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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기도
조회수 | 2,159
작성일 | 07.07.27
"신부님, 기도가 잘 안됩니다. 마음은 있어도 잘 안됩니다. 성당에 나오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나와도 마음이 허전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제 기도를 안들어 주시는것 같아요.”

신자들에게 가끔 듣는 말입니다. 기도를 하긴 하는데 기도의 열매를 보지 못해 실망하고 의기 소침하여 신앙생활의 열정까지 잊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간 소임지의 본당에서 예비자로 만났다가 지금은 모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자매님이 계십니다. 일년정도 예비자교리를 받으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웬만한 책은 다 읽을 정도로 열심이셨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는 매 주일 저의 강론을 직장에서 쉬는 시간마다 동료들에게 쉬지 않고 전했다고 합니다. 세례 받고나서 지금까지 성서공부를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명 축일 때 꼭 인사를 하러 오셔서는 그 동안의 신앙체험 이야기를 하실때면 같이오신 다른 자매님들 역시 깊은 감동을 받으며 듣습니다. 긴시간 동안의 체험 이야기가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그 자매님과 함께 하고 계심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세례 이후 10년이 넘게 지금까지 9일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고 있으며 남편의 사업이 잘되든 안되든 항상 감사하며 자신을 잠시도 쉬지 않고 하느님을 전하는 수다쟁이로 스스로를 소개 할 수 있는 자매님을 보면서, 믿음의 참 모습과, 기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하느님의 요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즉 기도함에 있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신뢰심과 지칠줄 모르고 기도하는 자세임을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하신 비유처럼 귀찮아서라도 빵을 내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한 인간적인 걱정거리를 해결해 주십사고 매달리기만 하는 기도의 자세가 아니라 그 걱정거리까지도 하느님께 봉헌하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는 자세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란 엄격한 의미에서 내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순간이라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를 묻는 순간이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기도 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전부임을 고백하며 예수그리스도 그 분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수없음을 고백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더욱 강해지고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로 약해지시며 실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로 약해지기를 원하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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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인환(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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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사랑의 기도

‘12월 어느 월요일,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니 한분이 성모 동산에 앉아 묵주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데레사 할머니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때 할머니는 90세가 넘으셔서 움직이실 때는 늘 지팡이 삼아 유모차를 끌고 다니셨습니다. 기억력도 가물 가물 하셔서 신자분들이 꽁꽁 얼어붙은 할머니의 손을 녹여 드릴 양 양 손에 끼워주신 장갑도 어디에다 두셨는지 늘 잃어버리고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절대 잊지 않으시는 것이 있었으니, 하루도 빠짐없이 성당에 오셔서 제대 앞에서 예수님께 큰 절을 올리시고, 묵주기도를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기도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스승님께 부탁드리는 제자들을 보면서, 기도하기를 힘들어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성체 앞에 오랫동안 머물지는 못하더라도, 온 영혼의 진액을 쏟아 부으며 간구하고 싶고, 단 한 두 마디 기도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즐겨 받으시길 원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다음의 비유를 통해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하는지를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 주십니다.

빵을 구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사람은 마치 야뽁 건널목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는 야곱의 모습(창세 32,25-27) 같습니다. 기도의 답을 얻기 위해 끈기와 우직함으로 천사와 씨름을 하는 야곱은 결국 답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께서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날이 갈수록 우리 생활의 한 구석으로 밀려나버린 기도 시간, 이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한 구석으로 밀쳐진 예수님 자신일 것입니다. 내 자신이 기도하기에 너무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고 생각되면, 내 자신 보다 더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늘 기도 안에서 공생활을 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환경의 위협과 육체의 고단함을 딛고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그분의 간구는 병사들에게 체포되는 순간에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마지막 순간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실로 이 사실은 기도에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히브 2,18)”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배운 바도 없고, 연세도 많이 드신 데레사 할머니! 할머니는 오늘 제자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항구히 기도할 것을 당부하시며 기도의 모범으로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예수님을 사랑하셨기에, 많은 수식어를 동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매일같이 예수님과 함께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몇 분짜리 사랑인지 점검해 봅니다.

인천교구 신대근 마르코 신부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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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제 동창 신부와 아침운동을 함께 했습니다. 물론 운동의 종목은 자전거이지요. 동창 신부가 우리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좋은 자전거 코스가 있으니 함께 타자고 했거든요. 그래서 아침 일찍 만나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에 이곳에 별 특별한 코스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항상 차로 지나가는 길옆에 위치한 곳이었고, 제대로 조성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의구심들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서 금방 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전거 도로를 비롯해서 주변의 경관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입니다. 뭐 특별한 것이 있을까 했던 곳이었는데,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강화에 있을 때에는 매일 자전거를 탔습니다. 그러나 이곳 간석4동 성당에 와서는 도시 한 가운데에 있어서 자전거 탈 곳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고, 그래서 자전거 타는 것을 소홀히 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당에서 불과 4~5Km 정도 떨어진 곳에 이렇게 좋은 자전거 코스가 있었네요. 그것도 모르면서 자전거 탈 곳이 없다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었으니…….

문득 주님께 대한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려는데,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 곁에 있지 않다면서 불평과 불만을 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우리 스스로 주님을 점점 멀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옆에 있음을 우리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힘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바로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기도를 우리들은 너무나도 소홀히 합니다. 마치 따분한 하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해야 하는 행사로만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나요?

앞서 별 특별한 것이 있을까 했던 곳이었지만, 직접 들어가 보니 너무나도 멋진 곳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 역시 밖에서 볼 때에는 뭐 특별한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직접 간절한 기도를 바치다보면, 이 안에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의 힘은 이렇게 대단합니다. 이렇게 대단한 기도를 저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오늘 하루 기도하면서 보내시길 바랍니다.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주무시기 직전 성호경이라도 그어보세요.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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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항구한 마음, 꾸준한 기도

오늘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나오는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 간 사람이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남과는 상관없이 줄기차게 졸라대는 태도가 참 특별해 보입니다. 이 줄기차게 졸라대는 태도는 자칫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막무가내의 태도를 연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남이야 잠을 자든 말든 내가 남의 가족의 휴식을 방해하고 가정생활을 파괴하건 말건 내 필요한 것만 우선 찾고 보자는 이기적인 태도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줄곧 졸라댄다는 것은 항구한 마음이 강조된 표현이라고 봅니다. 항구한 마음, 꾸준한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생활을 하는데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 항구한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 생활을 시작했더라도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포기하는 것은 바로 이 항구한 마음, 꾸준한 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두 번의 기도로 응답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곧바로 실망하고 또,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가보다, 곧바로 낙담에 빠집니다. 나는 기도할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내 기도를 들어주실 턱이 없지… 혹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으신 걸 보니 하느님께서는 계시지 않는가 보다… 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많은 경우에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경우에도 잘해야 묵주의 기도 몇 번 바쳤거나 한 두 번의 미사와 짧은 몇 시간의 성체조배로 마는 경우들입니다. 웬만큼 기도를 했더라도 겨우 9일 기도 한두 번 정도인 것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는 것은 꾸준함입니다. 모든 신앙생활도 단체생활도 그렇고 실은 인간사 모두가 꾸준함이 없으면 그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 약속을 해 놓고서도 그저 한두 번하고 나면 쉽게 지쳐 포기하고 단체 생활을 해도 이러저런 이유로 상처니 실망이니 하면서 금방 싫증을 내고 그만 탈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결실이 없는 것입니다.

꾸준하지 못한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그 기도에 있어 열렬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미지근하거나 소홀히 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문이 부서져 나갈 정도로 두드려야 문이 열리는 것이고 기도를 해도 제단이 뽑혀 나갈 만큼 세게 해야 그 기도가 하늘에 닿는 것입니다. 밤을 새워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꾸준히 항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 청해 얻어야 할 일들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기도하십시오. 문이 부서지라고 두드리십시오. 제단이 뽑혀나가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인천교구 현명수 신부>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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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충청도 금산에 위치하고 있는 ‘장애우 평등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사실 처음 방문할 때에는 많은 의문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그마한 장애도 아닌 1급 장애인들만 모여서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두가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고, 말하는 것이 편하지 않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곳에서 살고 계신 분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 불편함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편하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이 아닌,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주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면 기분이 좋을까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나의 이웃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시고 기뻐하실까요? 따라서 언제나 자신을 낮추면서 상대방, 특히 주님의 입장에서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실까요? 특히 우리들의 큰 잘못은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쉽게 포기하여 주님 곁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장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청하기만 한다면 끝까지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가시는 주님을 향해 계속된 청을 드려서 결국에는 의인 열 명만으로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자신의 짧은 생각과 이해로 쉽게 포기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큰 사랑을 굳게 믿고 끊임없이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을 주신다고 하시지요. 즉, 우리가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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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별명이 신앙인?

요즘 저에게 동기 신부가 재미있는 애칭을 붙여 주었습니다. 바로 ‘별명이 형’입니다. 동기들 중에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아서 ‘형’은 ‘형’인데 동기들에게 구박당하고 놀림당하며 ‘형’대접을 못 받는다고 농담 삼아 붙여준 애칭이지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형’으로서 형답게 동기들과 지내고 있는가? 물론 나이가 많다고 권위적이거나 강압적인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자리를 지킬 줄 알고, 묵묵히 들어줄 수 있고, 때로는 같이 해보자, 힘내자는 응원과 위로의 말도 전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을. 그런데 돌아보니 그런 모습이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도 ‘별명이 신부님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나’라는 생각도 곁들여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또 ‘청하여라, 찾으라, 두드려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우리의 기도 안에는 얼마나 많은 청함이 있었고, 얼마나 애타게 찾았으며, 얼마나 많이 두드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인답게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하였는지, 우물에서 숭늉 찾는 식으로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지는 않았는지, 두드리고 있던 곳이 주님께서 계신 곳이 아니라 내 욕심이 있는 곳을 계속 두드리고 있지는 않았는지, 한번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정말 완벽한 기도입니다. 그 완벽한 기도에 담긴 참된 의미를 마음에 새기며 기도한 적은 얼마나 되시는지요. 무엇을 청하고, 어디에서 찾으며, 어디를 두드려야 하는지를 인도해 주시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내가 청하는 것이 일치될 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속에서 찾지 않고 주님 앞에서 찾게 되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신 곳을 두드리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참된 신앙인이라면, ‘별명이 신앙인’이 아니라면 올바른 것을 청하고, 올바른 곳에서 찾고, 올바른 곳에서 두드릴 것입니다.
‘별명이 형’. 저는 이 애칭이 마음에 듭니다. ‘별명이 신부’, ‘별명이 신앙인’이 되지 않기 위한 한가지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 우리들에게 불리는 신앙인이라는 호칭이 혹시 ‘별명이 신앙인’은 아니신지요. 저와 여러분 모두 성숙한 신앙인, 참된 신앙인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합니다.

▮ 인천교구 양성일 시메온 신부 : 2016년 7월 24일
  |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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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되는 기도의 특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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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묵주기도를 하면서 운동을 겸해 많이 걷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강화의 ‘나들길’이 정말로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강화에 오래 살아왔기에 웬만한 곳은 다 가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나들길’에 가봐야 특별한 것이 뭐 있을까 싶었습니다.

어느 날, 평소처럼 걷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우연히 ‘나들길’ 코스를 걷게 되었습니다. 주변 경관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솔직히 전에는 차들이 많은 이 강화에 걸을 곳이 별로 없다면서 투덜거렸는데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곳이 뭐 있을까 싶었지만 특별했습니다.

문득 주님께 대한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려는 데,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면서 불평과 불만을 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점점 멀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옆에 있음을 우리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힘을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바로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본인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만 찾을 수 있어도 그곳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시지요. 아브라함의 간절한 청이 담긴 기도가 희망의 말씀이 되었고, 소돔과 고모라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기도를 너무나도 소홀히 했던 것이 아닐까요? 마치 따분한 하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해야 하는 특별한 행사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앞서 특별한 것이 있을까 했던 곳이었지만, 직접 가보니 너무나도 멋진 곳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 역시 밖에서 볼 때에는 뭐 특별한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새롭고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안에서만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는(콜로2,13.14 참조) 주님을 만날 수가 있고,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전라도 지역으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막걸리 골목’이 아주 유명하더군요. 전라도 인심이 느껴지는 많은 안주에 막걸리 한 잔은 필수인 것처럼 나와 있었습니다. 숙소에서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 곳이라 택시를 탔습니다. 그리고 막걸리 골목에 가자고 했지요. 운전기사님께서는 그곳에 왜 가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곳이 유명하고 또 들려야만 하는 필수 코스라고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어서 가보려고 한다고 했지요.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여기 사람은 그곳에 안 갑니다. 왜 그런데를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모르지요. 이처럼 주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기도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 중요하기에 주님께서는 직접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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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9년 7월 28일
  |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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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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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데가 저런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중략)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김승희 시 ‘객석에 앉은 여자’)

자포자기(自暴自棄).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포기한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됐다. 스스로 단념한다는 일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한자를 들여다보면 그 뜻이 더 무겁다. 스스로를 포악하게 해 자신의 삶을 내팽개친다는 말이다. 단순히 단념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폭행을 가해 못쓰게 만들어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이 사라진 인생, 내팽개쳐진 삶에 대해 그가 혹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핑계를 대는 것뿐이다. 늘 자신의 삶을 핑계에 가둬 버리는 삶은 그래서 꿈과 사랑 모두를 지연시켜 결국 나의 삶을 미래로 유보시킨다. 그녀는 시인의 말처럼 ‘아프다는 핑계’로 없었던 병, 더 깊은 병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렬히 무언가를 희망해 보지 않는,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의 병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은 익숙해져 버린 삶의 문법에 갇혀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수동적으로 그저 살아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하시가이 고지라는 심리학자는 우리의 삶은 무의식이 정하고 이 무의식은 우리의 평상시 언어가 결정한다고 말한다. 부정적인 언어, 수동적인 태도에 지배됐던 삶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희망적이며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 시작된다.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 돌아서는 시작이다. 할 수 없다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 말고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소망하고 청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들을 때면 두 가지 생각을 연이어 하게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과연 온전히 개방된 질문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지닌 인간적 소망을 떠올리고 그것이 이뤄지기를 희망하고 하느님께 청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소망들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게 돼 있다. 내가 청한 나의 승진이, 가족의 건강이, 더 많은 재물이 혹시 사사로운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그것이 하느님께서 달가워하시는 것인지 되묻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청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 알아차림은 지속적인 소망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결과다. 어쩌면 정성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청한다는 것은 소망의 정화과정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의 끝자락에 우리는 소망의 근거나 배경이 되는 매우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참다운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라’는 말씀은 단순하게 내가 욕구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나열하거나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라는 말에 제한되지 않고 내 소망의 근원인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릴 때까지 멈추지 말라는 말과도 같다. 내가 소망했는데 결국은 하느님의 소망을 묻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현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노력은 나의 노력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를 소망케 한다. 삶을 미래에 유보시키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꿈과 사랑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소망하게 하는 힘이다. 이 힘은 나의 소망과 두드림이라는 응답을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화된 삶이 된다. 성령의 뜻이 나의 뜻이 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고 반문하신 것도 이런 이유다. 우리의 소망이 결국 하느님의 소망과 같아지는 것, 그것이 기도다. 회피된 인생, 무기력한 삶 앞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리는 언어는 결국 기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하고 청하라는 명령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신다. 기도는 하고 싶은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기도하는 법을 물었던 제자들은 이미 ‘청하고 찾고 두드린’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이며, 반대로 필요 이상의 현세적 욕망은 거부돼야 한다.(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그리고 우리들의 궁극적인 소망, 즉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사실이다.(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것을 믿고 실천하는 것을 방해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마지막으로 청하는 것이 주님의 기도다. 이 유혹이란 희망을 저버리게 만드는 부정적 언어와 핑계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메마르고, 우리가 꿈과 희망을 유보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청하고 찾고 두드릴 일이다. 우리에게는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도가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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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서강휘 신부
가톨릭신문 2019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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