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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전/원주]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 귀한 나무로다
조회수 | 66
작성일 | 21.03.31
[서울]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 귀한 나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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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방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들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키드론 골짜기로 경비병들과 군인들이 들이닥친 시각은 한밤중이었습니다.

그 후 빌라도의 심문을 거쳐 사형이 언도된 예수님께서는 오후 세 시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각으로 추측이 되는 오후 3시경에 모여서 주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주님의 수난을 되새겨 보았고,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저녁 시간에는 십자가를 모시고 경배 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오늘은 성찬례는 거행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예식만이 거행됩니다.

일 년에 한 번 오늘만큼은 미사도, 고해성사도 이루어지지 않지요.
성사의 주체이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르겠다는 의미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깊은 절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지 않기를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많은 예비신자들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하느님을 찾으며 몸과 마음의 평화를 갈구합니다.

신자들 역시 인생의 고난 길에서 만나는 어려움 앞에서 끝까지 인내하기보다는 하느님께 그 고난들을 없애주시기를 청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 주시기보다는 거부하지 말고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몸소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이천여 년 전에 있었던 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이 결코 절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시작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구세주임을 믿고 고백하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열린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제 잠시 후에 전 세계의 모든 사제들은 십자가를 들고 노래할 것입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려 있네.”

신자들 앞에서 십자가를 높이 쳐들며 그 길을 가기를 독려합니다. 신자들이 응답하지요.

“모두 와서 경배하세.”

그 길을 마음에 새기고 뒤따르겠다는 응답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잘 몰랐을 때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축복만을 기원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의 삶을 알게 되면 그것을 치워달라는 기도보다는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갈 수 있는 은총을 달라고 청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임을 깨닫고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거부하기보다는 기꺼이 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지고 가시는 모습을 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번민하시고 고통을 당하시며 놀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모욕과 죽음을 피하지 않고 달게 받으셨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에는 또 한 사람의 십자가의 길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십자가 앞에 베드로가 서 있지요.

그런데 똑같은 고난 속에서 예수님은 부활에 이르셨지만 베드로는 그만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잘 가실 수 있었으며 그렇게 장담하던 베드로는 왜 실패하고 말았는지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생전에 수차례에 걸쳐서 당신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누차 설명하셨으며 받아들이기를 힘겨워 하셨지요.

오죽하면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복음 22장 42절)고 하느님께 청을 하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피할 수 없는 길임을 아시고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복음 22장 42절)

그리고는 십자가의 길을 향해 걸어가시지요.

이에 반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이 닥칠 것을 수차례 예고하실 때마다 언제나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염려에 아주 힘있게 대답하지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복음 13장 37절)

이렇게 맹세를 할 뿐 아니라 실제로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칼을 빼들고 용맹과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눈앞에 십자가의 길이 놓여졌을 때 베드로의 모습과 예수님의 길은 전혀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겼던 예수님께서는 경비병과 군인들이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당신을 잡으러 오자 모든 것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먼저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요한 복음 18장 4절)

“나자렛 사람 예수요.”(요한 복음 18장 5절)

“나다.”(요한 복음 18장 25절)

예수님의 이 당당하고도 고요한 모습에 놀란 병사들은 뒷걸음질치다가 그만 땅에 넘어지고 말지요.

"나다"하지 않았느냐?"(요한 복음 18장 8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한치의 흔들림이 없이 당당하게 십자가의 길을 향해 걸어 가셨습니다.

이에 반해서 칼로 용맹을 떨치며 자신감을 드러냈던 베드로는 비천한 문지기 하녀의 질문 한마디에도 겁에 질려서 그 존재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맙니다.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요한 복음 18장 25절)

“나는 아니오.”(요한 복음 18장 25절)

그렇게도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믿었던 베드로는 눈앞의 죽음 앞에서 완전히 기가 죽어 배신의 길을 가고야 맙니다.

피땀 흘려 기도하시며 성부께 모든 것을 맡기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며 당신께 주어진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모습 옆에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하고 쓰러져 울부짖고 통회하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의지를 믿었습니다.

그에 반해서 예수님은 피땀을 흘리시며 하느님께 애원하시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구하셨지요.

바로 그 차이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삶의 십자가를 질 수가 없습니다.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 같은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들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수없이 닥쳐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 고통의 십자가를 기쁨과 생명의 부활로 연결시킬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믿고 자신의 의지만을 믿으면 베드로 사도처럼 어느 순간 실패하고 말지요.

하느님께 의지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데 성공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길이 아니지요.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삶의 모든 과정이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며 도움을 청하고 그리고 그 길을 갈 때 십자가는 부활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와 부모, 재물과 건강에 관계된 이런저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또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맺어지는 미움과 갈등의 어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이 허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이지요.
이렇게 유한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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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을 살해하고 농촌의 한 마을로 숨어든
브라디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곧 농부의 고발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브라디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죽을 죄인임을 고백하며 참회의 나날을 보냈지요.
그런데 끝내 자기를 고발한 그 농부만은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하는 생각으로 괴로워했지요.
아무리 용서를 하려고 해도 의지적으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날 한 수녀가 브라디를 찾아왔습니다.

“브라디씨, 어떤 사람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군요.
나는 한 사람을 무척 미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브라디가 충고했습니다.

“용서에 무슨 조건이 있나요? 무조건 용서해야지요.”

고개 숙여 듣고 있던 수녀가 브라디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밖에 없는 제 오빠를 토마스 버크를 죽였지요.”

깜짝 놀란 브라디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수녀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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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사람의 의지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인생의 십자가를 부활로 승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삶의 고통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이지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다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죄라고 표현하지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을 하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저마다 자기에게 알맞은 십자가가 주어졌는데도 세월이 흐를수록 불평을 늘어놓으며 어느 날부턴가 자신의 십자가를 잘라내기 시작했습니다.

무겁다고 자르고,
크다고 자르고,
너무 뾰족해서 찔린다고 잘라냈습니다.
그의 십자가는 이제 다 잘려나가서 몽당연필 같아졌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이 사람이 죽게 되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천국으로 향했습니다.
천국 문이 보이는 언덕 앞까지 다다르게 되었는데
천국 문 바로 앞에 개울이 하나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짊어지고 온
십자가를 개울 위에 걸치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어요.
그도 재빨리 자신의 십자가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몽당연필 같아진 십자가가 너무 짧아서
십자가와 함께 그는 개울 아래로 떨어져 떠내려가고 말았습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삶의 십자가는 같습니다.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권력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가정이 화목한 사람이나 불화한 사람이나 부모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이나 다 나름대로 고통스런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지요.

나에게만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를 지고 그 험난한 고통의 길을 가셨는데 어느 누가 그 십자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 무거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때 그 십자가의 고통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기쁨이자 희망의 결실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오 복음 16장 24절)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우리는 고통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의 인생을 승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길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며 십자가 경배 예식을 거행합니다.

바로 십자가가 구원의 길임을 고백하며 깊은 절로 흠숭을 바치지요.
그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부활을 희망하며 기꺼이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대축일’의 의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혀오는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지 않고 성실한 자세로 지고 가서 마침내 승화시키는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이웃에게 부활을 체험하게 하는 것, 이것이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 경배 예식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잘 받아들이고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통해서 누리게 되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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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468 72%
[대전] 흙처럼 겸손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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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오직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기 위해 살아온 삶이었지만, 마치 큰 죄인이라도 된 듯이, 예루살렘의 온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도들 사이에 끼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이제 잠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의 모습이 과연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계시는지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에 대하여 잠시 묵상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그분의 머리를 바라보십시오. 엉클어진 머리에 가시관의 가시에 깊이 찔리시어 온 몸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왕중의 왕이시며, 모든 것의 첫 창조주이신 분이, 금관이 아닌 가시관에 의해 그 머리엔 깊은 상처가 생겼으며 조금만 움직여도 가시가 더 깊이 찔리는 그 아픔은 전신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항상 아버지의 일만을 생각하시던,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죄인들을 아버지께 인도하나 만을 생각하시던 예수님의 머리, 그런데 왜 이런 고통을 겪으셔야만 하겠습니까? 허허벌판인 사막에서 굶주림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그 백성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러했던 그 백성들이 이제는 왕관이 아닌 가시관을 그분의 머리에 씌우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고통을 받으셔야 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잘못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들이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며 참된 하느님의 사랑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남을 속이고 자신을 들어낼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이나, 온갖 악한 생각들로 인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파괴하고 있기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고통을 당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손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두 팔을 넓게 벌리시고 있으며 그분의 양손은 못으로 구멍이 뚫리고 생명의 피가 밑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잘못하셨기에 그분의 손이 이렇게 비참하게 못에 박혀 찢어져야만 했겠습니까?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 손을 가지시고 행한 선행, 손으로 맹아의 눈을 만져 빛과 세상을 보게 한 일이나, 귀를 만져 농아를 고쳐주신 것, 많은 병자들을 손으로 안수하여 그들을 병고에서 해방시키신 일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손을 대신하여 그분의 손이 못에 박히는 그런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만들어 준 손은 창조의 손이요, 일치의 손이요, 치유의 손이며 보호의 손 이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손은 병자를 치료해 주고, 가난한 이를 도와주며, 죽은 이를 장사지내 주는 등 선행으로 우리 죄를 보속하며 하늘 나라에 썩지 않는 보화를 쌓는 그런 손 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금단의 열매인 지선악수 실과를 손으로 따먹으면서부터 인류의 손은 서로가 서로를 정복하기 위한 파괴의 손으로 바뀌어 버렸으며, 일치가 아니라 분열의 손이 되었고, 치유가 아니라 난폭함으로 인해 형제를 상해하고 죽이는 무서운 살인의 손으로 바뀌어 버렸으며, 그 때문에 온갖 악을 행하는 그런 손으로 그리고 참된 봉사가 아니라 오직 대가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손으로 바뀌었기에 주님의 손이 우리를 대신하여 못에 박히는 그런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입술과 혀는 어떠합니까? 무엇에 갈증을 느끼셨기에 그렇게 바싹 마르고 갈증을 느껴 “나 목마르다” 하고 외치고 계십니까?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주며, 위로의 말씀을 던져주시던 주님의 입은 이제 갈증으로 이해 메말라지고 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무엇을 잘못하셨기에 그러한 고통을 받으시겠습니까? 주님의 이 고통 또한 바로 우리들의 잘못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에레미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그들의 혀는 사람을 죽이는 화살이니 입으로는 친구와 함께 평화를 말하나 속마음으로는 해를 도모하느니 내 어찌 이를 벌하지 않겠느냐”는 말대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진리를 전파하며 평화를 도모해야 하는 우리의 혀를 우리는 잘못 사용함으로 남을 죄로 인도하고 서로의 평화를 깨트리고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기에 주님의 입술은 진리에, 사랑의 말씀에 갈증을 느껴 검게 타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눈은 어떠합니까? 언제나 다정하며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며 연민에 가득한 모습으로 바라보시고 언제나 하느님의 은총에 충만하여 우리에게 생명의 정기를 넘겨주시던 그분의 눈동자가 이제는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호소하시는 그분의 눈길은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네 몸의 등불은 네 눈이니 만일 순수하면 네 온몸이 빛날 것이요, 네 눈이 만일 악하면 네 온몸이 어두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바라보며 또 높은 이상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뵙게 되는 날까지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을 보존해야 하는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그 눈을 탐욕의 눈으로, 증오의 눈으로, 그리고 질투의 눈으로 바꾸어 저주의 불꽃이 튀는 그런 무섭고, 따스한 마음까지도 차갑게 얼리는 매섭고 찬 눈으로 만들고 있지나 않나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다면 베드로 사도가 한 저주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들의 눈은 간음에 대한 욕망과 죄악에 대한 허기증으로 가득차있으니 저들은 저주받을 자식들이다.”.

그분의 귀는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인생의 상담자로서 그리고 병자의 의사로서 그들의 고통의 하소연을 들어주시며 도움을 주시던 귀에, 주님을 왕이라고 부르며 메시아를 맞아들이듯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하고 외치며 따라오던 바로 그 군중들이 퍼붓는 저주의 소리를 듣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형제들의 애원의 소리보다는 남을 비방하는( 말이나, 음탕한) 말에 더 귀를 잘 기울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잠언에 보면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애원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가기 부르짖을 때 들어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두 귀가 있고 한 입이 있는 것은 되도록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뜻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듣는 데에 너무나 인색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우리에게 유익한 이야기는 말입니다. 아제부터라도 악에서 깨어나 이웃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발은 지금 어떠합니까? 못에 박힌 주님의 두 발 역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몸을 지탱하기 위하여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습니다. 왜 이러한 고통이, 주님의 발을 십자가에 매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곳곳을 돌아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던 발이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발이 어둠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으로 달려가기 위해 받은 우리의 발로 우리는 지금 어디로 향하여 뛰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경기장에 나서서 뛰는 사람은 목적지만을 향해서 뛰어야 하고, 왼편으로나 바른편으로, 옆길로 가서는 상급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목표는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김유신의 말처럼 타면 술집으로 달려가는 그런 발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의 길을 따라 주님께 나아가는 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잠언에서도 “네 발이 나아갈 굽은 길을 평탄히 하며 우편으로나 좌편으로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고 경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주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당신의 피를 몽땅 땅에 다 쏟으시고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고개를 떨구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 28-30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을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마침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셔서 히솝 풀대에 꿰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 드렸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라고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마지막 모습은 바로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수철리에 맹사성의 생가가 있습니다.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를 하여 스무 살에 경기도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무명 선사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이 생각하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제가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무명 선사가 대답하였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무슨 거창한 말을 기대했던 맹사성은 실망의 눈빛으로 “그런 건 삼척 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먼 길을 온 제게 해 줄 말이 고작 그것뿐입니까?”하고 거만하게 말하며 맹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습니다. 그러자 무명 선사가 기왕 이렇게 어려운 발걸음을 하였으니 녹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습니다. 그는 못이기는 척하고 자리에 않았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찻물이 넘치도록 그의 찻잔에 자꾸만 차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맹사성은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찻잔이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바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많은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정작 신앙생활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고개를 숙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지 못하다면 우리들이 신앙인으로 지내는 근본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름이 “고개를 숙이는 행위”, “겸손”한 행위에 있지 않고 외적인 두드러짐에 있다고 한다면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천주교에서는 신자들이 회장님이나 교회의 봉사자들을 보는 눈이, 교회의 사람들이 장로나 집사 등을 보는 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재의 수요일에 마태오의 복음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진정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지막 모습을 닮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 곧 주님의 겸손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많은 가르침을 주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깨닫도록 하여 주셨지만, 유일에게 당신을 보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한 것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는 말씀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주님의 겸손한 모습을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모습에서 그 최고의 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5에 보면 “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저녁을 잡수실 때 악마는 이미 가리옷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겨 주신 것과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뒤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고 허리에 두르셨던 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라고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 이 사건의 의미를 베드로 전서 5장 5절에서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라는 말로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최고의 겸손의 행위로 고백하고 있으며, 바로 모두가 그런 겸손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오스딩 성인께서도 덕 중에서 무슨 덕이 가장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겸손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남이 하는 말을 잘 들어주고 자기 주장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추켜세우고 자신은 부족한 사람이라고 낮추는 모습이 겸손이겠습니까? 그것은 겸손이 아니며 비굴한 행위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억지로 겸손이란 말을 붙이자면 그것은 강요된 겸손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된 겸손이란 “섬김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높인다고 할 때, 말로만 높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높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몸으로 남을 높이는 것, 그것이 바로 섬김인 것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 주는 모습, 바로 그것이 진정한 겸손의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흙처럼 겸손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겸손이란 말 humilitas ← humilis ← humus 는 바로 땅, 흙이라는 humus에서부터 나온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흙이란 어떤 것입니까? 흙에는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장 낮고 비천한 성격입니다. 사람에게서 가장 낮은 부분은 발바닥입니다. 그런데 흙은 그 발바닥에 밟힙니다. 사람에게서 가장 낮은 것에 밟히는 것이 흙인 것입니다. 또한 흙은 사방 천지에 널려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모래는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어도 흙은 돈 주고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때때로는 돈 주고 내다 버리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곧 비천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흙은 이렇게 가장 낮고 비천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흙의 또 다른 성격은 모든 것을 품어 주면서 생명을 안겨 준다는 것입니다. 흙 속에는 온갖 종류의 자양분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흙 속에서 자라는 뿌리 식물에는 영양가가 풍부하다고 합니다. 또한 흙은 사람에게도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몸보신을 위해 보약을 먹곤 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아이를 열씩이나 낳고도 보약은커녕 곧 밭에 나가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몸이 성하였다고 하니 놀라울 일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흙집의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요즘의 건강학자들은 지적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흙을 밟고 지내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추천을 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텔레비젼에 어느 산엔가 오랫동안 맨발로 등반을 하시는 분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었는데도 힘이 젊은이보다 더 세고 병도 앓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흙을 밟고 지내며 흙의 기운을 받은 결과라고 하였고, 현대인들의 심성이 날로 약해지는 것도 바로 흙으로부터 멀어져 콘크리트 집에서 사는 것이 주요 원인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흙은 모든 생명체에게 몸과 마음의 자양분을 안겨 주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흙이 지닌 이 두 가지 특징 중에서 앞의 것은 눈에 띄고, 뒤의 것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낮고 비천한 모습은 눈에 뜨이는데, 다른 생명체들에게 자양분을 안겨 주는 것은 눈에 잘 안 띄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흙의 또 다른 가치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전제로 하여 “흙처럼 겸손하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이란 바로 흙과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남을 살리는 것으로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에는 꼭 남을 섬기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존경을 받습니다. 곧 겸손이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행위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남을 섬김에 있는 것입니다. 섬김이란 내가 낮아져서 남을 받드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진정한 겸손은 남을 “살림”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밟히더라도 남에게 생명을 안겨주는 데 겸손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 겸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적 겸손, 실제적 겸손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흙처럼 겸손하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베드로 사도는 진정한 겸손의 의미를 발견하였던 것이며, 모두 겸손의 옷을 입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들에게 흙처럼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함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기 위에 지하철역에서 나오는데 흰 티셔츠를 입은 한 젊은이가 서울역 광장을 왔다갔다하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흰 티셔츠 앞면에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라고 쓰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다 하고 생각하며 저를 지나쳐간 그 사람을 다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마치 제가 뒤돌아 볼 줄 알았다는 듯이 그의 등 뒤에도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종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각각 가장 높이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것에 매여 사는데, 돈, 명예, 높은 지위, 지식, 술, 자식, 이데올로기 등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것들을 모두 ‘우상’이라고 정의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매여 사는 삶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겸손한 삶, 흙처럼 겸손한 삶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무엇엔가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의 종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완전한 자유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무엇이 우상인가 하느님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종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하느님의 종이 될 때, 가장 완전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속박되어 살 때, 역설적으로 참 내면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 열매로서 흙처럼 겸손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흙처럼 겸손한 삶을 살지 못함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는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상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곧 두 주인을 섬기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그를 어중간하게 섬길 때까지는 그 사람에게 제법 잘 대해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철저히 자신을 섬기게 되는 그 순간, 돌연 그를 철저히 배신해 버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철저히 섬기는 사람을 더욱 사랑해 주시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상을 철저히 섬기다가 우상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하느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고 있다는데 우리들의 아픔과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우상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하느님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힘보다 더 강한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이에 대한 답을 갖는 것은 보통 사람인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우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하느님만의 종이 되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런 한계성을 갖고 태어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인간의 한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차피 그런 한계성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니 아무 부담 없이 두 주인을 섬기자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 한계선을 철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서 그것이 쉽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곧, 우상의 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과 자신의 한계선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때만이 우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섬기며, 주인 집 자녀들을 섬기고, 주인 집 모든 일을 무조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종이라는 제도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영적으로 종의 의식을 갖는 다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즉 자신이 종과 같이 비천한 존재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이 하듯 섬기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스스로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흙처럼 겸손히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바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원래 종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하기에 종과 같이 남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종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남을 섬기는 것은 겸손이지만, 우리가 남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주인이 종의 발을 씻어주면, ‘참 겸손한 양반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종이 주인의 발을 씻어줄 때에는 ‘참 겸손한 종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아들은 종의 신분을 취하셨는데, 정작 종과 같은 우리가 주인 행세를 하려함에 있는 는 것입니다. 남위에 올라서서 대접을 받으려는 우리들의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로 우상의 종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보면서, 자신의 한심한 수준을 겸허히 인정하여 자신을 종으로 규정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입니다. 여전히 우상의 종 신세를 면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경로를 거쳐 하느님의 종으로 자신을 규정하여 당연히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흙처럼 겸손한 삶을 사신 분이셨지만, 나는 자신의 낮은 신분으로 당연히 그분의 겸손한 삶을 흉내내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겸손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겸손이란 말속에는 원래 높은 지위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낮고 비천한 존재인 우리는 겸손할 수 없으며, 다만 겸손을 흉내낼 뿐입니다. 흙처럼 겸손한 삶을 사셨던 예수님, 그분의 그 숭고한 삶을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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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민병섭 신부
  | 03.31
468 72%
[서울] 외사랑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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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어졌다”라는 마지막 말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시는 우리의 주님.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가 걱정되어 제자 요한에게 성모님을 부탁하시는 자상한 아들이십니다. 이제 그 자상한 아들, 훌륭한 스승은 우리의 곁을 떠나가십니다. 유다 대사제와 그 일행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부추긴 것은 놀라운 일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당연한 처사인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평소에도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눈엣가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길까지도 함께할 것 같았던 제자 베드로가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라는 사람들의 추궁에, “나는 아니오”라고 세 차례나 부인하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서글프게 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걸어오신 사랑의 삶이 외면당하는 느낌이 들어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상대방이 알고서도 받아주지 않는 혼자만의 사랑을 ‘외사랑’이라고 했던가요? 예수님의 사랑이 가슴 아픈 ‘외사랑’이 되어감에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이 ‘외사랑’에 머물지라도, 후회 없이 기쁨으로 아버지 뜻을 따르는 가장 행복한 길을 선택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행복의 길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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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신부
  | 03.31
468 72%
[원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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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말하였다.(마르 15,37-39)

이 성경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파견되어 부여받은 임무를 십자가위에서 완수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은총과 믿음의 축복을 주시는 마지막 장면으로 늘 대단한 감동과 놀라운 구원의 기적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2)라는 시편기도를 숨을 거두실 때까지 큰 소리로 계속 바치셨다. 인간을 대변하여 바치는 기도로 내용을 보면 아버지한테 조차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감과 아울러 아버지께 의탁하는 깊은 신뢰심을 갖고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인간의 죽음을 완전히 겪으시겠다는 다짐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내심을 갖고 온유와 겸손의 모습으로 끝까지 십자가 위에서 당신임무를 완수하신다. 그래서 당신 십자가의 죽음이 인간구원을 위한 희생제물 봉헌이 되고 인간의 죄를 씻는 십자가 제사가 되며 인간이 십자가의 은총으로 하느님과 만나 하나되는 사랑의 파스카 잔치가 된다.

이 십자가의 신비는 인생이 죽음으로 끝장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준 다리가 되었다.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지므로 이제 주님께서 지성소에 숨어 계시지 않고 만백성에게 하느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은총을 주신 것이다. 인간은 “예수님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시구나”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아들이(마태 27,54) 이방인이었지만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신앙을 고백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으신 예수님께서 과연 인간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심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우리 모두 성주간 동안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백인대장처럼 “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구나”고 고백하며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온전히 바쳐주신 주님께 우리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삶을 통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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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김영진 신부
  | 03.31
468 72%
작년에는 ‘기생충’이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4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올해는 ‘미나리’가 미국의 영화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소수민족의 애환을 소재로 한 영화라고 합니다.

미나리는 음식의 주된 재료는 아니지만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는 재료입니다. 미나리는 주된 음식을 빛나게 해 주는 재료입니다. 아구찜에도 들어가고, 매운탕에도 들어가고, 쌈의 재료도 됩니다. 싱싱함과 독특한 향으로 입맛을 더해 줍니다.

미나리와 더불어 개나리도 있습니다.

개나리의 꽃말은 ‘희망’이라고 합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노랗게 피는 개나리와 함께 봄이 오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산 사람이 고향이 그리워서 개나리를 가져다 심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란 잎은 싱싱하게 자라는데 노란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합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꽃이 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겨울이 없는 따뜻한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개나리는 겨울을 지나야만 노랗게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우리 말 중에 ‘비나리와 희나리’도 있습니다.
비나리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희나리는 마르지 않은 장작이라는 뜻입니다.
두 말은 가수 심수봉과 구창모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심수봉은 ‘비나리’에서 간절한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구창모는 희나리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비나리의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 당신 사랑해도 될까요. 말도 못하고 한없이 애타는 나의 눈짓들 세상이 온통 그대 하나로 변해 버렸어. 나만을 사랑하면 안 될까요. 마음만 달아올라 오늘도 애타는 나의 몸짓들 따사로운 그대 눈빛 따라 도는 해바라기처럼 사랑이란 작은 배 하나 이미 바다로 띄워졌네. 하늘이여 저사람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사에 깊이 들어있습니다.

희나리의 가사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의 잘못이라면 그대를 위한 내 마음의 전부를 준 것뿐인데 죄인처럼 그대 곁에 가지 못하고 남이 아닌 남이 되어 버린 지금에 기다릴 수밖에 없는 나의 마음은 퇴색하기 싫어하는 희나리 같소. 내게 무슨 마음의 병 있는 것처럼 느낄 만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대 외려 나를 점점 믿지 못하고 왠지 나를 그런 쪽에 가깝게 했소.”

사랑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움이 가사에 담겨있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입니다.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배반당하셨던 예수님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입니다.

세례를 받고, 주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여전히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성금요일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가난한 이,
아픈 이,
소외된 이,
죄인들에게는 좌절과 절망의 수난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대사제와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승리를 알리는 수난이요,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빛의 승리요, 죽음을 넘어 우리를 구원하는 부활의 빛임을 알고 있습니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절망의 눈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어둠의 승리요,
삶의 허무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과 구원의 여정입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지내면서 ‘사명’이라는 생활성가의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오늘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생각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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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1년 4월 2일
  | 04.02
468 72%
[원주]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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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어떻게 예언자는 사람들 앞에 수모를 받고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수난의 ‘주님의 종’1)
에 대한 예언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예언서 53장 3절)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에 뿌리를 둔 구약의 세계에서는 ‘수난의 주님의 종’, ‘의인의 죽음’을 예언자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답은 ‘무죄한 의인도 고통을 겪을 수 있고’ 죄인을 위해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맞는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야 예언서 53장 4절-5절)

우리는 억울하게 고통을 받거나 누명을 쓰면 불평하고 또 사실을 밝히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은 그 반대의 모습입니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야 예언서 53장 7절)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대사제가 보낸 사람들에게 잡히셔서 그들의 손에 넘어갑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온갖 모욕을 당하시고 그리고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집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을 재판할 권리도 또한 죽일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도록 군중과 함께 선동을 하며 그를 압박하여 그들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들의 위협에 밀려 빌라도는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향하십니다. (요한 복음 18장 16절-17절)

십자가가 세워지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 좌우에 또 다른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예수님 위에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여진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목이 붙어 있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고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어서 제비를 뽑습니다.

“그들이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습니다.”(시편 22장 19절)라는 구약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로마인이든 유대인들에게는 수모의 형틀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는 수난을 받으셨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드러내셨고 구원의 근원이 되셨음을 설명하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5장 8절-9절)

요한복음은 골고타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목 마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신포도주가 담긴 그릇에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 입에 갖다 대드립니다.

신포도주를 맛보신 뒤에 “다 이루어졌다.”(요한 복음 19장 30절)라고 말씀하시고 고개를 숙이며 숨을 거두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극도의 고통이 있습니다.
양쪽 손에는 육신의 무게를 매단 못이 있을 뿐입니다.
죽음을 앞둔 그 자리에는 목마름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알몸으로 드러난 부끄러움과 수모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몰골이 말도 아닌 주님을 향해 손가락질합니다.

이미 먼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그 모습입니다.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이사야 예언서 52장 14절)

그분의 십자가에 가난함이 있습니다.
그분의 십가가에 부끄러움과 수모가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 절망과 희망이 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 미움과 용서가 있습니다.
이제 그분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부활을 봅니다.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순명하신 아드님을 두고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성금요일 십자가 전례에서 우리는 찬미가를 부릅니다.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귀한 나무로다.
아무숲도 이런잎과 이런 꽃을 못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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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서 ‘주님의 종’은 히브리어 ‘eḇeḏ Yahweh (עֶ֣בֶד יְהוָ֑ה)이고 그리스 말로 ’둘로스 테우 (δοῦλος Θεοῦ)’은 특별한 사명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데에는 유대인에서는 ‘유배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으로 주로 해석한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특히 이사야에서 네 개의 ‘주님 종의 노래(이사야 예언서 41장 1절-4절 / 49장 1절-6절 / 50장 4절-9절 / 52장 13절-53장 12절)는 각각 독립되어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서로 독특하게 연결되며 통일성을 갖는다.

세 번째, 네 번째 ’주님의 종‘은 수난과 연결되어 있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아직도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복수가 아닌 ’주님의 종‘은 인격적이고 단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수난의 시작에서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마태오 복음 26장 24절)라고 밝히시지만 예언자의 이 말씀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안에서 놀랍게도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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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신부
2021년 4월 2일
  |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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