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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구] 약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신다.
조회수 | 2,166
작성일 | 09.07.15
우리모두는 이상한 행동으로 바보짓을 하는 멍청이 영구를 기억합니다. 바보스럽고 멍청하기 그지 없는 그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른들 까지도 그의 행동을 흉내 내었고 잠시나마 잔잔한 웃음으로 또다른 영구가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신선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새로운 자신감과 상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덧 영구는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웃음을 전해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고 잘 생기고 멋있는 어느 탈랜트 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게 되어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똑똑함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은 교훈을 영구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언급하면서 외부적인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들과 보통사람들 보다는 다르다는 우월감으로 젖어있는 권세가들을 향해서 질타와 새로운 교훈을 제시합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신비가 연약한 어린아이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똑똑하고 지혜로움으로 포장된 약삭빠름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능력으로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지만, 단순함과 순수함이 어리석음으로 비쳐지는 이들에게는 위안과 기쁨으로 전해집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그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의 복음 말씀 앞에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울 때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말씀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또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복음 앞에서는 어린이와 같이 순수함과 신뢰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는 신뢰와 받아들임입니다 신뢰와 겸손의 대명사는 바로 철부지 어린이들이며, 보잘 것 없는 약자들입니다. 약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시고,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육신의 아픔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에게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전해주는 작자 미상의 “어느 환자의 기도”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신뢰가 물씬 풍겨나는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약삭빠름으로 유혹하지만,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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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석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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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주일학교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것이 많은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물어보고, 재잘대고, 쫄랑대고.....철부지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놈들도 점점 학교교육에 익숙해지고 사회에 익숙해지면서 어른들처럼 복잡하게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보면서 아이들이 그렇게 사회에 익숙해지고 똑똑해지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일까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단순하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맘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더불어 이 강론을 하고 있는 저에게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똑똑하고 잘 아는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드러나고 있다는 예수님의 기도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기도는 아마, 하늘 나라의 신비와 복음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 주시고 선포하신 후, 당신 스스로 느끼신 체험에서 나온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가끔씩 스승 그리스도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며 외쳐대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꾀죄죄하고 핏발이 선 눈과 힘줄이 붉어져 나왔을 목! 그렇게 열성을 다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고 알렸건만 그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려던 그 똑똑한 사람들, 즉 바리사이들, 율사들이 가진 그 똑똑함과 그 오만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눈과 귀를 막아버려서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을 보시고 마음 아프게 하신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안다는 자들과 똑똑하다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와 그 정의가 예수님을 통하여 현존하여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충분히 가지고 누리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동안 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을 뒤집어엎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니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그 영특함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많이 배운 것이 죄는 아닙니다. 많이 가진 것도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이 얻고 너무 많이 받으면 넉넉하고 차고 넘쳐흘러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하느님 보다 앞에 서게 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게 됩니다. 하느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우선 할 때,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능력, 명예 등등 그 기득권들이 우선 할 때 하느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 비해 철부지 어린이는 받들 일 수 있는 맘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해도 자신이 작고 미약하기에 부모에게, 웃어른에게 의지하려고 하며, 겸손 되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복잡다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그 겸손하고 단순한 맘을 지닌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 되든지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께 어떻게 다가서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살아온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과감하게 떨쳐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고, 똑똑함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여 얻은 그것들을 가지고 과연 나는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쓰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 구원과 하늘의 신비를 알아듣고 행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겸손 되이 사용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볼 때 어떠한 사람을 좋아하시면서, 누구를 위해서 성부께 감사기도를 올리셨는지 우리는 생활 속에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강호성 바오로 신부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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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과 겸손의 놀라운 차이점

오스트리아가 낳은 음악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살 때 건반지도를 받고 5살 때 이미 소곡(小曲)을 작곡했던 그가 아버지의 슬하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작곡과 공연으로 온 유럽을 다닐 수 있었지만, 26세에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 가정을 꾸리는 데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많은 빚더미에 가정형편이 쪼들리게 되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가정교습을 하기로 하였다.

모차르트의 명성에 걸맞게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모차르트는 모여든 문하생들을 두고 음악을 좀 아는 사람들과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두 그룹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200 쉴링을, 전혀 모른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100 쉴링을 교습비로 징수하였다. 200 쉴링을 내야하는 부모들이 항의하며 답변을 요구하자, 모차르트의 해명이 걸작이다. 음악을 좀 아는 사람을 가르치기가 모르는 사람보다 두 배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은 찬양기도(25-26절)와 계시의 말씀(27절)으로 짜여 있는데, 이는 어록에서 따온 것이며 공관복음서에 수록된 유일한 예수님의 찬양기도이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 감사기도라 해도 좋다.

다시말하면 어제복음에서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두고 불행을 선언(11,20-24)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감사의 환호를 부르신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좀 안다고 뻐기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불행선언을 맞은 대상인물과 오늘 감사환호의 대상인물을 비교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명확해진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가 불행선언을 맞은 이유는 그곳에서 좀 안다고 뻐기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백성의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거부하였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바로 그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가난한 이들, 못 배운 이들, 마귀 들린 자들, 온갖 병자들, 세리들, 창녀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의 아들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다 같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다 같은 조건인데, 왜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일까?

그 차이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교만과 겸손의 차이다.
교만은 거부를 낳고, 겸손은 수용을 낳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겸손과 수용의 표상인‘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대한 통찰은 철저하게 아들 예수께 맡겨져 있으며, 아들이 택한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다. 다행한 일은 예수께서 택하신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계시에 대한 수용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가진 지식과 지혜는 철학(哲學)을 통하여 신(神)의 존재(存在)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 신(神)은 한낱 절대자(絶對者, Absolutum)일뿐, 이 분이 바로 구약의 야훼 하느님이시며, 신약의 예수님 안에 성령과 함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심을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 즉 스스로 사람이 되는 육화(肉化)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든지 육화(肉化)되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이 되신 예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박상대 신부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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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말 안 듣는 아이들 야단치면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 녀석이 벌써 머리 좀 굵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네" 일단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이 굳어지고 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좀처럼 고치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묻어있지 않은 흰색 종이에 무슨 색을 칠하든 원래의 색깔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바탕색이 칠해져 있는 종이는 제 색깔을 낼 수 없습니다. 내가 좀 안다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뭔가 새로운 진리가 밝혀져도 자기 고집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걸 놓기 아깝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다시 찾아 나간다는 게 싫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집니다. 내 머리 속에 하느님은 이런 분이다. 딱 정해 놓고 내 마음대로 하느님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런 하느님은 나 혼자 만의 하느님에 불과합니다. 진짜 하느님을 알아보려면 아무 것도 묻어 있지 않은 흰색종이 같은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자기 고집에 매여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이 터져라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은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그려나갑니다. 내 머리 속에서 내가 만들어 낸 하느님을 전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으로 내 마음을 채웁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 내 일상에서 잠시 떠나 생각해 봅시다. 혹시 내 안에 나만의 하느님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뒤돌아 봅시다. 내 지식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나를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입니다.오늘 하루 내 생각을 버리고 어린이처럼 주님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구대교구 배상희(마르첼리노)신부>
  |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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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오늘 복음은 어제의 말씀에 이어 마음이 닫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고을을 떠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5장 산상설교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가난하고, 철부지 어린이 같은 마음이 하느님을 만나는 열쇠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마음, 어린이 같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법구경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그 녹이 점점 쇠를 먹는다.” 상처 입은 쇠에는 산화되어 금방 녹이 생깁니다. 그 녹은 점점 자라 어느새 돌아보면 쇠 전체가 녹이 슬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욕심과 거짓, 위선, 오만과 편견, 시기와 질투로 우리의 깨끗한 영혼과 마음은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는 점점 커져 내 마음에는 빈자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빈자리가 없다면 내 마음이 온통 나로 차있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머무실 수 없으십니다.

오늘 하루.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조금의 빈자리를 만드십시오. 그것으로 내가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혀있다면 조금 놓아두십시오. 잠시 그것들과 떨어져. 가난한 마음,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보십시오.

그 빈자리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실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통해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찾게 되실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통해 또 다른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황영삼 신부>
  |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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