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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예수님은 ‘보스(boss)’인가 ‘리더(leader)’인가?”
조회수 | 2,366
작성일 | 07.11.17
누군가 묻습니다. “예수님은 ‘보스(boss)’인가 ‘리더(leader)’인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스(boss)’와 ‘리더(leader)’에는 몇 가지 차이를 보이는데, 간단히 줄이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보스(boss)는 일을 등 뒤에서 하며, 여러 사람에게 겁을 주어 “가라”고 명령합니다. 반면에 리더(leader)는 일을 공개적으로 하고 여러 사람에게 희망을 주며 함께 “가자”고 합니다. 두 번째, 보스(boss)는 남을 믿지 않으며, 복종을 요구하면서 사람들을 몰고 갑니다. 하지만 리더(leader)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남을 믿고 사람들을 이끌어 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 보스(boss)는 “권위”에 의존하며, 항상 “나”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리더(leader)는 선(善)의에 의존하며, 항상 “우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떠하신가 따져 물어봅니다. 우선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셨고 함께 가자 하셨으며, 친히 몸소 십자가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 당신을 따라 나설 수 있도록 감동을 주셨으며, 그 부족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는 확고한 믿음과 사랑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이 얼마나 멋진 리더십입니까! 믿고 맡긴다는 것, 그것은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다는 것입니다. 정말 삶을 온전히 투신해 보고 싶은 리더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저는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아 그분의 멋진 리더십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평신도 여러분들에 보편적 사제직, 왕직, 예언직의 직무를 나누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여러분들은 저희 성직자와 더불어 교회활동의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복음화 시킬 임무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쉽게 풀어 말하면 예수님의 리더십을 가정과 일터, 그 밖의 모든 삶의 터전에서 도드라지게 수행해야 할 책임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책임의 부여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 구원과 연관성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즉 아마추어처럼 예수님의 리더십을 실천하고 나서는 그분 앞에 섰을 때 해명해야 할 것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며 귀찮은 일은 피해가면서 예수님의 리더십을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손들어 솔선하면서도 나를 내세우지 않고, 또한 독점하지 않으면서 모든 이가 기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삶의 모습은 바로 세상이 우리에게 희망하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리더십입니다. 바로 평신도 여러분이 저희 성직자들과 더불어 해 내어야 할 몫입니다.  

김덕원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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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퇴근한 남편이 말합니다.

남편: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아내: “좋은 소식은 뭔데요?”

남편: “3천만 원이 생겼어.”

아내: “우와~~ 정말로 좋은 소식이네요.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요?”

남편: “그게 퇴직금이야.”

또 이러한 상황도 있습니다. 아들이 수학을 50점 맞고 돌아왔어요. 이를 남편에게 보고하는 것입니다.

아내: “여보,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어요.”

남편: “나쁜 소식이라니?”

아내: “철수가 수학 50점 맞았어요.”

남편: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공부를 못하는거야? 그렇다면 좋은 소식은 뭐야?”

아내: “대학 등록금 걱정이 없어졌다는 것이죠. 뭐.”

좋은 소식을 나쁜 소식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고, 또 반대로 나쁜 소식을 좋은 소식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일까요? 당연히 나쁜 소식을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겠지요? 실제로 나쁜 소식이 다가오는 순간에 이렇게 한 번 외쳐보세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

그런데 이렇게 마음먹은 사람은 실제로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을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될 때가 참으로 많다고 합니다. 바로 긍정적인 사고와 주님께서 언제나 나를 지켜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쁜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이야기,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 바로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그것도 아름다운 성전을 바라보면서 감탄하고 있을 때 이렇게 초치는 소리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종말에 대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말을 잘 준비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좋은 묘 자리를 알아보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재산을 모두 교회에 봉헌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직장 모두 때려치우고 성당에 나가서 기도만 열심히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나쁜 소식만을 전해주시지 않습니다. 즉,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으로 바뀐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종말에 대한 그림을 보여 주시면서도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과거에만 연연하고 다가올 미래를 걱정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긍정적인 마음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입니다.

항상 좋은 것만을 주시는 주님을 떠올리면서 생활해 보세요. 정말로 좋은 것만 주십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하세요.

조명연 신부
  |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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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얼마전 ‘교황 프란치스코 어록 303’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중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 몇가지를 소개한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기쁨을 증거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기쁨이란 단순한 재미가 아닙니다. 좀더 깊은 차원의 선물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개의 진영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의에 의해 허망하게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이나 가난한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들만이 조국을 건설하고 지켜낸다고 자만에 찬 그리스도인 압제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거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에도 투쟁과 시련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 사막 같은 절망을 느끼고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정화를 해야 하고 허망한 밤을 수없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만이 사람과 국가의 중대사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항상 호전적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역시 투쟁적이어야 합니다. 안일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 경제적 불의와 정치적 부패 그리고 환경파괴 같은 심각한 재난에 직면해 있습니다. 따라서 정의와 연대하여 정직과 투명성을 확실하게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을 위해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철저하게 바뀌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정의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불의를 피할 길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부터 되돌아 보십시오. 그것이 성찰입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겐 의무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고로, 자애가 가장 고도로 표현되는 것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들은 반드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합니다.”(예수회 학교 방문했을 때 정치 참여에 대한 질문에 답한 내용)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고귀한 사도직의 사명을 일깨우는 날이다. 고귀한 사도직이란 무엇일까? 이 시대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 엄청난 사랑 때문에 가슴 설레고 벅차고 흥분되고 울고 웃고 다 내주어도 여한이 없을 때가 있었다. 아직도 그 열정과 희망이 내 안에 살아 꿈틀대는가? 지금은 어떤가?

<인천교구 김영욱 요셉 신부>
  |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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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초등학생 때였을 것입니다(벌써 30년이 훨씬 넘었네요). 우리 동네에 어마어마하게 높은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높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어지럽지 않을까 라는 말까지 하면서 저와 친구들은 매일 매일 그 앞을 지나가면서 신기하듯이 바라보았지요.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자랑하는 아파트. 이 안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를 상상하곤 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아파트에는 힘 안들이고도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는 승강기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의 우상이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이 아파트의 위용은 지금 어떨까요?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15층 높이의 아파트면 대단했지만, 30층 높이의 아파트가 대부분인 요즘 15층은 별 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평수도 조그맣고 너무 낡아서 그렇게 선호하는 아파트가 아닙니다.

그 대단했던 건물이 30년이 넘은 지금 형편없는 건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지상의 건물들이 다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물론 오래된 건물들이 있기는 하지요. 그리고 시간의 축적과 작품성으로 계속 보존되고 사랑받지만, 지금 시대의 건물과 비교하면 많은 불편함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즉, 작품성은 대단하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그 다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결국 지상의 건물들 모두가 하찮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없어져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거처라고 말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거처와 비교하면 어떨까요? 아무리 잘 지어지고 아름다운 곳이라 해도 하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성전을 가리키면서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며 자랑합니다. 하느님께 최고의 집을 지어 드렸다는 자부심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의 건물을 감히 하늘의 거처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이 대단하다는 건물이 곧 허물어지고 만다는 것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없어질 이 지상의 집 자체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늘나라에 아름다운 나의 집을 잘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느님 나라의 거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금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곧 없어질 것들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할 것들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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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제가 있는 성당은 높지 않은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어 주변이 온통 나무들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항상 무심하게 지나쳤던 주변의 풍경들이지만, 요즘과 같은 때에 낙엽이 진 앙상한 가지를 바라보면 계절의 변화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마치 생명력을 잃고 죽은 듯 보이는 나무이지만 추운 겨울을 견디고 다시 때가 되면 새순이 돋아나 풍성한 나무가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더 푸른 나무의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슬플 때가 있으면 기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거짓 예언자들의 출몰과 전쟁, 기근, 큰 지진, 전염병이 생기고 하늘의 무서운 일들과 표징이 일어날 때가 올 것이며 믿는 이들의 박해도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또,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5-19)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때를 알려주십니다. 첫째는 거짓과 은폐, 헛된 겉치레 등을 중요시하며 진실과 정의에는 눈을 감고 세상에 휩쓸려 살아온 이들의 종말의 때입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때와는 달리 오히려 이때를 복음을 증언할 때라 하시며 두려워하지 말고 믿고 기다리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위기는 곧 기회이며 새로운 시작이고 더 나아가 발전을 위한 발판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이 상반된 두 가지 때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다시금 귀 기울이며 나는 지금 어떤 때를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분명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다 삶을 마치고 죽음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가지고 갈 것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가지고 가야 할 것은 분명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이나 명예 등이 아닌, 하느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한 내 삶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종말, 죽음을 맞이한 후에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준비하고 쌓아야 하는 일들입니다.

때문에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칠 그때를 위해 이 세상에서 인내로써 기다리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느님 앞에 우리가 가져가야 할 체험의 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렇게 충실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 인천교구 배희준 요셉 신부 : 2016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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