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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12월 18일 화요일 독서와 복음-요셉은 파혼하기로
조회수 | 156
작성일 | 18.12.18
▥ 제1독서 :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 예레미야서 23,5-8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7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고,
8 그 대신 “이스라엘 집안의 후손들을 북쪽 땅에서,
그리고 당신께서 쫓아 보내셨던 모든 나라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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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 마태오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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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인용된 요셉의 표상은 오늘 말씀 전례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차지합니다. 복음서들 안에 요셉은 잘 등장하지 않지만, 예수님 ‘유아 시절’의 복음이라 부르는 곳에는 요셉과 동정 마리아 모두 등장합니다. 마태오는 거기에서 특히 요셉의 표상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다윗 가문에 들고 다윗의 싹은 “주님은 우리의 정의”, 곧 우리 구원이라 불릴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메시아 신탁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말한 대로 성령으로 잉태하여 그의 아내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이에게 요셉이 붙여 줄 이름이 예수(‘구원자’)입니다. 이는 하느님 계시를 누군가에게 나타내려고 사용한 성서적 표현입니다. 거룩한 영의 창조적 도유는 새 백성과 재생된 인류가 태어나는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에게 길을 준비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는 데 친어머니 마리아와 다윗 왕좌를 차지하러 온 의로운 싹의 양부인 요셉의 인간적 협력 또한 중요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같이 살기 전 마리아가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미 약혼한 처지였습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혼인 전 맺는 약혼은 정해진 혼인에 대한 약속을 나타냅니다. 요셉이 파혼하고 싶었다면 마리아를 공적으로 고발하거나 혼인을 취소하는 선택밖에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결정은 그녀를 공적으로 고발하지 않고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근본적인 계시이고 믿음의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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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매일미사 2018년 12월 18일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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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를 통한 하느님과 요셉의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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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복음 1-2장은 예수님의 공생활(가르침과 행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비교적 먼 과거의 이야기를 엮어 만든 전사(前史)에 속한다. 이러한 전사는 루가복음(1-2장)에도 있다. 둘 다 원전(原典)이 될 마르코복음과 예수어록에 없는 전승들과 각자 고유의 자료들을 토대로 전사를 엮었을 것이다. 루가복음의 전사(前史)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 그리고 성장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 암시한다. 아울러 루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즈가리야, 엘리사벳, 마리아, 요셉, 목동들, 그리고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 등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서술도 포함시켰다.

이와는 달리 마태오는 예수님 단 한 분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족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경위, 동방박사들의 방문, 헤로데 대왕의 베들레헴 아기학살, 이집트 피난, 그리고 성가정의 나자렛 정착에 관한 이야기를 위주로 전사(前史)를 엮었다.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러한 전사(前史)들이 예수의 생애 시초와 어린 시절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근거로 엮어진 기록들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밝히려는 신학적인 서술이라는 것이다. 즉, 인류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신뢰와 신앙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사가 마구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전사가 사실과 달라야 하는 법도 없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경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물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설명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의 족보를 소개한 마태오가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마태오가 저술한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전자(前者)는 인간의 이름이요, 후자(後者)는 하느님의 이름이다. 즉, 예수는 인간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어야 하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어야 한다. 마태오는 다윗의 후손인 요셉을 예수의 합법적인 아버지로 서술함으로써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 되게 하였다. 마태오는 예수의 공생활 중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예수께 8번이나 더 부여한다.(마태 9,27; 12,23; 15,22; 21,9.15 등)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만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 밝혔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는 일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 일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추진하신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의 잉태’(이사 7,14),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이다.(18절)

루가복음은 예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하느님의 계획과 이 계획에 대한 동정녀 마리아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짐을 시사하고 있다.(루가 1,26-38) 또한 루가는 마리아의 합법적인 남편 요셉을 두세 번 언급할 뿐 전적으로 배경에 머물게 한다.(1,27; 3,23) 그러나 마태오는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에 관한 사실은 간단하게만 밝히고, 오히려 요셉을 부각시킨다. 마리아의 잉태가 자신과 무관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이 점은 상상에 맡기겠다. 복음은 요셉이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나, 마리아를 법대로(신명 22,20-21) 다루지 않고 자비로이 선처(善處)하려 하였음을 시사한다. 이 때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여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게 사건의 정황을 설득시키고, 요셉은 이에 순명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요셉 사이에 일종의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에게 천사의 명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된다.(21절, 25절)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합법적인 아들로서 다윗이 자손이 되었고, 동정녀를 통한 성령의 잉태로 하느님의 아들이 된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인간의 아들이요, 하느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더 나은 이름이 있다. 바로 ‘임마누엘’이다.(23절)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적은 없다. ‘임마누엘’은 실상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는 의미상의 이름이다.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참다운 만남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예수께서 저 바깥 마구간 구유에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느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만들어야 한다. 이 일은 맨 먼저 요셉의 과제이기도 했다. 요셉은 아내 마리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 안에 구유를 만들어 예수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의 거래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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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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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함께 계시면 얼마나 든든할는지요? 느낌을 살리지 못한다면 이유를 찾아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셨기에 축복으로 끝난 사건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무심코 잊은 채 살아가기에 무덤덤해지는 것입니다. 그때의 감격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러면 ‘임마누엘’의 의미는 새로워집니다.

사람들은 별다른 병이 없는데도 건강에 대해 불안을 느낍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해서도 공포심을 지닙니다. 하지만 두려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본래부터 ‘주님의 것’이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정도의 건강을 주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임마누엘’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니 어떤 처지에 있든 두려움을 벗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복음의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당연히 그는 고뇌에 빠집니다.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 주셨기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들을 보는 눈이 없었기에 지나쳐 버렸을 뿐입니다. 곁에 있는 천사들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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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미사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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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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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두 번 태어납니다. 그리고 한 번 죽습니다.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서 두 번 죽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전합니다(묵시 21,8 참조).

이미 하느님이 성령으로 거듭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이미 세상의 것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주님 안에서 죽음을 당한 우리가 교회입니다.교회는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이 채워지는 곳을 말하기 때문입니다.이에 대해서 바오로사도는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 8,5)라 하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로마 6,11)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삶 안에 놓인 허다한 난관, 그 깊고 험한 구비마다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고 무서워하지도 두려워 할 까닭도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그날, 약혼녀의 임신을 알게 된 요셉이 겪었을 무지막지한 고뇌의 무게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그리고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그날 요셉의 머리는 터질 것같이 복잡하고 요셉의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을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이 경우에 따라서는 참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르심으로 새깁니다.

오늘 성경은 요셉의 의로움을 전하고 있습니다.그런데 하느님께 인정된 요셉의 의로움은 세상에 정의를 외치고 세상에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아는 만큼만 자신에게 이해되는 만큼만 행하되 상대를 궁지로 몰아가는 경우가 없도록 살피고 상대가 힘들어지지 않을 방법 때문에 고민한 결과입니다.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되 남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행할 때 의롭게 기억하신다는 주님의 고백이라 짚어봅니다.

날마다 부딪히는 상황이 낯설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나 싶은 지경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모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그분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얼마쯤 힘들고 어려운 것을 아시는 그분께서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며 “몸소 말로 다할 수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로마 8,26-27)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 눈물까지도 함께 하시는 그분께서 남모르게 살피고, 아무도 모르게 도우십니다.세상이 이해하지 못했던 요셉의 숨겨진 의로움이 하느님의 아들을 살렸습니다.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남모르게 행하는 의로움이 세상을 살리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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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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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인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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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군생활의 어려움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제가 힘들어했던 것 중에 하나가 태권도였습니다. 군복무기간 중에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저는 자대배치를 받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평소 훈련이나 작업이 없으면 짬짬이 시간을 내어 선임자들로부터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다 승단시험이 있다고 하면 중대에서는 한 명이라도 승단시험에 합격시키려고 강도 높은 연습을 시킵니다.

몸에 좋은 운동이기는 하지만 많이 힘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몸이 유연하지 못해 연습이 너무 힘들었고, 매번 아침이 되면 태권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했었습니다. 두 번이나 시험에 떨어져 남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한 덕에 다른 사람보다 늦기는 했지만 태권도 유단자가 되었습니다. 승단시험에 합격한 그날의 감격과 기쁨은 아마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행복과 기쁨을 꿈꾸지만 고통의 시간도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생의 여정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함께 있듯이 기쁨을 원하는 만큼 고통의 시간에 대한 준비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생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생에 겪게 되는 어려움, 고통을 제 나름대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누구나 살아가면서 당연히 겪어야 할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겪게 되는 고통이요, 이 사회 일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어려움들입니다. 제가 군에서 태권도 유단자가 되기 위해서 힘들었던 연습을 했던 것도 군인이기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어려움이었습니다. 학생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공부라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 여자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산고를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공공 질서를 위해서 우리는 정해진 법규들을 준수할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사회적, 가정적, 그 외 나의 위치에 따라 주어진 당연한 고통입니다. 이 어려움의 극복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기 보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고, 이러한 고통의 극복은 나로 하여금 현실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세상엔 회피해도 되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선택적인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사정 등으로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당연히 감수해야할 고통이 아니기에 피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고통을 견딤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고통이 있습니다.

나의 재물을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나눈다거나, 사회정의를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으로 헌신하는 일 등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할 고통보다 더욱 고통스럽고 벅찬 것들이지만 이 고통의 감내로 세상은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탄신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의 고통과 성모님과 함께 자신의 삶을 하느님을 위해서 바친 요셉의 생을 보면서 그들이 선택한 삶은 피할 수 있었던 고통의 삶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지게 됨으로 겪게 될 사회적 비난을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법대로 살아가는 요셉 역시 잉태한 마리아를 받아들임이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어 더 큰 뜻을 위해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선택한 고통으로 세상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온 인류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에도 지금 고통의 언덕이 어떤 형태 이로든 놓여있을 것입니다. 그 고통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든, 세상을 위한 것이든 힘껏 참아내십시오. 우리 앞에 놓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그 고통을 인내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씩 더 큰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물론 회피라는 방법도 있겠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또 하느님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고통을 안고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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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교구 이창신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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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진짜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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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바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산 적이 있었습니다. 남이 날 등쳐먹으려 하면 속아줄 수 있고, 욕을 해도 웃을 수 있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인생이 다 그러려니 하며 그냥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 하지만 내 것을 잃고 싶지 않은 욕구와 내 것이 아닌 것을 찾아 나서려는 욕구 때문에 언제나 바보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진짜 바보를 한 사람 만납니다. 예수님 아버지 요셉. 꿈속에서 나오는 천사의 말 한마디에 사생아를 잉태했다고 생각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요. 글쎄 성령으로 말미암은 아기라고 들었습니다. 이름도 주어져버렸습니다. 그때 당시 이름 짓는 권한은 아버지에게 있었는데 아버지 역할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지요.

요셉은 너무도 단순하게 그리고 주저 없이 들은 대로 행합니다. 내가 요셉이었다면 얼토당토않은 이 얘기를 순순히 따를 수 있었을까? 이 사실을 누가 알기라도 하면 ‘등신’이라고 욕할 것 아닙니까요? 요셉 참 대단하지요. 하지만 바보가 될 수 있었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오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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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대교구 민경철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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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하느님 사랑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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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는 사건입니다. 그분의 탄생은 인간과 세상의 구원, 어두움에 빛을 가져온 탄생이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성취시키기 위한 탄생이었습니다. 비록 가난한 모습으로 마구간에서 태어난 보잘것없는 탄생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경탄했습니다. 우리는 전례 안에서 매년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런 의미 없이 연중행사로 지내는 무덤덤한 성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기쁨으로 다가오는 탄생인가? 아니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탄생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일회적 행사로 지내버리는 탄생인가?

만일 그분의 탄생이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탄생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탄생은 단지 이천 년 전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비천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욕망, 이기심, 교만을 버리도록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선물입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번 성탄은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온 마음으로 느껴보고 소중히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성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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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교구 유해욱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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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우리에게 축복과 영광을 약속하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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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자녀들이 당신을 거스르고 배반할지라도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미래에 대해 들려주시는 까닭은 자녀들이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자녀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그 대가로 혹독한 고통과 시련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죄의 결과에 대해서 예언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죄를 짓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른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되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느님께 울부짖으면 그에 대해 마음 아파하시며, 구원을 약속하신다. 자녀들이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고자 미래에 누릴 영광과 축복을 예언해 주신다. 하느님은 그처럼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를 탈출시키시어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시련과 고통을 당하도록 하심으로써 이집트에서 물들었던 죄와 우상숭배의 흔적들을 깨끗이 씻도록 하셨다. 마치 용광로에서 불로 단련하여 순수한 쇠를 얻어내듯이 당신 백성을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순수하게 단련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축복과 영광을 누릴 것임을 예언해주심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이 영광과 축복을 받을 것이며, 먼 훗날 메시아의 나라가 세워질 것임을 예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예언자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악 속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과 영광을 주실 것임을 굳게 믿고 살아가자.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자.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받고 모든 고통을 극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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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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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남 탓, 운명 탓을 외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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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어떤 여자가 살충제를 먹고 생을 마감한다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위액을 조사한 결과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그녀의 위액 속에는 살충제의 흔적은 전혀 없고 대신 독성이 전혀 없는 음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녀는 실제로 무독성 음료를 마신 것인데 살충제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어느 책에선가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추락해서 고통 속에 있을 때, 친구가 아스피린을 진통제라면서 자기에게 주었는데 이를 먹은 뒤에 고통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플라시보우(Placebo) 효과라고 하네요. 진통제를 요구하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주면 치명적이어서 그 처방이 불가능할 때 그와 비슷한 모양의 약을 환자에게 줘서 정신적 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되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지요. 겸호라는 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길일이라도 그날 악한 일을 행하면 반드시 흉일이 되는 것이요, 흉일이라도 선을 행하면 반드시 길하게 된다. 길흉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날에 달린 것이 아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지금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한날한시에 똑같은 환경, 똑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각자의 길은 각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상은 우연으로 다가오지요. 그 우연을 좋은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이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그 우연을 나쁜 운명으로 만드는 이는 실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이 약혼녀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이유는 결혼도 하기 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지요. 의로운 사람이라고 복음서에 적혀 있듯이, 요셉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간음한 여인이라고 신고해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도록 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해진 운명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운명을 거슬러서 자신의 의지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지요. 이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운명을 거슬러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뒤에야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 잉태에 대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만약 정해진 운명이라고 하면서, 율법대로 마리아를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의 강생이 있을 수 없었겠지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외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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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2.19
448 100%
결혼한 지 13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사랑해”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세미나에 참가한 뒤, 아내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말했지요. “사랑해.” 아내는 깜짝 놀라서 다시 묻습니다. “예?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뭐 잘못 먹었어요?” 이 남자는 너무 창피했지요. 하지만 저녁에 남자가 집에 들어왔을 때,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고 합니다. 만약 남편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똑같은 일상의 삶 안에서 서로 힘들게 살 뿐이었겠지요. 바로 이렇게 용기 있는 남자의 말 한마디가 가정의 평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랑’은 용기를 함께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그 용기 있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데는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일반적인 우리들의 관습들, 별 것도 아닌 나의 체면 등등….

오늘 복음의 요셉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용기를 내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내 마리아를 받아들입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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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2.19
448 100%
세상에는 인간을 가늠하는 네 가지 척도가 있다고 합니다. 돈, 술, 여자(남자), 시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빠져들 만큼 매력적인 유혹의 대상이지만 도가 지나치면 자기 자신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것들을 조심하라는 충고를 듣기 때문에, 처음의 세 가지는 매우 경계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지막 요소인 시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큰 코를 다치지요. 왜냐하면 시간은 한 번 지나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보물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간은 돈으로 값을 치를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입니다. 돈은 모았다가도 잃고 잃었다가도 다시 모을 수 있는 것이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한 번 놓아 버린 시간은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시간은 남에게 빌리거나 저축을 해둘 수도 없습니다.

결국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매 순간 소중하게 여기면서 충실히 살아갈 때에야 후회하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하루하루를 아름다움의 시간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복음을 통해서 후회하는 시간을 줄이고, 지금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던 한 분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성모님의 남편인 요셉 성인이십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가진 마리아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다짐 뒤에 요셉 성인께서는 꿈을 꾸십니다. 그 꿈에는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은 천사의 명령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요.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율법에 맞게 파혼까지 작정한 현실적인 사람이 어떻게 꿈 한 번 꾼 것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곧바로 행동할 수 있을까요?

바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비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꿈을 통해서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변화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이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반드시 간직해야 함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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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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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님의 탄생은,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바로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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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경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은 했지만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혼자 속으로 조용히 결심합니다. 파혼하기로 말입니다. 법대로 사는 의로운 그였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히기까지 요셉 성인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요셉은 처음에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잉태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배신과 분노의 감정이 그를 휘몰아쳤을 것입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이는 그 시대에, 복수의 방법은 간단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요셉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 이릅니다. '평소에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마리아, 하느님 안에서 마리아를 사랑하기에 해치지는 말자. 이에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파혼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기를 잉태시킨 남자와 잘 살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은 여기에까지 이르렀지만, 실망과 외로움은 요셉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할 일을 다 한 요셉은 더 이상 견딜힘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껴안는 일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꿉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알려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배신감과 분노로 며칠 밤낮을 고통스럽게 지내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혀 마리아를 풀어주고자 하였지만, 실망과 허전함, 그리고 외로움으로 시달려야 했던 요셉의 아픈 마음, 이 아픈 마음이 따뜻한 햇살에 얼음이 녹듯 녹아내립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기 예수의 탄생에는 인간을 향한 요셉의 끝없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배려할 힘조차 없어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견디어야만 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좇아 들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힘을 서서히 활동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그 마음속에서 성령은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그곳에 주님의 탄생은 예비되어 있습니다.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께서 탄생하셔야 할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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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교구 홍성만 신부
  | 12.19
448 100%
1920년 미국 남부에서 출생한 존 그리핀이라는 흑인 인권 운동가가 있습니다. 그는 백인으로 태어났으며, 더군다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한 곳에서 자랐습니다. 이런 인종차별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접하면서 똑같은 흑인 역시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사람이 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흑인들은 종종 그에게 “당신이 우리의 피부 색깔로 태어나기 전에는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그와의 만남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핀은 자신의 피부를 검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약품과 염료, 방사선 등의 괴롭고 힘든 과정을 거쳐서 결국 그의 피부는 흑인들처럼 검게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흑인들만이 사는 지역으로 들어가서 흑인들이 겪는 차별을 경험하면서 그들과 똑같이 생활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많은 고난과 위험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흑인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체험하면서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헌신합니다.

결국 그리핀은 60세가 되어 피부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피부를 검게 하려고 사용했던 약품과 염료 그리고 방사선에 의한 결과였던 것이지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가장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똑같아지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던 존 그리핀의 모습에 주님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주님께서도 하늘의 자리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시지 않았습니까? 즉, 똑같은 사람이 되어 인간이 받는 고통 이상으로 많은 시련과 아픔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셉 성인을 통해서 봅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진 약혼녀 마리아를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철저하게 율법을 따르는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그 꿈에서 천사가 지시한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전 재산을 쏟아 부어서 도박하라는 꿈을 꾸고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꿈이 맞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셉 성인의 꿈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이 꿈을 따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인해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뜻이 담겨 있는 사랑이라는 것. 그 사랑으로 충만한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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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2.19
448 100%
그분의 손길이 내 인생에 닿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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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자신의 인생 안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그 전환점은 다름 아닌 "강렬한 하느님의 손길의 체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요셉에게 닿는 순간 요셉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돌아보니 제 인생 안에서도 가장 은혜로웠던 순간은 하느님 그분께서 제 인생에 개입하시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분의 실재를 생생히 느끼던 바로 그 순간의 기쁨과 환희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렇게 좋아 보이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시시하게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재물도, 명예도, 사람조차도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더군요. 진정한 내적 변화, 회개다운 회개, 새 삶, 이런 단어들은 결국 하느님과의 절실한 만남 그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셉에게 있어서도 하느님 체험의 순간은 얼마나 은혜로운 순간이었던지, 그 짧은 순간, 과거의 요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새로운 요셉이 탄생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느님 체험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마리아로 인해 요셉은 배신감과 분노로 치를 떨어야만 했습니다.

약혼녀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을 알게 된 요셉의 하루 하루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하루 하루였습니다. "마리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네가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때릴 수 있나?" 그러나 요셉의 인생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으면서 요셉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는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은 즉시 태도를 바꿉니다. 억울함, 분함, 불평불만, 아쉬움 등 인간적인 감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침묵 중에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까? 언제 우리 삶 안에서 그분의 생생한 자취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감미로운 현존에 취해 지나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번 성탄,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체험하는 기쁨의 시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느님 그분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우리 삶을 스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점화된 촛불처럼 의미와 활기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자취가 우리 삶에 각인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한 번 영적 여정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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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12.19
448 100%
벙어리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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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은둔의 생활을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수사님 한 분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냅니다. 몇 년에 한번이나 만날까 말까 하지만 수사님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조용히 그리고 주의 깊게 제 말을 들어주시고 고개를 끄덕여주시고는 그만입니다.

수사님이 몸담고 계시는 수도회의 다른 수사님들 사이에서도 그 수사님의 침묵은 유명합니다. 특히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거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수사님은 그 순간부터는 즉시 벙어리가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전혀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수도 공동체 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필요한 노력이 언어구사에 있어서의 신중함, 과묵함, 진지한 침묵, 결점을 덮어주기와도 같은 노력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제 하루의 삶을 분석해보면서 남 이야기하는데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웃들의 긍정적인 측면이나 장점을 인정해주기 보다는 이웃을 "까는"데 습관화되어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셉이 보여준 삶의 스타일은 얼마나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것인지요. 자신에게 들이닥친 엄청난 손해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침묵합니다. 침묵 중에 자신에게 다가온 사건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갑니다. 우리처럼 절대로 떠벌리는 일이 없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침묵을 사랑했던지 복음서 안에서 요셉은 거의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따를 뿐입니다. 여기에 요셉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으로 인해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서 전반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요셉의 이미지는 고지식하지만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을 명상하면서 침묵의 길을 걷던 사람입니다.

또한 요셉은 언제나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향해 명령하실 때마다 그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이고 일관된 수용 그것이 바로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요셉의 일생은 뚜렷한 이정표나 계획이 없었던 여행이었기에 고달팠고 피곤했었습니다.

하느님 언약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한 실망으로 요셉의 삶은 무척 힘겨웠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성소여정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언약이 보다 가시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음으로 인해 답답해했고 지루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기대와 그분께 의탁하는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걷기 성가신 캄캄한 밤길을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길 떠났던 여행길이 바로 요셉의 길이었습니다.

"침묵을 사랑하십시오.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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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12.19
448 100%
내 삶의 모든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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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온 세계를 뒤흔드는 로마 제국의 귀족 처녀도, 세력가 유다 집안도 아닌, 식민지 유다 산골지방의 처녀에게 당신 아드님을 맡기십니다.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난 아이를 받아줄 사람 또한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의로운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셨습니다. 그 아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메시아로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자각, 그 현존에 대한 끊임없는 의식입니다.

성인들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의식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향하게 됩니다. 무언가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도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은 온통 그분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힘든 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신앙의 길은 언제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아가려 노력하며 나의 모든 순간에 그분을 초대하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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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영숙 수녀(사랑의 씨튼 수녀회)
  | 12.19
448 100%
요셉은 의로운 사람 (마태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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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이라는 이름이 여섯 번이나 나온다. 요셉이란 이름은 무슨 뜻인가? 요셉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보태 주시다. 하느님께서 얹어주시다. 하느님께서 덧붙이시다."라는 뜻이다. 요셉이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그런 은총을 덧붙여 주셨기 때문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같이 살기 전에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요셉의 마음이었다.

오늘 복음은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라고 말하였다. 만일 요셉이 자기의 생각대로 마리아와 파혼하였다면 예수님의 양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라고 말해주는 것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요셉이 자기 생각대로 파혼을 하였다면 그는 절대로 예수의 양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예수의 양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천사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고 또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고 그러한 당신의 계획을 요셉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알려주어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던 그의 마음을 바꾸도록 은총을 덧붙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셉이 위대한 점은 바로 하느님이 그에게 내려주시는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요셉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요셉은 절대로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없었다.
요셉을 통하여 이루신 모든 일은 요셉이 이룬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루신 일이다. 즉 하느님이 요셉에게 덧붙여주신 것이다. 하느님이 요셉에게 얹어주신 것이다. 요셉은 다만 하느님이 덧붙여주시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뿐이다. 하느님이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가 결국은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천사가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고 하였고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라고 하였다. 요셉은 천사가 "맞아들여라."고 말한 대로 "맞아들였다." 즉 요셉은 하느님이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맞아들인 사람"이다. 은혜를 은혜로 맞아들인 것이요,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맞아들인 것이요, 파혼하기로 자기 생각을 굳혔었지만 천사가 "맞아들여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천사의 말을 맞아들인 사람이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붕어 빵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밖에 없는 세계 유일한 존재로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닮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서하느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은 아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가꾸어야 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힘으로만 또는 나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이 덧붙여질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형성되고 그렇게 되어간다. 나쁜 생각을 하게 되면 나쁜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고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만들어다.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고 말씀하셨다. 즉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려면 그리고 하느님을 닮아 가는 사람으로 되려면 빵으로만 불가능하다. 빵과 더불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다. 나의 생각이 이미 굳혀졌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나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생각한 것이 하느님의 말씀과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생각을 고집한다면 나는 나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만 머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하느님의 말씀을 맞아드린다면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으로 넘어가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질 것이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은총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요셉에게 은총을 덧붙여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새로운 은총을 덧붙여 주신다. 매 순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시간이다.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매일 나의 모습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요한 세례자가 말씀하신 대로 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서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하느님은 내 안에서 더 커지셔야 한다. 나의 생각은 점점 더 작아지고 하느님의 생각은 더 커져야 한다.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새로워지고 날로 더 큰 사람으로 자라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은총은 선물이기 때문에 나는 그 선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하느님께서 매 수간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인 만큼 나는 성숙할 것이고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갈라 6, 1)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갈라 6, 8)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고린 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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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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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넘어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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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 주님 계시니 아쉬움 없네. 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 주님 안에서.” 떼제 성가 “Nada te turbe”를 번역한 것인데, 대 데레사 성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녀께서는 동료들과 함께 가르멜 수도원을 쇄신하고 개혁하면서 아주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때 성녀는 동료 수도자들을 향해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변화와 쇄신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 고민하고 있는 요셉에게 하느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신앙을 촉구하십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고,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으나 아직까지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얼마나 인간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인간적인 것에서 신앙의 세계로 뛰어오릅니다.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신앙으로만 극복됩니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뛰어내리시는 자비로운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그분을 향해 우리가 뛰어올라야 하는 신앙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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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 고난회 방교원 신부
  | 12.19
448 100%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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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 대목 외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이며 노동자들의 수호자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이 시대에는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 하느님은 어떤 사람을 의롭게 보시는가?’`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아닌가?’`하는 질문도 해본다. 세속적으로 의로운 사람과 영적으로 의로운 사람을 나누어 볼 수 있으나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보시는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르신 새로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현대의 의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나를 조용히 되돌아보면 나는 의로운 사람은 못된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잊고 세상살이에 허덕이니 어찌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노력하면 조금은 의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요셉 성인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2006년 12월에 국내에 소개된 영화 <네티비티 스토리>의 한 장면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호적 정리를 위해 베들레험으로 가는 장면이다. 기획자의 말을 따르면 영화는 철저히 고증을 거쳐 최대한 2000년 전 생활 모습을 재현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요셉 성인은 나귀에 성모님을 태우고 황량한 황무지 길을 재촉하여 느릿느릿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집이 있으면 그곳에서, 집이 없으면 노숙을 했다. 냇가에서 노숙할 때 성인은 성모님과 식사하면서 말씀하셨다. “마리아! 당신에게서 태어날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데…. 내가 그분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 한마디는 성인이 참으로 겸손하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가득함을 엿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지금은 두 아들이 모두 장성했으나 아내가 첫아들을 가졌을 때 나는 아들이 태어나면 어떻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인지 걱정하지 못했던 같다. 성경 말씀이 나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제라도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내 생활 속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요셉 성인과 같이 말없이 성가정을 지키고 성모님과 예수님을 키우신 분이시니 가히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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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수(한양대학교 병원)
  | 12.19
448 100%
오늘 밤 뉴스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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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신문·방송의 뉴스를 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이 더 많습니다. 누가 누구를 고소하고 고발하고 누구는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잘못했고, 내 탓은 없고 네 탓만 있는, 서로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잉태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에게도 정혼녀가 임신한 사실은 작은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장 18­-19절에서 요셉은 비록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으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20절 이후를 보면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씀하신 내용을 받아들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는 마리아에 대한 믿음과 주님의 천사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가졌던 마리아에 대한 신뢰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지금 우리의 마음에 겨자씨만큼이라도 있다면 오늘 밤 뉴스에서는 좋은 일만 보도될 것 같습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요셉의 믿음과 신뢰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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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희(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인연구소)
  | 12.19
448 100%
군말 없이 길을 떠나는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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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관구장 교육차 로마에 와있습니다. 어제는 멕시코에서 온 신부님으로부터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정말 사랑하는 한 멋진 선생님, 프란치스코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선생님은 오랜 세월 멕시코의 한 고등학교에서 재직하면서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낸 은퇴를 앞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주 멋진 신사가 교무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교무실에 앉아있던 젊은 선생님들은 즉시 그가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는 크게 성공한 졸업생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떻게 오셨냐는 물음에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담임선생님이셨던 프란치스코 선생님을 만나 뵈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종소리가 울리고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서는 정말이지 감동적인 사제지간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크게 성공한 제자는 이제 노인이 된 프란치스코 선생님에게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선생님, 그때 정말 선생님으로부터 너무나도 소중하고 은혜로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평생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만면에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프란치스코 선생님이 제자에게 묻습니다. “그래, 내게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데? 내가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던가?”

성공한 제자는 그게 아니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데 프란치스코 선생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선생님께 다가갔더니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셨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몹시 당황했던 저는 그제야 제 오른쪽 신발 끈이 풀려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주 정성껏 제 신발 끈을 묶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자 이제 됐다, 빨리 가서 재미있게 놀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많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마치 다정한 아버지처럼 친근한 행동으로, 따뜻한 미소로, 모범과 겸손으로 저희를 가르치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십년 세월 동안 언제나 선생님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프란치스코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 전해드리려고 저는 독일에서 멕시코까지 날아왔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우리가 주목해야할 또 한분의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양부 요셉 성인입니다. 그분의 일생도 마리아 못지않게 특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으로 인해 쫄딱 망한 인생입니다.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와 함께 평범하지만 단란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었던 요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의 날벼락입니까? 철석같이 믿었던 약혼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덜컥 아이를 가졌습니다. 요셉 입장에서 보면 속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마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할 수 없이 크게 마음먹고 남모르게 파혼을 결심합니다. 이런 요셉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더 이상 요셉은 군말이 없습니다. 단 한마디 불평도 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하느님께서 펼쳐주시는 길을 따라 침묵 속에, 기도 속에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섰습니다. 길을 떠나라시면 떠났습니다. 이제 정붙여 살만했는데 또 다시 이삿짐을 싸라니 아무 말 없이 보따리를 쌌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밤길이었지만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그저 묵묵히 순종하며 매일 길을 떠난 요셉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이 완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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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12.19
448 100%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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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탄생은 이렇듯 약속으로 시작됩니다. 빛나는 탄생의 약속 또한 말씀을 듣는 들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였기에 서로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성탄에 임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다림의 자세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목숨을 건 한 여인을 목숨을 걸고 받아들이는 순명의 요셉성인에게서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아름다운 약속을 만납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가장 충실한 보호자가 되십니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함께할 수 있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고 함께 하였기에 맺을 수도 있었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이 깊어가는 대림시기가 요셉성인에게서 참된 사람의 모습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작만이 아니라 끝까지 충실한 사람의 삶 안에 예수님의 탄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탄이기를기도드립니다. 입이 아니라온 삶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그런 사람이기를 또한 기도드립니다. 요셉성인의 삶안에서 걸어가야 할 길을 만나는 은총의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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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12.19
448 100%
당신은 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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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마리아와 다르게 꿈에서 천사의 방문을 받는다.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요셉은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기에 요셉은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배신감 사이에서 갈등하며 ‘하느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고민 끝에 요셉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결정을 보시고 그의 무의식인 ‘꿈의 자리’에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씀하신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꿈을 통해 무의식을 잘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두려움과 참된 갈망이 있다. 요셉은 꿈에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참된 갈망을 천사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카를 융C.Jung에 따르면 꿈이란 참된 자기self 가 갈등하고 있는 자아ego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꿈은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성경 말씀이 요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자신의 두려움과 배신감이 희망과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을 체험하며 하느님의 뜻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의 몰이해와 반대가 있더라도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용기와 힘과 확신을 갖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해서도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다. 우리는 이 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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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틀담수녀회 심종미 수녀
  | 12.19
448 100%
오늘 복음은 요셉이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음을 들려줍니다. 요셉은 약혼자의 임신에서 세상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불명예가 아니라, 메시아 약속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그 신비를 보았습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익히는 때가 대림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현대 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걸작인 『대성당』이라는 작품집이 있습니다. 그의 단편 소설 열두 편을 모은 것인데, 마지막 단편에는 뜻하지 않게 ‘시각 장애인’에게서 ‘보는 법’을 배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삶에 지친 나머지 활기를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아내의 손님인 한 시각 장애인이 방문합니다. 이 손님맞이는 그에게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의 장면을 하나하나 얘기해 주어야 했습니다. 시각 장애인은 대성당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 그는 성당의 외형을 열심히 설명하다가 포기하며 말합니다. “어마어마해요. 돌로 만들었죠. 때로는 대리석으로도요.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거죠. 그 옛날에는 모든 삶에서 하느님이 중요한 부분이었지요.”

시각 장애인이 갑자기 ‘그게 어떤 형태로든’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지 묻자 그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뭘 믿는 건 없다고 봐야겠죠. 아무것도 안 믿어요. 그래서 가끔은 힘듭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성당이라고 해서 나한테는 뭐 특별한 게 아니거든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러자 시각 장애인은 그가 지금 본 대성당을 ‘눈을 감고’ 함께 그려 보자고 합니다. 그의 손 위에 시각 장애인의 손이 얹히고 둘은 함께 대성당을 그립니다.

“‘그럼 계속 눈은 감고.’ 시각 장애인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중략)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중략) ‘어때?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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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미사 2014년 12월 18일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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