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다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9 28.8%
[부산]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분
조회수 | 2,532
작성일 | 07.06.28
루가 : 9, 51-62.

오늘 복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려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불살라 버리겠다는 제자들의 말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청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먼저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말에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복음서들은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실천을 전하는 문서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유대인이고 그들은 구약성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표현들을 자유롭게 갖다 사용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셨고 그것은 하늘에 오르시는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성서(2열왕 2,1)는 예언자 엘리야의 죽음을 하늘에 올라간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에 대해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 하는 말은 구약성서의 열왕기 하권(1,10. 12)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사마리아의 왕이 엘리야를 잡으러 군사를 보내었더니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삼켜버리게 했다는 고사(故事)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언자들은 복수하고 벌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르침을 꾸짖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병자를 고쳐 주고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분이십니다.

복음은 이어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생활 조건이 개선되거나, 경제적, 사회적 수준이 격상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현세적 입신양명(立身揚名)과 부귀영화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런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자기네 죽은 자들의 장례를 지내도록 내버려 두시오. 당신은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리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도 외면하는 패륜아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죽은 이는 하느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같은 루가 복음서에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갔다가 폐인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는 말합니다.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15,24).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사람이 살아 있게 하는 길입니다. 죽은 이들은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가서 하느님 나라를 알리라는 오늘의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죽음을 위한 절차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선포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집에 있는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식구들과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가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 곧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과거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달은 사람은 과거 자기의 인간관계를 자기 삶의 보람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에서 받은 상처로 괴로워하고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는 어리석은 일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새로운 내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삶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복음이 말하는 것을 요약하면, 예수님이 하신 복음 선포는 예언자들처럼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과 그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예수님 덕분으로 재물이나 지위를 얻어서 이 세상에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행세하는 일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에 애착하지 않습니다. 재물에도 지위나 신분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오로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보람을 느끼며,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며 삽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은 죽음을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신앙은 죽어서 잘 되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새로운 삶이 발생합니다. 하느님 자녀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시기에 우리도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과거 자기의 공로에 자만자족하지 않습니다. 할 일을 다 하였을 따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자기 과거에 대해 통한(痛恨)의 눈물만 흘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셔서 자기도 그 자비를 실천하기에 골몰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자기도 실천하면서, 그 자비가 흘러 넘쳐 이웃에게 흘러들게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하느님의 것은 고여 있지 않고 또 썩어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듯이...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나의 뜻을 성취한다”(55,10-11).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를 흠뻑 적시면, 그 자비와 용서는 주변을 위한 우리의 새로운 실천 안에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써 매일매일 우리에게 내일을 열어 주십니다.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 살아 계셨듯이 우리가 새로운 실천을 하도록 우리 안에도 살아 계십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459 28.8%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당신을 몰랐더라면 더욱 편했을지도 모르는 그런 세상이지만!” 김태진 신부의 생활성가 ‘마음을 드높이’의 첫 구절입니다. 어쩌면 이 말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크고 작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몇 가지 마음가짐을 전해주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풍요나 안락함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루가 18,22). 사마리아인들의 냉대에 격분하는 제자들을 나무라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권력이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낮추어 다른 이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마태 20,25-27).

세상의 시각으로 본다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 없는, 아니 오히려 성가시기만 한 삶일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은 아버지의 장례도, 식구들과의 작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매정하고 냉혹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는 인륜도 모르는 패륜아가 되라거나, 식구들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무정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요구는 ‘하느님 나라’에 맞추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의 존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는 복음의 요구는 과거의 삶에, 과거의 존재에 집착하거나 돌아가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고, 우리에겐 새로운 삶의 질서가 요구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질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고, 그로써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요한 14,23).

부산교구 권동성 본시아노 신부
  | 06.28
459 28.8%
제자의 선택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조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한 젊은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제자로 받아 달라고 청합니다. 율법 교사라면 당시 이스라엘에서 상류 지도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는 머리 뉘일 곳조차 없는 사람인데 이런 나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묻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의 청을 거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다른 한 청년에게는 예수님 쪽에서 당신의 제자가 되어 달라고 청하십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십니다. 즉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기에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의 권유를 수용하려 하면서도,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오겠다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 이러저러한 세상일에 대한 애착을 용감히 끊어버리라고 권유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즉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해서 부모나 가족에 대한 애정까지도 끊어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아무것도 끊지 못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책망하십니다.

실제로 우리가 미신자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권유하면, 천주교가 좋기는 좋은데 어머니가 불교 신자여서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안 되고 돌아가신 후에나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신자 중에도 열심히 잘 살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보면서 밭을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컨대, 너무 세상일에 쫓겨서 신자 생활을 흐지부지하게 한다든지, 세상 쾌락에 빠져서 엉터리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제일 윗자리에 계셔야 하는데, 이런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제일 밑자리로 밀려나고 천대받는 하느님이 되고 맙니다. 이런 경우가 쟁기를 밭을 가는 이로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면서 밭을 가는 경우입니다.

나는 어떠한 지 한번 반성해 봅시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하느님을 나의 모든 것의 윗자리에 모시고 그분의 뜻을 실행함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신 주님, 저희가 또다시 오류의 어둠 속에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아멘.

부산교구 김만수 요한보스코 신부
  | 06.30
459 28.8%
[부산] 주님 안에서의 자유

우리는 누구든 자유를 갈망합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여건이 답답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마음껏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을 따르기가 실제로는 어렵지만, 생각으로는 자주 그러한 바람을 갖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자유는 우리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남’이며 그에 따라오는 단순한 편리 혹은 편안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자유, 곧 단순히 ‘무엇으로부터 벗어남’이 아닌 오히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묾’에서의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를 통해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엘리사가 자신의 쟁기와 겨릿소뿐 아니라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어떻게 예언자의 삶을 선택했는지 들려주고 있습니다.

복음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그분과 함께하고 싶다는 세 사람에 대해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당신을 따를 준비가 되었다고 한 첫째 사람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하셨고,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받았지만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둘째 사람에게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고 하십니다. 그리고 역시 당신을 따르라고 초대받았지만 먼저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는 셋째 사람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제1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나의 것(소유물, 가족, 나의 과거 등)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부터 물러나는 자유로움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 자유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자유는 먼저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것이고, 나아가 그 머무름으로써 그분의 뜻을 행하게 되는 능력을 말합니다.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우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서 함께 기도합시다.

<부산교구 김영규 안셀모 신부>
  | 06.28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463   [광주]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자  102
462   [청주] 이웃이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1] 121
461   [수원] 착한 사마리아 사람 : 그리스도  [5] 2664
460   [의정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2] 125
459   [전주]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5] 2644
458   [춘천]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3] 143
457   [군종] 이웃 사랑은 두 팔로!  [3] 2457
456   [대전] "흘러가는 것과 흘러가지 않는 것"  [2] 142
455   (녹) 연중 제15주일 독서와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2] 1709
454   [대구] 농부이신 하느님의 마음  171
453   [마산] 참된 거처에로의 초대, 평화의 인사  197
452   [수도회] 그리스도의 평화  [7] 1878
451   [춘천]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202
450   [부산]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5] 2362
449   [의정부] 파견받아 떠나는 길에서  [1] 1617
448   [대전] 추수할 것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2039
447   [서울] 그리스도의 평화  [2] 2067
446   [인천] 주님에 대한 신뢰가 참된 복음 선포  [3] 1704
445   [수원] 고통은 기쁨을 낳는다?  [1] 1917
444   [전주] 댁에 평화를 빕니다.  [2] 2242
443   [광주] 평화를 빌어 주자  215
442   (녹) 연중 제14주일 독서와 복음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2] 1762
441   [수도회] 나는 죽은 자입니까, 살아 있는 자입니까?  [5] 2437
440   [수원] 자신 있게 뒤로 눕기  [1] 2726
439   [대전] 어느 화분에 물을 주려 하는가?  [1] 145
438   [원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 것  [1] 2711
437   [의정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1] 150
436   [서울] 주님 따르기  [4] 2835
435   [인천] 욕심  [4] 154
434   [춘천] 뒤돌아보지 않는 삶  [1] 2440
433   [광주]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것은  120
432   [마산] 하늘나라는 끊어버림에서 온다.  [3] 2620
431   [군종]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1] 108
430   [대구] 예수님을 따르려면...  [2] 2603
429   [안동] 부르심을 받은 이의 신앙생활  [2] 119
  [부산]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분  [3] 2532
427   (녹) 연중 제13주일 독서와 복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3] 1863
426   [의정부] 꿈나무, 땔 나무  [3] 2451
425   [군종] 고통과 역경을 통한 진정한 부활 신앙  [2] 2065
424   [수원] 진실과 증거  [5] 2335
[1][2][3][4][5][6][7][8] 9 [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