] 이 시대의 괴물 '탐욕'  [4] 2435
529   [부산] 베품은 하느님의 일  [7] 2407
528   [광주] 예? 보이는 것만 믿으라굽쇼?  2471
527   [전주] ‘탐욕의 곳간’과 ‘사랑의 곳간’  [2] 124
526   [제주] 쉬지 않는 젓가락  94
525   [원주] 재산의 소유와 분배  2319
524   [춘천] 허무로다, 허무!  [1] 87
523   [군종] 참된 부자가 되려면  [2] 2558
522   [의정부] 확실하고 유일한 보증  94
521   [청주] 모으는 데보다 잘 쓰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94
520   [대전] 이제부터는 하늘에 저축하라.  [2] 2478
519   (녹) 연중 제18주일 독서와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  [3] 1790
518   [수도회] 간절한 기도  [6] 2002
517   [청주] 기도하며 하느님과 싸우고 그분을 만납니다.  [3] 602
516   [서울]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  [7] 2305
515   [군종]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1] 466
514   [마산]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루가 11, 1)."  [5] 2079
513   [대전] 구하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  [3] 2137
512   [안동] 기도하는 사람  [3] 2043
511   [부산]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5] 2058
510   [대구]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듣는 데 있습니다.  [3] 1947
509   [인천] 기도  [7] 2147
508   [수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인 성령을 청하자  [5] 2131
507   [의정부] 주님을 끌어안기  [3] 398
506   [광주] 아름다운 중재자의 삶  [1] 505
505   [전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1] 171
504   [춘천] 우리를 변화시키는 항구한 기도  [3] 2210
503   [원주]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1] 104
502   (녹) 연중 제17주일 독서와 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3] 872
501   [마산] 활동은 기도의 힘으로  [1] 2137
500   [청주] 말씀은 신앙생활의 지도  [2] 477
[1][2][3][4][5][6] 7 [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