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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내적순례여정
조회수 | 32
작성일 | 17.10.04
[수도회] 내적순례여정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3년전 산티아고 순례여정이 생각났습니다. 프랑스땅 생장피드포르를 출발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기까지 장장 800km, 2000리에 이르는 순례길이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곳에서는 순례자들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에 있었던 일을 보도합니다.

‘하늘에 오르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말 그대로 우리 순례여정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산티아고 대신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여정입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본향인 하느님의 도시, 하느님의 집입니다. 즈카르야의 예언이 예수님과 그 일행을 통해, 또 우리를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자, 가서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자.”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고자 영적 예루살렘과도 같은 이 거룩한 파스카 축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순례여정중인 우리에게 다음 말씀도 실감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치 우리 수도자들을 향한 하느님을 목말라 수도원을 찾는 이들의 내면의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사실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순례여정에 함께 하고자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산티아고나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우리 인생순례여정의 궁극 목적지인 하느님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순례여정중인 교회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순례자들입니다.

우리는 목표없는 정적靜的인 공동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느님의 집을 향한 내적여정중에 있는 역동적力動的공동체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순례여정을 멈추고 안주하기 시작하면 공동체는 역동성을 잃고 표류漂流하여 타락하기 십중팔구입니다. 궁극의 하느님 비전을, 예루살렘 목적지를 잊어 버렸을 때 탈선입니다.

바로 예수님 일행의 순례여정공동체를 맞이하지 않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야고보와 요한의 과격한 반응이 그렇습니다. 잠시 눈이 가려 본질적 목표를 잊어버렸기에 지엽적 사소한 일로 대사大事를 그르치려 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 목적지에 대한 선명한 의식으로 깨어 있었기에 지체없이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을 통해 예루살렘 본연의 순례길에 오르십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바 우리의 내적순례여정의 궁극 목적지인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집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집을 향해 내적순례여정중에 있습니다.

제가 자주 드는 비유가 생각납니다. 우리의 평생내적순례여정을 하루로, 또는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입니다. 과연 내 나이는 오전인가 오후인가, 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철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 깊이 묵상하다보면 남은 순례여정에 대한 각오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거룩한 하느님의 도시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참 심오합니다. 바로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신비의 구원의 이루어진 곳입니다. 과정과 목표는 하나입니다. 매일의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예루살렘을 압당겨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파스카 미사축제가 벌어지는 오늘 지금 여기가 우리의 궁극 목적지인 영적 예루살렘입니다.

매일 파스카의 신비를, 파스카의 기쁨을 살게하는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탈선 없이, 현세의 유혹에 빠짐없이 성공적 내적순례여정의 삶을 살게 합니다. 끝으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중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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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 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 길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를 완성(συμπληροω)하는 하늘로 올라가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승리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9,51절)서부터 19장 27절까지를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길은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가야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면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었고,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이는 아하즈아 왕 때, 예언자 엘리야를 모욕했던 자들에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사른 사건(2열왕 1,10-12)을 반영해 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봅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당신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한 것입니다.

이는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마저 맞아들이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린이가 되는 길, 작아지는 길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럴 때가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어린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작은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혹 <복음>의 제자들처럼, 오늘 우리가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자신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를 맞아들이는 길은 진정으로 그를 용서하는 이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며 잃어버린 자들을 건지시기 위함이셨습니다(루카 19,10; 요한 3,17; 12,47).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마리아를 통하는 짧은 길을 피하여, 곧 폭력과 보복의 짧은 길을 피하고, 멀리 돌고 도는 평화의 길을 따라 가십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 평화의 길을 따라 걷습니다.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7년 10월 3일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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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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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십자가를 잊고 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가치를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믿음은 결심으로 구체화됩니다.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은 십자가의 결심입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택하십니다. 우리를 모으시고 끌어안으려 하십니다. 무책임한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수난으로 생명의 의미를 다시 보여주십니다.

생명의 기쁨은 결심이 시작되는 곳에서 더욱 뜨거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되잡아주십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은 십자가의 결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의 십자가를 위해 기도하는 추석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7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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