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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영원에 이르는 길
조회수 | 7
작성일 | 17.08.12
[수도회] 영원에 이르는 길

중국에서 강진으로 천혜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던 곳들이 하루 만에 폐허가 되어 버렸다.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도 멀어져 영원하리라던 사랑과 우정도 사그라진다. 한 번 사제는 영원한 사제이고, 죽는 날까지 수도자로 살겠다는 굳은 맹세도 지켜지지 못한다. 예수님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살다 떠나가셨다. 영원하신 하느님도 살해했던 이 땅에서 어떻게 영원한 것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영원한 것에 갈증은 도무지 해소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빚어 만드실 때 그 진흙 인형에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셔서일까, 아니면 영원에 대한 갈증을 넣어 진흙 반죽을 만드셔서 그런 것일까, 찾을 수 없는 영원을 갖고 싶은 바람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아마도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나의 영혼을 안심하고 내어 맡길 수 있는 곳,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곳을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약속하셨다. 그 땅은 분명 어떤 특정한 지리적인 장소가 아닐 것이다. 지진으로 하루 만에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릴 수 있는 곳에 내 목숨을 내어 맡길 수야 없지 않은가? 그 땅은 하느님 나라이고, 예수님과 맺는 친교이다. 혹여 나는 그분에게서 멀어질지 몰라도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누구나 결국 그분을 뵙게 된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날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시간이겠지만,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기대 가득 찬 시간이 될 것이다. 여쭤 볼 것도, 따질 것도 많고, 고마움과 사랑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 때문이다.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신명 4,40).”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라고 하시며 그 날에 벌어질 일들을 미리 알려주셨다. 오늘도 해야 할 일,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고,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도 벌어질 것이다. 모두 내가 짊어져야할 것들이다. 나의 영혼을 사랑하고, 나를 빚으신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것을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간다. 그 길을 따라가면 이 세상에는 없는 영원한 곳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구속주회 이종훈 신부 - 2017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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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내 뒤를 따르려면”-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수난의 길을 함께 가려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그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 속에는 ‘원하기면 하면 누구나’ 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가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병자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 뒤를 따르려면” 이라는 말 속에 있는 ‘누군가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그의 제자 됨을 말해줍니다. 앞서 가는 자가 아니라, 뒤따라가는 자가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따름은 그 누구인가가 아니라, 앞 장면에서 말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을 따르는 것을 말하며, 바로 당신이 걸어야 하는 수난의 길을 따를 자를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강론을 대신해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에 따른 고백의 기도를 드려봅니다.

주님!
제게는 오늘도 걸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는 세 가지 길입니다. 곧 그 길은 제 자신을 버려야만 갈 수 있는 길이요, 제 십자가를 지고서야만 갈 수 있는 길이요, 스승을 따라가야만 갈 수 있고 형제들과 함께 가야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단지 제 욕심을 비우거나 제 뜻을 버리거나 제 자신을 포기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당신께 신뢰를 두는 일이요, 제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 자신을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니까요.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원하지 않는 고통을 지거나 범한 죄를 지거나 저 자신을 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죄와 허약함을 품는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께 대한 희망을 지는 일일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희망 말입니다. 저를 짊어지신 당신을 희망하는 일, 그것 말입니다. 당신이 저를 희망하니까요. 저는 당신의 소중한 자녀이니까요.

‘스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당신 없이는 갈 수 없는 길, 사랑이 아니면 갈 수가 없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당신과 함께가 아니라면, 아예 가지 못할 길이요,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 몸에 당신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는 길, 그것은 애시 당초 당신으로 하여 가는 길이니까요.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이니까요.

주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거나 회피 하지도 말게 하소서!
제거하거나 없애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해결하거나 해소하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극복하고 견뎌 내거나 참아내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초월하고 뛰어넘으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적당히 타협하고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이 가슴에 끌어안게 하소서!
사랑으로 끌어안게 하소서! 그 속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은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으니까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시니까요.

이제 감히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저도 원합니다.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7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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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 구원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가 낸 책 제목이자, 25년전 1992년 1월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 미사 때 제가 한 강론 제목입니다. 그때의 강론 제목은 물론 내용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오늘은 이 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란 분명한 물음으로 요약됩니다.

앞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 예수님은 오늘 숨돌릴 틈도 없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의 엄중한 상황을 상기시키며 재차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주님의 배려도 고맙습니다. 주님은 산상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체험으로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보여 주시며 십자가의 길 도상에 있는 제자들을 위무하시며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지난 주 이미 우리는 주님 변모 축일을 경축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너무나 단순명확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란 말마디에서 보다시피,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만고불변의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은 이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제 십자가와 주님을 따르는 일을 망각했을 때 자기 목숨을 잃습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시도가 결국은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길이 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일 같지만 실상 목숨을 얻는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목숨을 잃어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고 불행하다면 온 세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살아있음의 기쁨과 보람이 있어야 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진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잣대 역시 얼마나, 어떻게, 예수님을 충실히, 항구히 제 십자가를 지고 따랐느냐가 될 것임은 다음 주님 말씀이 입증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주님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분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뒤를 따르는 우리들을 늘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을 충실히 따를 수 뿐이 없습니다. 문제는 망각에 있습니다. 무지에 이은 망각이 마음의 병입니다. 이래서 신구약 성경뿐 아니라 내 삶의 성경도 자주 렉시오디비나 하여 주님의 사랑을 새롭게 상기하여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모세도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동체 삶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하며 하느님의 위업을 상기할 것을 촉구합니다. 모세는 계속 물음체로 이들에게 위대한 하느님의 업적을 상기시키신 후 결론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초점은 바로 오늘에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새 모세, 예수님의 명령은 아주 단순명쾌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닌 각자 고유의 제 십자가입니다. 피할 수도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고, 남이 대신 져줄 수도 없는 내 십자가의 짐이자 선물입니다. 타고난 한계와 약함, 주어진 내외적 환경도 다 다르기에 다른 이들의 십자가와 비교할 것도 없고, 굳이 제 십자가를 애써 찾을 것도 없습니다. 이미 알게 모르게 각자 제 운명의, 책임의 십자가가 주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고 적게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를 살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랐느냐가 구원의 잣대입니다. 성인들은 모두가 제 십자가를 지고 충실히, 항구히 주님을 따랐던 분들입니다. 비단 성인들뿐 아니라 사람이 되는 길도 이 십자가의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야 말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인간의 길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도 우리 모두 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주님을 잘 따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끝으로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의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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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어디서 우리의 존엄성을 찾을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당신을 추종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16,24) 하십니다. 제자들은 반대를 받고 단죄 받아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을 닮는 데서 자기 존엄성을 찾아야 합니다. 적대심을 품은 군중을 지나 모든 자존심을 버리는 그 십자가 추종의 길이 바로 하느님의 생명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나, 자신의 몸과 감정, 올바른 의지를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불의나 부당한 권력 앞에 굴복하거나 그것을 마지못해 견디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지요.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세상의 무관심과 차별, 불의와 불평등을 위해 자기 생명을 투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숨 바쳐 불의에 저항하는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고난과 제자들의 고난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점, 곧 예수님과 동화되는 지점이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목이요 나의 존엄성을 찾는 꼭짓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6,25)

다시 말해 자신을 존재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그분의 생명을 향하여 걸어가야 할 사람이 자신에게 몰두한다면 하느님의 생명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보잘것없고 실패한 듯이 보일지라도 영원한 보화를 얻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16,26) 인간의 행복은 현세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의 소유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행복은 하느님을 소유할 때에 주어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존엄성을 찾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주 달콤한 돈의 마력에 빠져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빚으신 옹기그릇이요 주님의 성전인 나를 허망한 세상 것들과 바꿔서야 되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소유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그 빈자리에 하느님을 채울 때 우리는 존엄성을 되찾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던져 구조적인 악과 집단적 이기주의, 돈의 우상,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는 바로 그 몸짓에 나의 존엄함이 드러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나아가 인간성과 생명을 되찾고, 절망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속박에 해방을 주시려고 전존재를 투신했던 예수님을 닮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제자임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자신에 대한 집착과 세상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에 동참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예수님과 더불어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살펴야겠지요.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수많은 병리적 현상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 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2017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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