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26.8%
[수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인 성령을 청하자
조회수 | 2,139
작성일 | 07.07.27
사람은 많은 것들을 원하고 바라며 살아갑니다. 물질적인 것들(악기, 전자제품, 자동차 등), 질병의 치유, 부자 되는 것, 취업이나 결혼, 다른 이들로부터의 인정이나 사랑, 내면의 평화나 기쁨, 행복 등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금세 얻을 수 있는 것, 내 능력이나 주위의 도움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노력해서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더 많습니다.  더구나 그 바람이 현실적으로 쉽게 얻기 어려운 것일수록 많은 경우 기도를 통해 기원합니다. 심지어는 무신론자들도 위기에 처하거나 바라는 것이 있으면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등에게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절대자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끊임없이 간청하고 문을 두드려 청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친구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줄곧 하느님께 졸라대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가족의 비유를 통해서, “악한 인간도 자녀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은 것을 주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청하지 않고 조금 청하다가 맙니다.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하더니 안 들어주시네, 기도하다가 지쳤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포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주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끊임없이 주님께 청하는 이는 결국 그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불필요하거나 해로운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마치 부모님이 자녀에게 해로운 것들을 주지 않듯이 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건강, 재산, 가정의 화목, 넓은 대인관계, 취업 등 이런 것들 모두가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간청보다도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 것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가장 좋은 것, 그것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로마 8,15). 이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

수원교구 백경태(요한보스코) 신부
451 26.8%
참다운 기도

옛날 天主敎 敎理問答에 ‘하느님의 恩寵을 얻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있습니다. 그 답은 ‘기도’와 ‘성사’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기도를 제시합니다. 신앙인으로서 기도의 필요성을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도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 니다. 사실 주일 의무야 일주일에 한 번 지키면 되지만 어디 기도는 그러합니까? 기도는 매일 같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더욱 어렵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에 있어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의식주라 이야기한다면, 신앙인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아마도 기도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서로를 알기 위해서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현대인들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 무엇보다도 이 시대에 요구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윤리, 도덕, 정치, 사회 모든 분야에 있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오늘의 현실을 올바로 직시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기도 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주장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그분의 뜻대로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세상에 모든 이가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사랑과 평화, 정의가 꽃피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에 등장하는 친구처럼 항구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많은 현대인들은 급합니다. 무언가 생각하고 오래 기다리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바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금방 실망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진득하게 기다리며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하나의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몸에 피가 흐르지 않으면 人間은 죽습니다. 우리 신앙인도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외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고요히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옛날에 비해 가족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자녀들의 학업도 중요하 지만 온 가족이 매일 단 10분 만이라도 함께 모여 기도한다면 그 가정은 성가정이 되리라 믿습니다. 오늘부터 온 가족이 모여 기도하는 습관을 들입시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루가11, 10)

수원교구 서북원(베드로) 신부
  | 07.27
451 26.8%
기도의 본질적인 의미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은 기도의 본질적 의미에 관한 것이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여야 한다는 것을 지난주일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들었다. 주님을 올바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기도도 잘 할 수 있음을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제1독서: 창세 18,20: 아브라함의 기도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에서 구하기 위해 하느님 야훼와 벌이는 공방전을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탄원은 부패할 대로 부패한 도시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악을 편들어 변호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소수에 지나지 않더라도(50명에서 10명) 그 도시에 있을 수 있는 ‘죄 없는 사람들’의 선으로 그 악을 상쇄하여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요소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32절)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더 이상 말씀드리지 못한다. 그런데 예레미야 예언서에 보면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 한 사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예레 5,1). 예제키엘 예언서에도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죄 없는 사람 단 한명을 요구하고 있다(에제 22,30). 만일에 아브라함이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제시하였다고 해도 하느님은 허락하셨을 것이지만, 아브라함은 한 사람도 죄 없는 사람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죄 없는 사람’의 역할은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1독서는 기도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첫째, 기도의 힘은 우리 인간의 관심과 한계를 훨씬 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그 힘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하느님께 대해 거리낌 없이 표현되는 듯한 기도의 대담성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들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 신앙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된 기도자는 진정 하느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 루카 11,1-13: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에서 루가는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몇 가지 가르침을 한데 모아놓고 있다. 루가복음은 기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도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자주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을 보고 어떤 제자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1절). 이렇게 하여 ‘주님의 기도’의 파도를 일으켰다.

이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부성’의 표지 아래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4절)라는 표현에서 아버지는 “아빠”라고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자녀로서의 태도뿐 아니라, 더 나아가 어린 아이와 같은 태도 즉 완전히 신뢰하고 의탁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갖출 것을 가르쳐주신다. 비록 아버지의 모습이 권위주의와 엄격함으로 변모되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아기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어린이다운 태도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태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해설해주시고 계시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13절)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고자’(마태 18,3)하는 의지를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가 참된 기도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에 먼저 성부께 바쳐드려야 할 두 가지 내용에 관해 가르쳐주고 계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가 임하심, 그리고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 즉 매일의 양식, 죄에 대한 용서, 유혹에서의 해방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여러 가지 차원을 하나로 묶으신다. 영적이면서 육적인 인간이 충만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기도가 인간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시도록 그분의 손에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기도는 자기 소외와 같은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반대이다. 기도를 통해 인간은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 베풀어주시는 항상 새로운 은총과 힘으로써 자신의 생활 속에서 매일 실현해야할 하느님의 계획을 발견해야 한다.

비록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실현시키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온갖 노력을 하여야 한다. 이것은 일용할 양식을 청하고 죄의 용서를 청하는 데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이며, 유혹으로부터의 자유도 우리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생활을 자유로운 마음과 자녀다운 신뢰심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도록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변모시켜줄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아 이루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도 그러한 기도의 삶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삶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삶을 주님께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7.27
451 26.8%
[수원] 주님의 기도가 주는 메시지!!!

교회는 오늘 전례력으로 연중 제17주일을 맞이하면서 전례주년의 마지막 시기인 연중 시기의 딱 절반에 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신앙을 뒤돌아보고 성찰하면서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 안에 우리의 참다운 신앙의 마음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복음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제자들은 큰 은총과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가운데 한명이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루카 11,1 참조). 사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 중 많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은 훌륭한 스승에게서 기도의 삶을 배우고 싶어했으며,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이 삶의 축복이자 가문의 영광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안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역시 요한으로부터 기도의 삶을 배웠고, 그것을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마도 그 상황이 내심 부러움으로 남아있었던 듯 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면서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라고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청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기도하는 내용의 중요함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마음가짐의 중요함까지도 가르쳐 주십니다(루카 11,9-10 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2559항,2613항 참조). 그 기도의 자세는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이 조금은 억지스럽게(?) 주님께 청하는 것에서 느낄 수 있는 ‘열정과 간절함’입니다(창세 18,24-32 참조).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함과 열정적인 청함의 응답으로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1,13 참조). 성령의 은총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도의 가장 큰 응답임을 상기시켜 주시면서, 바로 그 성령의 은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콜로 2,13 참조).

이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632항 참조). 그리고 기도의 시간은 바로 주님과 함께 나누는 친교의 시간이며, 은총의 시간이고 또한 사랑의 시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바로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수원교구 이재현 신부>
  | 07.27
451 26.8%
[수원] ‘百聞이不如一行 (백문이 불여일행)’

오늘 복음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올바른 기도의 ‘실행’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실 기도의 의미와 중요성, 종류와 방법을 설명해 놓은 서적과 정보들은 우리주변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百聞이 不如一行(백문이 불여일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에 관해 수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스스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던 당시에도 기도는 생소한 영성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유다인들 사이에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생활의 일부였습니다(마태 6,1-18 참조). 그런데 위선자들이 바치는 기도의 행태에서는 가식적이고 빈말을 되풀이하거나 말을 많이 해야 하는 등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기도가 두드러져 보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의 기도는 주로 이른 새벽이나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시간대에,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한적한 곳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친교를 이루는 영적인 대화의 성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이러한 모습을 자주 눈여겨 보다가 오늘 용기를 내어 스승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行)에 관해 묻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사실 하느님께 기도한다고는 하지만, 어느새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은 뒷전이고 청원의 내용이 앞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내 청원을 듣고 신속히 가부를 결정해주는 해결사가 아니라 정감적인 ‘아버지’라는 점을 예수님께서는 먼저 상기시켜 주십니다(루카 11,2. 11-13 참조). 아버지와 자녀의 신뢰관계 속에서 청원과 청취가 오가고 자녀에게 더 유익한 것을 주고자 고심하는 부모의 마음도 이 기도 안에서 작용합니다(루카 11,11-13 참조).

그런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기도의 과정에는 자녀인 우리가 청하고, 찾고,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항구함이 뒷받침되어야 더 나은 기도의 결실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손님 대접을 위해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 양식을 청하는 이의 비유(루카11,5-8 참조)를 들어 이를 설명해 주십니다. 평소의 ‘우정’만으로 자신이 청하는 것을 얻을수는 없습니다. 원룸 형태의 집안에서 온 식구들이 깊은 잠을 자는 시각에 평소의 친분만으로 친구는 그에게 양식을 내어줄 리 만무합니다. 가족의 수면을 방해하면서까지 부산스럽게 일어나 양식이 보관된 곳을 뒤적여야 하고, 이미 닫아둔 문을 번거롭게 다시 열어 언짢은 마음으로 양식을 건네야 하는 여러 불편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청하는 이는 거절을 이미 예상하고, 또 결례를 무릅쓰고 친구에게 끊임없이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는 ‘청하여라-찾아라-문을 두드려라’(루카 11,9-10 참조)를 충실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몇 마디의 핀잔으로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끈질긴 간청에 친구는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며 마침내 그에게 필요한 것을 건네줍니다. 달랑 빵 세 개만 주었겠습니까? 이 밤중에 다시 찾아와 더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배 이상의 빵과 포도주, 손님 대접에 필요한 그 외의 양식도 함께 챙겨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를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까? 하루 동안 나에게 일어났던 여러 소소한 사건과 감정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고 그분의 의중을 헤아리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은 아랑곳없이 일방적으로 하소연만 하거나 한 두 번의 시도로 쉽게 그치고 마는 단발성의 기도입니까? 청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리는 이 놀라운 기도의 결실에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무한한 신뢰가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박현창 베드로 신부 : 2016년 7월 24일
  | 07.22
451 26.8%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며 청했던 일이 허망하게 끝나버리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매우 건강하던 사람이 아프고, 시험에 합격해야 할 사람이 탈락하고, 최선을 다해 추진하던 계획들이 물거품이 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죽는 경우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때로는 신앙을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기도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야 합니다. 마치 자동판매기에서 물건을 사듯이, 특정한 기도를 정해진 양과 순서로 바치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매우‘인간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진정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가르치십니다.

1) ‘주님의 기도’는 전형적인 청원기도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임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청원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없이 존재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냅니다.

2) ‘주님의 기도’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자신의 뜻을 거기에 맞추는 것이 기도의 근본정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해로운 ‘뱀’이나 ‘전갈’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떠한 실패와 시련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며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

신자가 화초라면, 기도는 물이나 공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화초라도 물과 공기가 없으면 시드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는 신자 생활이란 불가능합니다. 기도는 모든 신앙 생활의 중심입니다. 기도하기를 그치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를 끊는 것이고, 신자로서의 생활을 원치 않는 증거이며, 은총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자녀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앵무새처럼 다 외운다고, 수백 번 기도한다고 하여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대로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

수원교구 이승환 신부 : 2019년 7월 28일
  | 07.27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543   [청주] “사랑의 불을 제게 놓으셔서”  [1] 108
542   [의정부] 평화가 아닌 불, 그리고 분열  [3] 139
541   (녹) 연중 제20주일 독서와 복음 [불을 지르러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4] 1926
540   [청주]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1요한 4,19).  89
539   [수도회] 믿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  [3] 2160
538   [인천] 하느님의 방식으로 ‘깨어 있는’ 것  [4] 792
537   [의정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2] 620
536   [마산] 옳게 깨어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다  [4] 2576
535   [수원] 깨어서 구원을 기다림  [3] 2355
534   [서울] 깨어 있기  [6] 2315
533   [대구] 자기 관리. 자기 성찰  [3] 642
532   [군종] 행복을 향한 기다림의 자세  [1] 1938
531   [안동] 남 몰래 드리는 희생제물  [4] 2154
530   [대전] 우리의 네 번째 친구는?  [2] 725
529   [부산]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고 있어라”  [5] 2683
528   [광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들  [1] 2336
527   [전주] 충실하게 깨어 기다림  124
526   [원주] 주인을 기다리는 종들 : 항상 ‘의식’하며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1] 2381
525   [춘천] 사랑 나누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1] 129
524   (녹) 연중 제19주일 독서와 복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2] 1237
523   [수도회] 자녀들에게 물려 줄 재산은 하느님께 향하는 삶  [3] 2418
522   [대구]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4] 2468
521   [서울] 참으로 부자 되는 길  [6] 2710
520   [수원] “불나방”  [4] 2640
519   [마산] 내 재산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2] 2514
518   [인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앞에 부유한 되었으면 합니다.  [3] 2385
517   [안동] 이 시대의 괴물 '탐욕'  [4] 2437
516   [부산] 베품은 하느님의 일  [7] 2413
515   [광주] 예? 보이는 것만 믿으라굽쇼?  2478
514   [전주] ‘탐욕의 곳간’과 ‘사랑의 곳간’  [2] 128
513   [제주] 쉬지 않는 젓가락  97
512   [원주] 재산의 소유와 분배  2329
511   [춘천] 허무로다, 허무!  [1] 94
510   [군종] 참된 부자가 되려면  [2] 2564
509   [의정부] 확실하고 유일한 보증  94
508   [청주] 모으는 데보다 잘 쓰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98
507   [대전] 이제부터는 하늘에 저축하라.  [2] 2480
506   (녹) 연중 제18주일 독서와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  [3] 1790
505   [수도회] 간절한 기도  [6] 2004
504   [청주] 기도하며 하느님과 싸우고 그분을 만납니다.  [3] 608
[1][2][3][4][5][6] 7 [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9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