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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전/원주] 은혜로운 때에 그 넓으신 자비로 저를 도우소서
조회수 | 64
작성일 | 21.03.29
[서울] 은혜로운 때에 그 넓으신 자비로 저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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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내내 복음 말씀 중에 등장하지 않다가 성주간이 되면 마치 주인공처럼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유다입니다.
유다는 이 성주간, 암흑의 시간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등장하여 놀라운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 됩니다.

어둠의 세력이 중심에 서는 이런 일들은 오늘 성경에서 뿐만이 아니라 나라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가 혼탁해지고 사회가 부정직해지면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서 활개를 치고 다니지요.

이런 모습은 나라나 사회뿐만이 아니라 성당에서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성당 공동체가 복음적이지 않으면 남을 헐뜯고 음해 하는 사람들이 흐름을 이끌어 가고 그 때문에 복음적인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우리는 해마다 성주간이 되면 유다의 어둠을 만나게 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두고 “그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26장 24절)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 유다는 태생이 악한 사람으로
태어날 때부터 어둠의 세력 그 자체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유다는 악의 모습이 아니라
유혹에 빠진 자의 모습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유다 역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집도 절도 없는 스승이라는 것을 알았을 터이고,
재산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미래를 보장해 주는 스승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터이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는
참으로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가족도 버리고 일신상의 안위와 쾌락도 버리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열 두 제자가 모두 그랬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모습,
또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
고통받는 사람들의 위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환호하는 그 모습과 말씀의 놀라운 권위를 보고 함께 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존경과 흠숭을 드리며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 가는 믿음의 과정을 밟아 갔던 것입니다.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하지 못하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다는 특히 재정 담당의 직분을 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살림 돈을 관리하고 있었지요.
돈 관리는 아무에게나 시키지 않습니다.
믿을만하고 머리가 좋고 현명한 사람에게 맡기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유다를 신뢰하셨으며 유다 또한 나름대로 현명하고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능숙함은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유혹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돈을 관리하면서 돈의 편리함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면서 유다는 점차 재물의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양심을 속여가며 작은 돈으로 시작한 욕심은 있는 돈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내 재물에 대한 집착과 갈증에 시달리게 만들었지요.
동시에 유다는 스승인 예수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돈에 욕심이 생기거나 그릇된 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 외의 다른 것은 모두 다 불만투성이로 바뀌고 마는 것이 사람 마음의 속성입니다.

급기야 유다는 예수님을 판단하기 시작하고 불만은 배신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유다는 배반의 실마리를 스스로 합리화하기 시작하면서 한탕할 기회만 엿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이제 돈이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이제는 모든 것의 중심이 재물이 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결국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 넘기고 마는 멸망의 길로 치달아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가 유다 같이 탐욕적이고 이중인격자 같은 사람에게만 드러나는 모습인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유다 같은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처음 영세할 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모든 이웃을 깨끗한 마음으로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때는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을 것 같고,
또 교회 안에서 단체장이나 반장 등 봉사 직분을 맡게 되면
거기에 충실하려고 기도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지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타성에 젖기 시작하고
하나, 둘 한눈을 팔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존경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공경이나 두려움이 사라지면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적인 욕심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명예를 우선시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며 배척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서서히 하느님 중심의 삶이 자기 중심의 삶으로 비껴가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바리사이들처럼 내 편리대로 하느님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에 대한 마음이 변질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세상의 욕망에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우상인 재물을 섬기게 되지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세상 욕심이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육체적인 향락이고, 또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재물에 대한 욕심인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물질 숭배자의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처음 세례를 받을 때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얻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이해지고 느슨해지면서 계속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고 머뭇거리다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는 모습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도 좋고 세상도 좋은 모습으로 구분 없이 흐릿하게 살아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하느님보다는 세상과 재물을 따르는 모습으로 변질되기 십상입니다.

돈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도 많고,
부모나 형제, 자식 간에도 그 중심이 하느님이 아니라 재물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가면 신자면서도 갈증과 혼란을 겪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만족할 줄 모르고 늘상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으며 이웃에 대해서 쉽게 말하며 상처를 주고 맙니다.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이들과 똑같은 갈증에 시달리는 것이지요. 그들은 더 많은 소비를 하게 되고 눈에 보이는 외형에 더욱 신경을 씁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십니까?

아니지요.
지금 우리들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풍요로운 시대를 살지만 그 어떤 시대보다도 갈증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빠지며 서로 싸우고 불화하는 등 말 그대로 지옥을 방불케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재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마귀와도 같은 유혹자로서의 역할만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재물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드는 계기를 얼마든지 마련해 줍니다. 이 때 분명한 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우선이지 재물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미국 사회를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표현합니다.
한때 천민 자본주의의의 극치를 이루던 미국의 자본주의는 어느 순간 자선 사업과 기부 문화로 흐름이 바뀌면서 세상의 자본주의의 흐름을 바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카네기와 록펠러입니다.
요즘은 빌 게이츠 등이 그 대를 이어가고 있지요.

록펠러 하면 떠오르는 말은
석유왕, 세계 최고의 부자, 자선가 등입니다. 흔히 미국의 3대 재벌로 록펠러가(家), 뒤풍가(家), 엘런가(家)를 꼽는데 그 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 록펠러 가문입니다.

록펠러는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지요.

첫째는 자선의 기록입니다.
그는 록펠러 재단, 일반교육 재단, 록펠러 의학연구소 등을 설립하여 남을 위해 많은 재산을 베풀었습니다.

둘째는 인생역전의 기록입니다.
그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첫 여인에게 “가능성이 없는 가난뱅이”로 몰려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방을 자극제로 삼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재벌로 우뚝 섰지요.

셋째는 장수의 비결입니다.
1839년에 태어난 록펠러는 98세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1937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을 감을 때까지 치아와 위장은 여전히 건강했다고 합니다.

록펠러가 이렇게 3대 기적을 창출 해낸 원동력은 다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감사의 마음이었지요.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비방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경건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지요.

셋째로 꼽는 것은 성경 묵상입니다.
평생 성경과 함께 했던 록펠러는 아흔 살이 넘어 시력이 약해지자 사람을 고용해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귀로 하느님 말씀을 들으며 마음의 평화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지요.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재물을 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부리는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게 되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부모 형제와도 멀어지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재물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잘 활용한다면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사람들과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이기적으로 재물을 사용하면 나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지혜롭게 사용하면 나도 살고 이웃도 모두 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매년 성주간이면 최고의 악인으로 등장하는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느님과 이웃보다도 재물이 앞서는 삶을 살다가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우리 시대가 바로 이와 닮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재물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이지요.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고 이웃과 함께 잘 살아가는 바탕이 되어야 하는 재물과 재능이 오히려 하느님을 멀리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성주간 수요일인 오늘 복음은 특히 유다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합니다.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 삶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나에게도 유다와 같이 재물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삶이 하느님과 사람보다는 재물에 기울어져 있다면 유다의 모습이 머지 않아 드러날 것이고,
반대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이웃 사람이 우선이며 재물은 다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재물이 더 풍요롭고 평화스러운 여러분의 삶을 만들어 주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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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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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나는 다르다는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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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부 왜 그래?
누가 말해주어야 하는 것 아냐?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지.”

신부들은 모이면 가끔 옳고 정당하다는 걱정들을 합니다.
자기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고
들리는 이야기를 목자로서,
또 교회를 아끼는 이로서 비판합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철저한 타인이 되어 비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알고 있는 죄와 허물들을 고치라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은 순수하고 성실하다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뛰어나다는 사람들,
신심가라 불리는 사람들,
소위 열심하다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자기도 깨닫지 못하는 교만과 이기심을 봅니다.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위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신심과 기도를 이용하여 견고한 ‘자기’를 쌓아갑니다.

이기심 때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
봉사하고, 자신을 바칩니다.

그 거짓은 곧 드러나지만
그 길은 얼마나 위험하게 영혼을 좀먹는지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최소한 침묵을 지키세요.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두세요.
그리고 위안과 격려의 길을 포기하세요.

‘나는 다르다’는 교만, 모든 악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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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김찬진 신부
  |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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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저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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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의 사월은 참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라일락 향기가 창가에 눅눅히 젖어 들고,
고요함 속에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밤을 더욱 깊고 그윽하게 만들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하느님은 세상을 온통 병아리 연두빛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돌아다보면 힘겹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느지막이 들어간 내게 가장 큰 걸림돌이요
십자가는 뜻밖에도 동료 신학생들에게 자존심을 짓밟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사소한 말에도 나는 상처를 받았다.

그해 사월은 내게 잔인한 달이었다.
이해받지 못한 분노와 미움이
그리고 구겨진 자존심이 뒤엉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에는 매일 습관처럼 성당을 찾았다.
묵상을 한 것이 아니라 미움을 삭이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주님! 저는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조그마한 자존심 하나인데
이것마저 빼앗으려 하시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사월이 다 가도록 주님께서는 아무런 답변도 없으셨다.
매일 물끄러미 성당에 앉아 아무 생각도 없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길게 늘어진 현란한 봄 햇살과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라한 모습으로 졸고 있던 내 영혼 깊은 속에서

“네가 양보할 수 없다고 한 조그만 자존심과 이기심이 네가 버렸다고 말한 그 모든 것보다 더 큰 것이다”라는 말이 울려 퍼졌다.

사월의 길고 지루했던 싸움이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순식간에 뒤집기 한판으로 끝났다.

주님수난 성지주일은 일 년 중 복음을 두 번 읽는 특별한 전례를 지낸다.

성당 밖에서 평화의 행렬 전에 읽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찬양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야말로 최고의 환영식을 베풀어 준 셈이다.

그런데 성당 안에 들어와서 읽는 복음은
정반대로 처절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친다. 방금 찬미의 노래를 부르던 입으로, 이제는 거침없이 욕설과 저주의 고함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화나게 하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매년 같은 수난 복음을 반복하여 읽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하게, 그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음을 되새기자는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게다.

자기 이기심의 잣대로 형제들을 재고 판단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미움과 분노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미움과 분노의 끄트머리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치며 단죄의 칼을 휘두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스가리옷 유다처럼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예수님은 십자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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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곽명호 신부
  |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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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2일은 조선은 일본에 의해서 ‘합방’되었습니다.
어느덧 111년이 지났습니다.
‘한일합방, 경술국치’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은 일제 강점기를 사셨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국제적인 흐름을 읽지 못하고, 근대화의 길을 걷지 못했던 조선의 정부의 책임입니다.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에 대한 의존입니다. 자주의 길을 걷지 못하는 나라는 약소국의 비애를 겪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침략입니다. 이미 일본은 자국의 힘이 강해지면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임진왜란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명치유신을 통해서 힘을 키운 일본은 조선을 향해서 침략의 야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36년 동안 일제 강점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민족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통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였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돌아보면서
‘친일파(親日派)’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친일파는 일본에 의지해서 일신의 양명을 도모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친일파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족을 괴롭히고, 팔아먹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친일파는 ‘내선일체’라는 말을 입에 달며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처럼 생각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친일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었습니다.
친(親)은 부친(父親), 모친(母親), 양친(養親), 선친(先親)과 같이 부모에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친일파는 일본을 부모로 섬기면서 사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그는 논문에서 조선의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계약서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직도 생존해 계신 위안부 어르신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학술적으로 근거가 없는 허위주장입니다. 저명한 학자들은 램지어 교수의 논문에 규탄성명을 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일부 교수들은 램지어 교수의 논문을 지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지 7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친일파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고통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면 주님께서 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입니다.
유다는 바리사이파를 부모처럼 생각했습니다.
대사제를 부모처럼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를 부모처럼 생각했습니다.
친바리사이파, 친대사제파, 친로마파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라고 하셨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숨어버린 제자들입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죽는 것보다 필요하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던 대사제 가야파입니다.
무고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던 빌라도입니다.
시류에 편승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군중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땀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악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비우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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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1년 3월 31일
  |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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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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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가 이어집니다.
의인이나 예언자는 유일하게 버팀이 되어 주시고 의지가 되어 주시는 하느님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의로움을 증명해주시기를 호소합니다.

<수난 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도 비록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의 처지로 수모를 겪고 매를 맞으며 수염을 뜯기더라도 얼굴을 돌리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용사처럼 버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수난을 겪는 의인이 외치는 소리는 시편 저자와 같습니다.
“당신 때문에 제가 모욕을 당하고 제 얼굴이 수치로 뒤덮였나이다. 저는 제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었고, 제 친형제들에게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집을 향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욕하는 자들의 욕이 저에게 떨어졌나이다.”(시편 6장 8절-10절)

예언자의 마지막 보루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당장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억울하게 상황이 전개된다고 해도 차돌처럼 냉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해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종’ 셋째 노래를 들려주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당당한 주님의 종을 양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야 예언서 50장 5절-6절)

그리고 그는 이어서 어느 누구의 심판도 단죄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외칩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의지이며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이사야 예언서 50장 9절)

이웃의 비난과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말을 들을 때 우리도 끄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주님으로부터 배웁니다.

또한 예언자가 전하는 말씀을 일상생활,
특히 억울한 일을 겪으면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우리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야 예언서 50장 7절)

주님 제자 중에 하나인 유다 이스카리옷은1)
주저하지 않고 수석 사제들에게 스승을 은전 삼십 닢을 받고 그들에게 스승을 잡는데 협조해줄 것을 약속합니다.

복음서도 유다스가 무엇이 아쉬워서,
또는 어떤 생각이 있어서 스승을 팔아 넘겼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예루살렘 도성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시는 전 과정을 상세히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던 주님께서 제자 중에 하나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이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오 복음 26장 22절)라고 스승께 질문합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시지요.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오 복음 26장 23절)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26장 24절)

유다도 스승님에게 와서 다른 제자들처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묻습니다.2)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오 복음 26장 25절)
제자들은 예기치 못한 그 말씀에 당황해하며
제각기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질문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을 둘러보며 반성하는 순간을 만나게 해줍니다.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때로 진실하지 못한 때,
신앙인으로 나서지 않는 비겁한 순간에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질문이 우리 자신을 향하는 화살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접시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빵을 나누던 자가 바로 주님을 팔아넘기다니 말이나 될까요?
우리 흔히 그런 말을 들을 때가 있지요?

‘사람이 맨 정신으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뭐가 씌워도 단단히 씌었지...’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복음은 그 세력이 마귀의 힘이라고 설명합니다.(요한 복음 13장 27절)

주님을 사랑하면 따르는 우리에게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해되지 않는 제자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리나 위치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주님을 매일 뵙고 그분의 말씀과 기적을 바라보았던 그분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았고 또 공동체에서 봉사의 직책을 맡았다고 자칫 잘못하면 구원의 조건을 채웠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작은 선행이라도 심판에서 기억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마태오 복음 25장 40절. 45절)이 있지만 이미 받은 주님의 선물을 성실히 지켜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은 기쁜 소식을 실천하며 끝까지 인내하고 간직하는 이에게 돌아간다는 가르침을 수난을 앞둔 주님의 두 제자의 모습에서 배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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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 이스카리옷에 대한 복음서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모습을 보고 삼백 데나리온 어치의 값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유다의 생각에 요한 복음서는 설명을 붙인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요한 복음 12장 6절)

유다가 수석 사제들의 은돈 서른 닢을 성전에 내던지고 나서 죽자, 수석사제들은 그 돈을 거두면서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 밭을 사서 이방인들의 묘지로 쓰기로 한다. (마태오 복음 27장 5절-7절) 그런데 루카가 썼다는 사도행전에서는 조금 다르게 설명한다. ‘유다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와 함께 이 직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부정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졌습니다.”(사도행전 1장 17절-18절) 복음사가는 열두 사도의 명단을 전하며 맨 끝에 유다의 이름을 넣으며 부정적 설명을 한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태오 복음 10장 3절 / 마르코 복음 3장 19절) 루카는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 복음 6장 16절)

2)

유다는 예수님을 떠보려고 질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스승을 넘겨 줄 때에도 그분에게 입을 맞춘다.(마태오 복음 26장 50절)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면서 수석 사제들에게 받았던 은전을 돌려주면서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마태오 복음 27장 4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돈을 받는 것을 거절하자, 성전 안에다 그 은돈을내던지고 물러가서 죽음의 길을 택한다. 1970년에 Andrew Lloyd Webber가 작곡해서 1971년 미국브로드웨에 공연한 록 뮤치컬의 이작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탄을 받으면서 전 세계로 번졌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번 공연을 했다.

그 내용은 우리가 따르지 못하지만 유다 이스카리옷을 새로운 각도에서바라보았다는 의도를 볼 필요는 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인간적인 혁명투사로 보았으나 그가 헛된 메시아상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가려는 것을 막으려 한다. 1장 대사 중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Jesus, 우린 여길 지켜야 해. 우린 이겨내고 살아야 해. 당신 선택 멈추고, 다시 한번 생각해봐. 결국 빼앗긴 우리의 땅, 짓밟힌 우리를 저기 침략자들과 당신의 목숨 건 거래 이 선택은 너무 위험해 너무 위험해,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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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신부
2021년 3월 31일
  |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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