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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전주/광주/마산/안동] 사랑의 불꽃
조회수 | 62
작성일 | 21.03.30
[청주] 사랑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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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남을 사랑하는 삶에 집중했던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더욱 간절히 사랑할 거리를 찾고, 평소에 탐욕스럽게 산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탐욕의 눈망울을 굴리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만약 살 날이 하루만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게 될 것 같습니까?

어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만약 3일밖에 살 수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계획을 말했습니다.
“저는 작년에 싸워 멀어진 친구에게 사과를 하겠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여행을 가겠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겠습니다” 등등.
그때 교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바로 실천하세요.”
우리의 삶은 매일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당신의 참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몸소 허리에 띠를 두르고 발을 씻겨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는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할 때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랑을 불꽃처럼 타 올려 사랑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실천합시다.
가장 낮은 자세로 섬기며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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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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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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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종결지었던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교황청 평신도위원회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현대인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습니다. 스승의 말을 듣는 것은 스승이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사제가 되어 강론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실천입니다.

입으로는 교우들에게 이러해야 합니다,
저러해야 합니다 하면서 정작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 그것처럼 창피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강론이 어려운 것입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당신의 생활과 행동 자체가 설교가 되도록 하십시오.”하고 말씀했습니다.

삶 전체가 설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기에 입은 다물고 행동으로 말해야 합니다.

이 모든 말은 일맥상통한 이야기들입니다.
이러한 말들이 있기에 앞서 가장 먼저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에 있어 모범이 되어주셨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모든 이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영적 삶에 더없이 좋은 이때 내 삶이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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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진병섭 신부
  |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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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용서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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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피조물중의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타락해서 가장 추하게 된 인간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에게 맡긴 사람들을 섬기라고 명하시었습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곧 섬기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주님만찬 성 목요일에 예수님의 대 사제직을 이어서 사는 사람으로서 꼭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사제로서의 섬기는 삶의 연속이건만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오히려 신자들에게 상처주고 교만한 말고 행동을 한 것들에 용서를 청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사제들의 언행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고 또 받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깊이 사죄드립니다.

저도 똑 같은 사제로 역시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강론 때 겸손하게 강론하지 않고 마치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강론을 했고, 신자들의 상처를 마음깊이 이해하고 달래기보다 나의 인간적 말재주로 신자들의 아픔을 헤아렸습니다.

또한 고해성사 때
신자들의 세심한 감정과 아픔들을 함께하지 않고 마치 엄격한 심판자처럼 그렇게 대한 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깊이 용서를 청합니다.

또 사제로써 마땅히 지켜야 할 크고 작은 규칙들을 가볍게 생각했고 저의 언어습관이 세상 사람들처럼 똑 같은 것으로서 영적인 상처도 주었고 저의 행동들도 다른 이들의 악습을 정당화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청합니다.

특별히 저와 만났던 모든 사람들께도 저의 언행으로 상처를 받았던 분들께 용서를 청하고 사제의 한 사람으로서 사제들로부터 여러분들이 받은 상처와 분노와 실망에 대해서 용서를 청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또한 사람들에 대한 평판을 의식에 해야 할 말을 못함으로써 신자들의 영적인 선익을 추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도 용서를 청합니다.

여러분의 너그러움으로 저는 오늘 새롭게 태어남으로서 예수님께 교회에 충성을 다하고 진정 섬기는 사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신자들을 저의 주인으로 섬기는 사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서로 화해하고 하나 된 이 마음으로 오늘의 만찬미사를 거룩하게 봉헌합시다.

은총의 최절정인 성목요일 전례에 함께 할 수 있음에 우선적으로 감사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모든 결실을 가져오듯이 오늘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온전히 당신을 재물로 봉헌합니다.

당신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우리는 그 살과 피로써 죄보다 큰 은총,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오늘의 만찬을 통해 복된 죄인이 된 우리를 부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셨으니 우리도 이제 서로 먹이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먹힌다는 것은 늘 손해 보는 것이고 모든 사람의 끝자리에 나를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게 오는 인간적 위로와 칭찬을 쓰레기처럼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선 겸손이시므로 겸손한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먹히는 존재가 됩시다.
우리의 주님은 이 세상에서 고통만 받고 살았으니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당연히 고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고통을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먹히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부러워합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 이것만 부러워해야 하고 기뻐할 것이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안락이 적을수록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이 클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안락이 클수록 하늘에서 받을 상급은 적을 것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이 기쁨으로 곡식 단 거두게 됩니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만찬에 참석한 이들은 더 이상 아쉬울 것도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로서 우리는 예수님과 뗄 수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은총입니다.
사랑을 서로를 닮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 되게 합니다.

나는 예수님 것이고 예수님은 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곧 그 수난도 함께하고 부활도 함께 할 것입니다.
사실 오늘의 만찬과 내일의 수난 그리고 부활은 절대적으로 하나입니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모두 빠진 것입니다.
삼위일체하느님의 관계처럼 그렇게 하나입니다.

성삼일은 우주가 새롭게 정화된 날이고 하늘이 열린 날이고 우리가 승리한 날입니다.

사랑의 절정이 완성되어 내가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이 새로움으로 나를 바라보면 어떠한 고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사랑 때문에 고통을 더 원할 것입니다.
내일 굶어죽는다 해도 걱정하지 않고 감사를 올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시작되는 성삼일을 통해서
걱정에서 해방되고
내 죄에서 해방되고
우리의 상처에서 해방됩니다.
나는 승리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부러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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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연준 신부
  |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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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 (요한 복음 13장 1절-15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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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신 뒤에 제자들이 다투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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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복음 22장 24절-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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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는 성체성사 제정 직후에 제자들이 서열 문제로, 또는 자리 문제로 다투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다툰 일은 최후의 만찬 때가 아니라 예루살렘 입성 전에 예리코 근처에서 있었던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0장 24절-28절 / 마르코 복음 10장 41절-45절).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성체성사의 정신은 바로 ‘섬김’의 정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루카 복음서 저자가 의도적으로 그 일을 최후의 만찬 때에 있었던 일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섬김’에 관한 가르침을 성체성사에 연결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제자들이 다툰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배경 상황 같은 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아니라,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신 분입니다. 그 ‘내주심’은 곧 ‘섬김’이고 ‘사랑’입니다. 성체성사는 그 사랑과 가르침이 식사의 모습으로 집약된 성사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것처럼 그렇게 신앙인들도 서로 섬기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받아먹는 일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남을 섬기고 사랑하겠다는 다짐과 약속이 들어 있는 일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이 다투었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과 ‘섬김’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와 세족례는 ‘섬김’과 ‘사랑’이라는 가르침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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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복음 13장 12절-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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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진리이고, 가르침이다.”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준 일은,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섬김’과‘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가르쳐 준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과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3절-5절).”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여기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왜 그런가?”라고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만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을 보면, 이 말씀 뒤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마르코 복음 9장 37절 / 루카 복음 9장 48절).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일이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이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행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은 곧 남을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실천하지 않는 ‘낮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남을 참으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자신을 낮추기만 하고 ‘섬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비굴함’입니다.

또 만일에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위선’입니다.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일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인 일입니다.

발을 씻어 주는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상징하는 ‘섬김’과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 년에 한 번 세족례를 거행한 것으로 그치고, 더 이상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형식적인 일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은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성체를 받아먹었다면 생활 속에서 성체성사의 정신을 실천해야 하고,

“주님은 나의 발을 씻어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도 생활 속에서 늘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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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19년 4월 18일
  | 03.30
468 71.2%
[전주] 섬김과 봉사의 새 계약인 세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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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명을 수행하시기 전에 과월절 의식을 겸한 마지막 만찬을 하신다.

만찬에 함께 한 이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12명의 제자들이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예수님을 지극히 공경하며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나 마르타 자매도 이 자리에는 함께 하지 않고, 오직 12명의 제자들만이 함께 한다.

이 자리는 그만큼 중요한 공적 자리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새 계약을 맺으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12제자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며,
나아가 영적 이스라엘인 하느님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백성 전체와 함께 파스카 예식을 행하신 것이며, 이를 통하여 하느님 백성 전체와 새 계약을 맺으신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로는 오늘 독서에서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1고린토 1서 11장 24절-25절)라고 전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으로써 시작하신다.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제자들을 섬기시어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

발을 씻겨 주는 것은 섬김과 봉사가 담긴 사랑의 행위이다.
발을 씻기는 행위 안에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담겨져 있고, 계약의 본질이 담겨져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오 복음 13장 34절)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곧 사람들을 섬기며 당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임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으니 이는 곧 하느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또한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하느님은 우리를 섬기고 봉사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심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섬기고 희생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지없이 사랑하시기에 그만큼 우리를 섬기고 봉사하시길 기뻐하신다.

사랑 안에는 기쁨과 행복이 있고, 사랑은 희생과 봉사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봉사하는 줄로 생각하지만, 실상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고 봉사하신다.

사랑 안에는 희생과 봉사가 담겨져 있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봉사는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기쁨이며 행복이다.
사랑이 큰 만큼 희생과 봉사 또한 크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며 희생하면서 기뻐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시고, 이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복음 13장 14절) 하고 말씀하신다.

즉 서로 발을 씻어줌으로써 서로 섬기며 봉사하고,
그럼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찾도록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섬김과 봉사를 받음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하지만, 희생과 봉사 안에 기쁨과 행복이 있고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도록 주님께서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최후 만찬을 시작하시면서 당신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 주심으로써 제자들과 맺을 새 계약이 섬김과 봉사의 계약임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섬김과 봉사는 결코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종이 해야 하는 일도 아님을 보여 주셨다.

섬김과 봉사는 곧 사랑의 표현이며,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 13장 34절)는 새 계명임을 직접 보여 주셨다.

오늘 주님 만찬 미사 중에 2,000년 전에 주님께서 행하셨던 세족례를 거행하면서,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 봉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우리 모두도 주님처럼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고,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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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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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주님의 만찬은 우리 삶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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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만찬 미사를 봉헌하면서 예수님께서 남기신 두 가지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면서 남기신 "나를 기억하라"(1고린 11, 24-25)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요한 13, 14)는 말씀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간단 명료한 말씀이지만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면서 누구나 기억하도록 말씀 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몸이 갈기갈기 찢긴 당신의 희생과 정신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희생과 정신에 참여할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고 우리 자신의 희생과 봉헌도 다짐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기억하라고 말씀 하신 것은 당신의 몸과 피를 모두 나눠준 것처럼 우리 또한 아낌없이 나누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나눈다는 것은 내 모든 것을 심지어 내 몸과 피까지 송두리째 내어주는 것임을 몸으로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보기로 내가 나눔의 방법을 보여 줬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잡아 먹히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우리, 이웃과 우리의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들고 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섬김의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제자들의 발을 직접 당신 손으로 씻어 주시면서 종노릇을 하신 것은 종이 주인에게 하듯이 그렇게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만한 주인처럼 '내 발을 씻어봐라' 했으면 예수님은 더 이상 하느님의 아들도 스승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님은 당신 친히 냄새나는 제자들의 발을 무릎을 꿇은 채로 하나하나 정성껏 씻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섬김의 표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체 부위 중에서 가장 고약한 냄새가 나는 발을 직접 씻어 준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친히 씻어 주시면서 섬김의 삶을 보여 주셨고 우리 또한 남의 발을 씻으면서 섬김의 삶을 살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나눠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한마디로 '사랑하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임을 몸으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바로 이해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그렇게 이웃을 열심히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밀 알이 으깨져서 빵이 되듯이 내 자신이 그렇게 빠개져서 남에게 빵이 되는 사랑을 해야 하겠습니다.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면서 한없이 섬기는 모습으로 사랑을 할 때 언젠가는 벗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으며, 원수마저도 사랑하기를 원하신 예수님의 말씀 또한 실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위대한 사람은 학식이 뛰어나거나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결코 아니지요? 진정 위대한 사람의 척도는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선 자리에서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의 빵이 되고 음료가 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남의 발을 씻어주며 종노릇을 했느냐에 있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주님의 만찬 미사를 거행하면서 "나를 기억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더 기억하도록 합시다. 나아가 이 말씀이 매일의 삶에 이정표가 되도록 다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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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김시영 베드로 신부
  |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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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우리가 행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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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주님의 최후 만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의 유업을 남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유언에 따라 우리 교회는 최후만찬을 재현하는 미사를 올리면서 예수님의 유언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미사라는 전례행위 속에 담긴 예수님의 유산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오늘 독서 코린토1서 11장에는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예를 행하라’ 하시고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어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유의 할 것은 예수께서 빵을 들고 내 몸이다 하시며 그것을 떼어 주셨다는 점입니다. 곧 예수님의 몸을 떼고 나누고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받아먹어라 하셨는데 이는 곧 내 몸을 먹고 너희도 그 몸을 떼고 나누고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하셨던 그대로 빵을 떼는 것을 재현하는 이유는 한낮 의례적 반복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몸을 떼고 나누고 주라는 예수의 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이어지는 대목에는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이후 체포되시고 고난의 시간을 거쳐 십자가에 매달려 죽습니다. 자신의 몸을 깡그리 바치신 것입니다. 최후만찬에서 빵을 떼신 의미는 결국 쪼개지고 주어지는 당신의 운명을 빵에다 담아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위해 온 몸을 다 내놓으신,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신 예수님이 그 삶을 빵과 포도주에 담아 주시면서 당신을 기억하며 행하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빵을 뗄 때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복음으로 들은 요한13장은 최후만찬 때 예수님이 하신 또 하나의 중요한 행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요한은 복음서 중 제일 나중에 씌어진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한결같이 빵 나눔을 얘기하는데 요한은 유독 빵 나눔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식사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자신이 본을 보였듯이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에서처럼 빵을 떼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것이 마지막 유언으로 돼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초세기 교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간 첫날에 집집마다 돌아가며 성찬을 거행했습니다. 빵 나누는 의식이 되풀이 진행되는 동안 빵을 떼는 의미가 많이 퇴색하였던 모양입니다.

빵이 뜻하는 주님의 몸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냥 단순한 의식의 반복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중에 최후만찬기사를 적으면서 최후만찬 때 예수께서 남기신 유산은 발씻어주기, 곧 섬김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거행할 것은 빵 나누는 예식이 아니라 서로 섬기는 일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최후만찬 미사를 올리면서 예수께서 당신을 기억하며 행하라 했던 것의 내용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고 의례적 습관적 미사거행이 아니라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 제자들에게 행하라 했던 그것을 실행하는 계기가 되길 희망합니다. 미사라는 예식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다 내놓고 허리 굽혀 섬기신 예수님의 그 삶을 재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미사예식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나누고 섬기신 예수님의 삶을 행하는 실천이야말로 예수님의 최후만찬 유언을 받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행할 것은 빵을 떼고 잔을 돌려가며 마시는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합당하게 성찬을 거행하는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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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조창래 빈첸시오 신부
  | 03.30
468 71.2%
[안동] 사랑으로 완성하는 나눔과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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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만찬 성목요일입니다. 우리는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생활 3년 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사명을 맡기기에 아직 제자들은 못 미더운 데다가 하나는 배반까지 계획하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의 뜻이니 피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으로 당신의 뜻을 제자들에게 전해줄지 고민하신 주님은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사랑과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식사 도중 제자들 앞에서 발을 씻겨주는 종의 모습을 취하십니다. 말로만 혹은 하는 척만 해선 아무도 따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스승이 어떻게 제자에게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힐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섬김의 자세였습니다. 스승이 아니라 종으로서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스승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수난예고 때 주님을 나무랐던 베드로는 이번에도 스승을 말립니다. ‘당신은 영광 받으실 분인데 그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두 번이나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 영광이 어떻게 드러나는 지는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길 기대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낮은 자세로 섬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수난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겐 ‘소 귀에 경 읽기’인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요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요즘에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건 그때만큼 거북스럽진 않습니다. 드러나는 계급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미는 사람이 앞에 있다면 그에게도 웃으면서 정성껏 발을 씻어줄 수 있을까요? 눈도 마주치기 싫겠지요. 정말 어렵겠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요구요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렇게 겸손을 실천하신 주님은 또 하나, 제자들에게 나눔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뭐든지 주고 싶어집니다.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사랑한다면서 이런저런 조건을 단다면 그건 손해 보지 않으려는 장사나 마찬가지지요. 주님은 변화를 강요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사랑스런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십니다. 살과 피는 곧 생명을 뜻합니다. 즉, 당신의 전부를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모두가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만큼 스승과 제자를, 우리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찬례를 계속해서 거행하라고 합니다.

사람은 음식에 따라 변합니다.
흙에서 온 사람은 흙에서 난 음식에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음식에 따라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우리 몸을 생각해서 음식을 정성껏 고르듯 영원한 생명을 위해 성체를 모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몸을 모실 때마다 우리는 생명의 기운을 얻고, 참 생명에 더욱 가까워지게 됩니다.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날까지 이 성찬의 신비에 끊임없이 참여하여 깊은 사랑의 나눔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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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손성문 사도 요한 신부
  |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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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복음 13장 1절)

'파스카 성삼일!'

오늘 저녁에 거행되는 '주님만찬미사'를 시작으로, '파스카 성야'에서 절정을 이루고 부활대축일 저녁기도로 끝나는 '파스카 성삼일'은 교회의 한 해 전례주년 중에서 가장 거룩한 날이고, 전례 등급 중에서도 최고의 등급에 자리 잡고 있는 날입니다.

이 날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수난과 죽음을 건너간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깊이 묵상합니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거룩하고 중요한 이 파스카 성삼일 전례에 꼭 참석해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고,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발씻김 예식'과 성체를 수난 감실로 옮겨 '밤샘조배'를 하면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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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Pascha)'는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너간 것을 기념하는 의미이며,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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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은 '파스카 신앙'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순종과 불순종의 삶을 반복하는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파스카'이며 '파스카에 대한 믿음', 곧 수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받아 먹어라.'
'받아 마셔라.'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은 성체성사(미사)를 통해서 이제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큰 사랑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우리도 너에게 먹히는 삶, 성체의 삶을 삽시다!

예수님의 방법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복음 13장 14절-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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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2021년 4월 1일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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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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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을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루카 복음 22장 24절).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복음 22장 25절-27절).”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은(신앙인들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겸손’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에 있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루카 복음의 가르침을 직접 행동으로 가르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복음 13장 1절).”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복음 13장 3절-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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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를 드러내신 일입니다.

(그냥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정말로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고, 당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발을 씻어 주는 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셨을까?

“사랑은 ‘낮춤’과 ‘높임’과 ‘섬김’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이다.”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나는 낮추고, 상대방은 높이고, 그러면서 상대방을 섬기는 것.)

만일에 낮춤과 높임과 섬김 가운데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처음에는 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서“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요한 복음 13장 8절).

그는 처음에는 ‘발을 씻어 주는 일’에서 ‘낮춤’만 보았고, 자기가 감히 예수님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한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복음 13장 8절).

이 말씀은, “네가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너는 나와 일치를 이룰 수 없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낮춤>

신앙인의 ‘낮춤’은 ‘비굴함’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라고 겸손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하느님 앞에서만’ 자기를 낮추고,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즉 사람들 앞에서는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우쭐거린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 교만을 버리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만 자기를 낮추는 것은 위선입니다.

<높임>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녀다.”라는 믿음이 ‘높임’의 바탕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남을 높입니다.

<섬김>

신앙인의 ‘섬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22장 39절).”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내 발을 내 손으로 씻는 것과 남의 발을 내 손으로 씻어 주는 것은‘같은 일’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할 일입니다.)

3)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 13장 34절).”라는 계명을‘행동’으로 가르쳐 주신 일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다음에 다시 ‘말씀’으로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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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복음 13장 12절-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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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나를 ‘스승님’, ‘주님’이라고 부르는 신앙인이라면, 내가 한 것처럼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여라.”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대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그 사랑은 ‘낮춤, 높임, 섬김’을 실행하는 사랑입니다.

4)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연례행사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세족례 한 번 했다고 해서 사랑 실천을 다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세족례’를 생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실천’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에 예식서에 세족례를 거행하라고 지시되어 있으니까 하는 것이라면, 즉 ‘사랑 없이’ 의무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남의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위선’이 되어버립니다.

‘위선’은 죄입니다.

(세족례뿐만 아니라 ‘사랑 실천’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일이 다 그런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 실천’이 ‘위선’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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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1년 4월 1일
  |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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