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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전주/제주/청주] 가장 충성스러운 모습은
조회수 | 169
작성일 | 17.08.29
[부산] 가장 충성스러운 모습은

오늘 복음은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기준은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혹은 없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자기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충성스런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충성스런 종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용기 있는 신앙생활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것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겠습니까? 혹은 죽을 때 무엇을 가지고 죽겠습니까? 돈, 명예, 권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가지고 죽지도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 전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고 가지고 죽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그림자를 가지고 태어나고 죽을 때 그림자를 가지고 죽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을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 볼 때 하느님 아버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곧,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태어나시고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같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는 내가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고 그렇게 봉사를 하였는데 무엇을 주셨는가?' 라고 하면서 떠나는 이들이 많은 것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마는 않은 것같습니다. 어린 아기를 가지신 부모님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작은 꼬마 아이가 칭얼거리면 부모님은 들어주십니다. 우리 역시 간절히 청할 때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용기 있는 신앙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충성스런 종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가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아픈데 부모가 춤바람이 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도 아픕니다. 자식이 슬프면 부모도 슬픕니다. 자식이 기쁘면 부모도 기뻐하십니다. 또한 자식이 길을 걸어가다가 넘어지면 부모는 일으켜주기보다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넘어진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납니다. 그러할 때 부모는 매우 기뻐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내가 힘들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힘들어하십니다. 내가 어려울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어려워하십니다. 내가 기쁠 때 하느님 아버지는 기뻐하십니다. 내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넘어지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일으켜주시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용기 내기를 바라면서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세 번씩이나 넘어지십니다. 첫 번째 넘어지실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온갖 어려움에 짓눌려 있는 모습, 온갖 고통에 싸여 있는 모습, 온갖 아픔에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넘어지시면 또 다시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십니다. 그래도 용기를 가지시고 일어나십니다. 세 번 넘어지시고 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싶습니다.

가장 충성스러운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닮고자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히브리서에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랍시다.' 라고 우리의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용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용기가 있는 자는 성실한 종이 될 것입니다.

▥ 부산교구 김기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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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번은 찾아오고야 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들 생의 시작처럼 죽음이 다가올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내일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가요. 그의 한마디가 우리 삶의 성실성과 진정성을 알려주는 것 같아 자꾸만 되새겨지는 하루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를 더 덧붙여볼까 합니다.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 여기고 살아가십시오.”

마지막 날이라 여기고 사는 삶에는 크게 두 종류의 삶이 있습니다. 성실한 삶과 막가파의 삶이 그것입니다. 마지막 날이니 그동안 시간이 없어 미룬 봉사나 자선활동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동안 마음껏 하지 못했던 최고급의 음식과 술, 화려한 옷과 귀금속의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그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도박이 천국이 없다는 것에 도박을 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죽어서 천국이 없다는 쪽에 도박을 걸었는데 죽어서 천국이 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인들도 마치 천국이 없다는 쪽에 도박을 건 사람들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 전주교구 최종수 신부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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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나의 죽음 - 세상의 종말

우리는 지난 며칠동안 마태오복음 23장을 통하여 예수께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내뱉은 신랄한 비난과 7번의 불행선언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마태오는 23장을 마무리하면서 유대교 신앙의 상징인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유대교의 총체적인 멸망을 예고하였다.(23,34-39) 이는 곧 이스라엘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마태오는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테마를 근거로 인류역사의 종말을 제고한다. 인류역사의 종말은 마태오가 엮은 예수님의 종말설교(24-25장) 안에서 논리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설교(18장)에 이어 마지막으로 종말설교(24-25장)를 논리적으로 엮었다. 마태오의 종말설교는 대략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르코복음 13장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나, 한층 포괄적이고 조직적이다.

마태오의 종말설교는 크게 7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① 예루살렘 성전파괴 예고(24,1-3), ② 종말예고의 전조들 / 재난의 시작(24,4-14), ③ 종말직전의 전조들 / 가장 큰 재난 발생(24,15-28), ④ 종말사건들 / 인자의 내림(24,29-31), ⑤ 무화과나무의 비유(24,32-35), ⑥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말씀(24,36-44), ⑦ 종말에 관한 비유 4편(24,45-25,46)이다.

종말에 관한 네 편의 비유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달란트의 비유(25,14-30), 그리고 최후심판의 비유(25,31-46)이다. 이 마지막 최후심판의 비유로서 사실상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앞둔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은 끝난다.

오늘 복음은 종말설교의 ⑥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말씀의 마지막 단락(24,42-44)과 ⑦ 종말에 관한 4편의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에 해당하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를 매끄럽게 연결시켜 들려준다. 종말에 관한 비유들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을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4절)는 첫 단락의 말씀이 종말에 관한 비유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종말에 관한 비유들의 특징과 요구사항은 종말을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예수께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종말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24,36)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들이닥칠 수도 있고, 시간을 두고 더디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다림의 마음은 초조하기 마련이다. 곧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의 종말과 인자의 재림이 늦어지면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해 볼만하다.

이와 같이 ‘재림지체현상’은 종말의 시기와 모양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말설교에 담겨있는 4편의 종말비유를 묵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이 오리라고 생각했던 시점에서 2,0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언제 종말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인간이 삶을 다하고 죽는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든 필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아 있도록 허락하신 기간 동안에는 누구든 삶에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의무가 있고 동시에 권리도 있다. 그러나 삶이 곧 죽음의 준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모든 것을 마감한다면 그 준비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 준비가 헛되지 않도록 분명히 다시 오실 주님께서 점검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을 준비시킬 책임을 맡은 종의 임무가 한층 돋보이는 것이다.

책임이 크면 압박감도 크지만 그에 대한 즐거움과 보람도 크기 마련이다. 행복하여라, 마지막 날을 향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잘 준비시키는 데 밤낮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여

▥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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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주님의 행복한 종

소신학교 시절, 마라톤에 출전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며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러나 마라톤은 신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온몸에서 열이 오르더니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죽는가보다 했습니다.

순간 성녀 소화 데레사가 떠올랐습니다. “성녀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 한 번이라도 하느님을 방긋 웃게 해드릴 수 있다면 자신의 일생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는데,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못해드리고 죽는구나!” 하니 제 짧은 인생이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새 성경 번역을 완성하신 임승필 신부님이 쉰셋의 나이에 하늘 나라로 가신 지도 3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임 신부님은 저의 테니스 호적수이기도 하여서, 휴가 때면 코트에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휴가 중에도 테니스 외에는 식사만 하고 나면 성경 번역에만 매달리셨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셨는데 완역 합본의 출판도 못 보고 가셨으니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분으로서는 탈대로 다 타고 남은 동강 하나 없이 온전히 재가 되어 가셨으니, 그분은 진정 행복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 제주교구 임문철 신부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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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던지 목적하는 바에 맞추어 준비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느냐에 따라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행동이나 습관은 무엇을 지향하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는 말이 됩니다. 운동하러 가는지, 식사하러 가는지, 아님 어떤 일을 하러 가는지, 아님 쉬러 가는지, 여행 가는지, 하느님께 가는지 아님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행동양식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각자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의 모든 행동들은 어디로 향해 가고 있습니까?

동물 중에 기린이란 동물 아시죠. 아주 키도 크고 목도 긴 동물 말입니다. 글쎄 이 기린은 아주 겁이 많답니다. 그래서 항상 맹수들이 오는지 주위를 살피면서 평생을 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초식동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비슷하겠지만 유독 기린은 더 조심하며 생활합니다. 그래서 기린은 대부분 선 채로 눈을 꾸벅 꾸벅 졸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안전하다 싶으면 땅에 앉아 잠을 자기도 한답니다. 그것도 땅에 앉아서 그 긴 목을 구부려서 잠을 잡니다. 잠을 자다가도 무슨 소리가 나면 금방 머리를 들어서 경계를 합니다. 그런 이유로 기린이 깊은 잠을 자는 것은 하루에 5분도 안된다고 합니다. 이런 기린의 습성과 긴 목과 다리를 가진 모양 때문에 다른 초식동물들도 기린의 행동을 많이 참고해서 자신들을 보호하기도 한답니다. 아마 기린 자신의 생존본능이 다른 동물에게는 좋은 파수꾼이 되나 봅니다.

이처럼 우리도 아마 기린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나의 삶이 중단되거나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늘 깨어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우리의 삶의 발걸음이 하느님 에게로가 아니라 세상으로 대변되는 재물과 권력 등에로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원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로 다른 곳에 가 있게 되며, 이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과 연관된 이웃까지도 함께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이런 연유로 성경은 우리에게 늘 깨어 준비하고 나아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빛을 잃거나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느냐고 질책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는 우리들의 소중한 신앙을 잘 지켜 “흠 없는 사람으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되기를 빈다.”고 하시며 늘 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 하십니다. 나아가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어라.”라는 말을 잊지 말라 하십니다. 자칫 어리석은 부자처럼 잘 준비하다가 가장 소중한 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이 부자는 어느 해 소출이 많이 나자 이렇게 외쳤지요. “내영혼아 기뻐하여라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제 몇 해 동안은 걱정이 없다 큰 곡식창고를 지어 놓아서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때 하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 너의 영혼이 너를 떠나가리라.”고 말입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방심하는 동안 주춤하는 동안 다른데 관심을 갖는 동안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전부 깡그리 잃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리면 방심한 기린이나 어리석은 부자나 악한 종처럼 되어 행복할거라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 오히려 불행에로 이끌고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이 아니라 벌 받는 자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되어 가슴 치며 통곡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늘 준비하며 행복한자 될 것인지 잠깐의 재미와 기쁨을 위해서 자신과 이웃을 구렁텅이로 이끄는 방심한 기린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늘 우리 앞에는 도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늘 후회하지 않는 선택으로 좋은 하루 되세요.

▥ 부산교구 김윤태 루카 신부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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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죽음 이후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제가 지옥에 가게 된다면 죄목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한 죄’ 때문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다음에, 조금 있다가, 내일로 미루며 게으름을 피우기 일쑤입니다.

충주에 있는 어느 국수집에 가면 손님들이 남기고 간 글들이 사방에 붙어 있습니다. 그 많은 글 중에 이런 글귀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할 일없이 보낸 오늘 하루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던 내일이다.”

미래의 행복한 삶은 현재의 삶들이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행복한 미래는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갈 때 나의 삶이 행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당신은 현재의 삶에 충실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예, 그렇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게 살아갑시다.

▥ 청주교구 유재훈 신부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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