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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감사의 기도
조회수 | 1,819
작성일 | 09.07.15
요즘 저는 시간만 나면 성지 곳곳에서 자라나는 풀을 베고 있습니다. 물론 손이나 낫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초기라는 것을 이용해서 풀을 베고 있지요. 왜냐하면 사람의 손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풀이 너무나 많은 곳에서 자리고 있거든요. 더군다나 요즘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풀이 엄청나게 많이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 시간이 좀 나서 풀을 베기 위해 예초기를 꺼내어 돌리려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초기를 꺼냈습니다(참고로 저희 집에는 예초기가 2개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시동이 걸리지 않더군요.

저는 어제 이 두 개의 예초기를 고치러 읍내로 나갔습니다. 수리해주시는 분이 이리저리 보시더니만, “고장이 심각한데요? 다 고치면 연락드릴테니 집에 가 계세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오후에 다 고쳤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물었지요.

“아니, 잘 되던 것이 왜 이렇게 갑자기 안 되었던 거에요?”

그 분께서는 휘발유에 물이 섞여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즉, 아마 예초기가 물에 젖었고, 그러면서 물이 휘발유와 섞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지난 장마 때, 예초기에 빗물이 들어갔던 것 같더군요. 결국 저는 수리비 6만원을 지불하고서 예초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니 모든 기계와 물은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휴대전화가 물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제가 아는 어떤 신부님은 휴대전화를 화장실 변기에 빠뜨려서 완전히 고장났다고 하더군요. 또한 자동차에 물탄 연료를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제 차도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요.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더군요(기름값 싼 곳만 골라서 가면 저처럼 됩니다). 이밖에도 기계에 물이 닿으면 결코 좋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물이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세상에 물이 없다면 살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물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것이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고 유익한 것 역시 다른 것과 혼합될 때에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좋아 보이는 마음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순수함이 없다면 어떨까요? 좋아 보이는 그 마음으로 인해서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이중적인 마음을 결코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어린아이의 특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순수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진다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았으면 합니다. 얼마나 순수한가요? 혹시 온갖 복잡한 것들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록 그 복잡한 것들이 하나하나 볼 때는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일 수도 있지만, 순수함을 잃게 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에는 들어가고 봐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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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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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즐겨보는 신문이 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이 신문을 봐 왔기 때문에, 간석4동에 와서도 곧바로 이 신문을 구독했습니다. 특히 신문 배달을 빨리 해주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저로써는 딱 맞는 신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찍 배달되던 신문이 조금씩 배달시간이 늦어지더군요. 사정이 있으려니 생각하고는 기다렸습니다. 5시에서 6시로, 6시에서 7시로, 그러더니 8시나 되어야 배달이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날에는 물이 고여 있는 곳에 신문을 집어 던져서(고의로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전혀 보지 못한 경우도 몇 차례 되었지요. 아무튼 이러한 배송문제로 인해서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신문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전화했지요.

“***신문 간석지국이지요?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거든요.”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10시쯤, 신문을 가지러 성당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신문이 없었습니다. 기다렸다가 12시가 넘어서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역시 신문이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신문 간석지국이지요? 아직까지도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것입니까?”

“1시쯤 갖다 드리려고요.”

“제가 조간신문을 보는 것이지, 석간신문을 보는 것입니까? 사실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불만이 많은 지 아십니까? 점점 늦게 배달되고, 가끔 물웅덩이에 신문이 빠져 있어서 볼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그러면 저 신문 보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는 뚝 끊어 버립니다. 너무나도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이 신문,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 신문 본사로 전화를 걸어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직원이 제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많이 상하셨지요? 얼마나 기분이 안 좋으셨겠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었어요. 참 이상한 것이 그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마다, 제 안에 있는 화가 하나씩 풀리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신문을 해지하겠다고 결심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주세요.’라는 말만하고서 전화를 끊었지요.

사실 말 한마디로 상처를 받고, 또 반대로 말 한마디로 상처가 치유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할 때가 참으로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용서를 청하는 말 한마디를 통해서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자신의 자존심과 이것저것 재는 마음 때문에 더욱 더 어렵게 만들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대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우리 역시 이 세상의 관점으로 똑똑한 사람이 되어 이것저것 재려하고 나를 드러내려고만 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절대로 찾을 수 없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두가 어울려지는 사랑이 가득한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내 행동으로 그 뜻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다면 먼저 용서를 청하세요.

조명연 신부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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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요. 사실 저는 비가 오는 관계로 계속해서 운동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비만 오지 않으면 무조건 밖으로 나갈 생각을 했지요. 도중에 비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어제는 성지에서 유일하게 쉬는 날인 화요일이거든요. 하지만 어제 역시 창밖으로 새벽부터 쉬지 않고 계속해서 비가 내리더군요. 이제는 비가 지긋지긋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군요.

사실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듣는 노래에서도 ‘비’에 대한 노래가 많은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비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요즘처럼 계속해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 이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겨울에 내리는 눈도 그렇지요. 눈이 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눈이 폭설로 이어지면 어떨까요? 더군다나 저처럼 넓은 지역에 내린 눈을 직접 쓸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면서 강아지처럼 좋아할까요? 이렇게 자연의 적당함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도 적당함은 나를 더욱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많이 소유하는 것을 행복의 지름길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들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보았을 때, 부자나라의 국민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가장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더 큰 행복지수를 보인다고 하지요. 또한 로또 복권에 맞은 사람들 중에서 행복한 삶을 꾸리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기사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네요.

이처럼 행복은 과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적당할 때, 오히려 부족함을 느꼈을 때, 행복이 부족함을 채우러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드립니다.”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겠지요. 그리고 이 모습이 완벽한 모습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신다고 하니, 그렇다면 우리 모두 철부지 같이 못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일까요?

그런 말씀이 아니지요. 인간 세상에서 완벽해 보이는 그 모습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는 철부지 같다면 스스로를 낮추고 주님 뜻에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으며, 행복도 그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 완벽하다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을 지향하면서 교만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모습을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서는 가장 못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세를 지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완벽함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완벽함을 추구합시다.

조명연 신부
  |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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