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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고통은 기쁨을 낳는다?
조회수 | 1,904
작성일 | 07.07.06
이사 66,10-14ㄷ
갈라 6,14-18

오늘 독서에서는 기쁨이라는 것이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귀양살이 후에 예루살렘의 중흥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되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구원의 사명을 위해 파견하시지만 우선 기쁨보다는 고통을 예고하신다. 마치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어린양’(3절)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전교사명을 마쳤을 때 기쁨의 환호성이 나오고, 예수께서는 흥분한 제자들을 진정시키신다.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아마 그 기쁨은 복음이 전하는 사람에게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발과 낙담과 위기 그리고 회피와 실망의 감정이 일게 된다.

복음: 루카 10,1-12.17-20: 일흔 두 제자의 파견

“그 때에 주께서 달리 일흔 두 제자를 뽑아 미리 앞서 보내셨다”(1절).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12제자를 파견하셨다고 모든 복음에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12 제자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협력자들과 소식전달자들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신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복음 선포활동을 도와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72라는 숫자는 전승에 의하면 세계에 흩어진 이방인들의 나라 숫자가 그만큼 된다고 한다(창세 10장 참조). 바로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2절). 추수는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요엘 4,13 참조). 이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종말론적’ 사업에 당신의 제자들을 결합시키시는 모습이다. 즉 주님뿐 아니라 제자들도 ‘종말’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스승과 같은 사명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도’가 필요하다. ‘추수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그 복음선포자들을 세워주실 수 있고 필요한 힘으로 무장시켜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전교”라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3절). 그를 파견하신 분이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그것을 거절하라고 하신다.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4절). 그런데 복음선포의 여정을 걸으며 살아가는데 인간적 도구의 부족함은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그 복음선포자들은 이미 가난을 근본적으로 선택하였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기 때문에, 이리떼 가운데서 지켜주실 수 있는 그분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누구를 통해서 매일의 양식도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7절).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자신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사도직)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고린 4,7-10).

이러한 삶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샬롬: shalom)를 전해줄 수 있다. 이 평화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능력과 힘의 표지이며, 인류에게 주는 생명과 쇄신의 표지이다. 그래서 루가는 평화를 ‘선교’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전해야하기에 평화의 건설자이다. 항상 평화를 기원해주며 순교자적 삶으로 그 평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돌아와 그간의 활동을 스승님께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이 주님께 보고하는 것은 전교활동의 성공에 대한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악령들까지도 쫓아내시며 보여주신 ‘능력’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하늘의 영광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일흔 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하고 아뢰었다. 예수께서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도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17-20절).

성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만해질 수 있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사탄을 하늘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참조: 이사 14,12; 묵시 12,8).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은 오직 ‘공동 이익’(1고린 12,7)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 기쁨은 하느님께 다시 영광을 돌리며 느끼는 더 큰 기쁨이기 때문에 이 ‘기쁨’ 역시 ‘전교’의 영역에 드는 것이다.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선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일치하고 있는 우리 모든 신앙인은 전교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세례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 모두는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으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를 언제나 견지할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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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세상 속으로 파견하십니다. 파견하시면서,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당신의 심정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이런 긴장감이 감도는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그저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것은, 부족한 것이 많을수록 세상의 것에 의존하기보다 주님께 더욱 의지하고 매달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주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 이외의 다른 것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자의 기쁜 소식은 자신이 아닌 주님에게서 비롯되기에, 믿음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주님 뜻을 펼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믿지 못할 때, 거기에는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이 자리 잡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삶, 그것이 바로 ‘이리’로 상징되는 세상입니다. ‘양과 이리’를 ‘주님과 세상’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양이 사랑과 가난과 겸손을 상징한다면, 이리는 이기심과 소유욕과 교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의 평화를 선포해야 합니다. 주님의 평화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갖고 삶에 닥치는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 버리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복음 선포는 추상적이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에 따르면, 복음 선포는 평화를 기도해주는 말씀으로 시작해, 함께 머무는 것, 함께 먹는 것, 돌보아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바로 삶의 방향을 바꾸고 변화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삶의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은 우리 곁에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평화와 영적인 복을 베푸시고 열매를 맺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참된 복음 선포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가장 중요한 자리에 하느님을 두고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께서는 더 큰 선물, 즉 ‘복음’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나오는 복음은 다른 이를 살리는 진정한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제대로 전하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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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승환 루카 신부 : 2019년 7월 7일
  |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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