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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주/전주/청주/수원] 예수께선 고향인 나자렛에 가셔서 복음을 전파
조회수 | 1,895
작성일 | 11.01.06
새로운 한해가 시작된지 벌써 몇일이 지나버렸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신 결심들이 모두 잘 이루어지고 있으신지요. 혹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벌써 그 약속들을 깨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우리자신에게 한 약속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 약속들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면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겪었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릴까합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그는 사업에 실패한 후, 57세나 된 나이에 일거리를 찾아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시내의 빌딩 건축현장에서 일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동료들과 뒷골목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빌딩 거리에 있는 작지만 고급스런 식당이었습니다. 식당에 들어선 순간, 그들은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한 식당은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그들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홀에 자리가 없어서 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종업원은 재빨리 흙투성이인 그들의 신발을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버렸습니다. 기가 죽어 마치 죄지은 사람들처럼 고개를 떨구고 머뭇거리고 있던 그들 앞으로 주문한 식사가 나왔습니다.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회사원 차림의 여성이 일어서더니 식탁 위 물주전자의 물을 따라 그들 자리에 놓아주며, 살짝 수줍은 듯 미소 지으며 “물 드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같이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오던 그의 마음을 얼마나 따스하게 어루만져준 친절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1963년 6월에 ‘가능한 친절이라면 모두 함께’라는 표어로 시작한 “작은 친절 운동”의 이야기 중의 한 글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선 고향인 나자렛에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모습을 들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적혀 있는 말씀을 읽으시고 그 말씀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 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2000년 전 주님께서 선포하신 이 은총의 말씀이 우리들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아마 그렇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선 우리들에게 은총을 주셨는데, 우리들의 삶은 아직까지 은총보다는 미움과 절망이 가득한 듯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세상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에서처럼 작은 친절 하나 하나가 모여서 주님께서 선포하신 은총과 사랑이 충만해 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작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작은 사랑이 모여 주님께선 선포하신 은총의 해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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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정훈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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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성령의 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홀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늘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장차 예수님께서 어떤 활동을 하실 것인지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어른이 된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회당에 다니셨습니다. 회당에서는 기도를 바치고, 일반적으로 율법과 예언서들을 읽고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육을 받은 공동체 구성원들이나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방문객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받아들고, 이사야서 61장 1,2절과 35장 5절과 58장 6절을 섞어서 읽고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대목은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양살이에서 돌아왔어도 가련한 처지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어려운 생활을 개선하고 복원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왕들이나 사제들처럼 올리브유로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기름 부음을 받으시면서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루카가 복음을 선포하는 대상자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통치자들의 야욕으로 궁핍해지고 허약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처지는 한마디로 소외입니다. 즉 그런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안팎으로 끊임없이 짓눌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명은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가져다 주고, 사람들을 소외의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구출해 내고 자유롭게 하는 활동을 펼치시는 데 있습니다.

‘은총의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50년 마다 경축한 희년을 말합니다. 희년이 제정된 목적은, 어떤 이유로든 빚을 지게 되어 가족의 소유와 자유까지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떳떳한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희년에는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권리를 무상으로 되찾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읽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제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활동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룩하신 일들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주시는 그분의 모습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특히 소외되고 가난하며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참된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김창환 신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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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이루어진 은총의 해

2009년 1월 21일 새벽 1시부터 5시. 전세 들어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재개발 때문에 길게는 몇십 년 장사하던 집에서 쫓겨나 길거리로 나앉을 처지에 몰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막힌 사정을 이야기라도 해보려 옥상으로 모였습니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경찰 특공대가 새벽에 진압작전을 펼쳐 5명을 죽였습니다. 어떻게 죽였는지는 알지만 모릅니다. 이 사람들을 도심 테러범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법정은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이 비참한 사람들에게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자기 나라 사람을 보호하기는커녕 때려죽이는 정부, 놀랍습니다. 감동은 교회가 이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억울함을 함께 풀어가기 위해 오체투지를 합니다. 단식하며 기도합니다. 천막 치고 함께 생활합니다. 전국에서 사제들과 교우들이 이곳으로 성지순례를 옵니다. 수확한 농산물을 보내고 반찬을 보냅니다. 매일 저녁 미사 하러 이 용산으로 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감동합니다.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하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소리칩니다. 경찰은 방관하고 회사는 깡패 같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토끼몰이 하듯이 몰아가는 전쟁터입니다. 자기 회사 노동자들을 적으로 내모는 일은 놀라움입니다. 교회가 그곳에 함께 있습니다. 그 전쟁터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합니다. 함께 지내며 평화를 중재하는 교회는 감동입니다.

교회인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을 나누어 받으며 함께 머물며 기도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루어진 은총의 해입니다.

<광주대교구 이영선 신부>
  |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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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사랑의 삶을 살아가자.

우리가 행하는 사랑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되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다른 형제들을 사랑한다.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 하느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구약성서에 이미 예언된 메시야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이다. 하느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를 사랑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즉, 신앙인은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 계명은 결코 무겁지 않다(마태 11,30).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4,19)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설사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용서해주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교회를 적대하는 세상과의 투쟁에서 승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고(요한16,33; 19,30),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는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요한 16,33)를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이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되, 당신의 모습을 닮게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마음속에 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사랑은 삶의 본질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행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참된 삶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사랑이 없는 듯이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라고 말한다. 인간의 육정이 성령을 거스르기 때문에 사랑을 행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육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며, 육정을 채우려고만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그 사랑은 자신의 육정과 이익을 구하는 것일 뿐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듯이 느껴진다. “육정이 빚어내는 일은 명백하다. 곧 음행, 추행,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이다.”(갈라 5,17.19-21) 이 안에는 사랑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대로 돌려놓으시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또한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이다.”(갈라 5,22-23)

그러므로 주님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자. 당신 외아들까지 바치는 그 깊은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자. 그리하여 우리 안에 성령께서 머무르시고,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를 가슴에 담아 사랑과 기쁨, 평화와 친절, 진실과 온유의 삶을 살아가자.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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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참된 어부, 영적인 어부

천주교 신자들은 ‘전교’라는 말만 나오면 주눅부터 듭니다. 30년, 40년 신앙생활을 했어도 예비신자 한 사람 인도하여 영세시키지 못한 이가 수두룩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끌어올리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배에 앉아 낚싯줄을 던집니다. 낚싯줄을 던져놓고 ‘물고기야, 이리 오너라’ 하고 앉아 있으니 눈 먼 물고기 한 마리 못 낚습니다. 그나마 낚시 드리우고 조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교를 잘 할까요?

첫째,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어부는 물고기가 미끼에 걸릴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릴 줄 압니다. 미끼는 우리의 좋은 모범입니다.

둘째,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부는 풍랑을 이겨내는 강인한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한두 번 방문하고 거절당했다 하여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거절하는 것은 더 많은 기도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표시입니다.

셋째,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현명한 어부는 고기잡이할 때를 압니다. 이웃이 어려울 때 말로만 위로할 게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도 주어야 하되,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넷째, 물고기에 맞는 미끼를 써야 합니다.
상대방을 올바로 파악하고 뭐가 좋은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 자신을 숨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부의 모습이 보이면 물고기는 미끼를 물지 않습니다. 자신의 학식이나 재능을 드러내려 하면 전교는 실패합니다. 자신을 숨기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청주교구 이중섭 신부>
  |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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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어느 주일 저녁 옆 본당 동창 신부에게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성당 앞에 막 다다랐는데 맞은편 교회에서 나오는 한 무리의 자매님들과 마주쳤다. 모른 척하고 지나치려는데 나를 불러 세웠다. “아저씨, 성당 다니면 구원 못 받아요. 우리는 저녁 예배 보고 오는 길인데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우리 목사님 말씀은 은혜가 넘치고 우리는 구원받고 오는 길이랍니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이미’와 ‘아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우리는 복음서 전체에 깔린 ‘이미’와 ‘아직’의 긴장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이미’ 시작된 심판을 상기시켜 주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3,9) 반면 예수님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구원을 예고하신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1,27)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지나친 공포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거나, 반대로 ‘싸구려 구원’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당신의 사명을 밝히고 계신다. 너무도 당당하고 거침없는 선포다. 바로 이사야의 예언대로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바람이 채워지는 ‘기적’만을 요구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다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다(4,42-­44 참조). 그들에게 ‘이미’와 ‘아직’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가끔 ‘신부’인 나에게 너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는 신자들이나 어려워 말도 못 붙이는 이들을 보면 낯이 더 뜨거워진다. 내 모습은 그게 아닌데 신자들은 너무 ‘완벽한 신부’로 바라봐 주는 것은 아닌가! 태어나면서부터 ‘성직자’는 없다. 성소의 씨앗을 잘 가꾸고 또 사제로서 열심히 살려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사제는 수품을 통해 ‘이미’ 되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사제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존재는 아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는 모든 인생도 그러하리라.

<청주교구 주영길 신부>
  |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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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

‘출세와 돈을 우선시하는 교육과 사회분위기가 청소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난해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에서 수도권 초중고생 6,000명을 대상으로 윤리의식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10억 원이 생긴다면 잘못을 하고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응답한 초등학생이 12%, 중학생은 28%, 고등학생은 44%로 나타났습니다. 남의 물건은 주워서 내가 가진다고 응답한 초등학생은 36%, 중학생은 51%, 고등학생은 62%랍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윤리의식이 낮았습니다. 성장할수록 올바른 인성을 지니고 확고한 신념을 지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우리가 삶의 모범과 표양이 되지 못하였음을 인정하며 성령의 비추임을 희망합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나면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자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습니다. 사실 갈릴래아지역은 유다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존재,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느헤미야와 에즈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일대 종교 부흥을 일으키며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였고, 모든 종교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경신례를 바치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은 작은 마을까지 퍼져있던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말씀의 전례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전통대로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가시어 성경을 읽으시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이사야예언자의 말씀을 빌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예언자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사명을 받은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합니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구절을 읽으신 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유다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경말씀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고, 구세주가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고 이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말씀의 요구에 대한 응답입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보다 날카롭습니다.”(히브4,12) 그러므로 “듣는 가운데에서”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오늘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계시다”(1베드1,24-25).

구원의 말씀은 듣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듣고 행하는 가운데 구원을 이루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01.10
465 94%
[수원] 예수님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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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에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가신다. 예수님은 여기서 복음선포를 시작하시고 회당에서 시작하신다. 회당은 유다인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는 자리이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하나뿐이고 율법에 보면 유다인 13세대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회당이 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사람들은 이 회당에 모여 하느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제사까지 봉헌되었으나 회당에서는 그렇게까지는 못하였고 예배하며 가르치기만 했던 곳이다.

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1. 기도
2. 성경봉독으로 모인 사람들 가운데 7명이 나와서 읽었으며
3. 성경해설이나 가르치는 부분으로 되어있었다. 여기에는 전문적인 설교자는 없었고 회당장이 저명한 사람들을 초청해서 말하게 했고 그 후에 질의응답이 계속되었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 가서 예수께서 나서시어 그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셨다고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이 자라나신 고향인 나자렛을 방문하신다. 나자렛에서도 역시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나자렛 회당에서 읽으신 성서는
이사 61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그 내용은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예언된 이사야 61장의 그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다. 즉 이사야 61장의 말씀대로 당신이 누구이며, 이 세상에 오시어 하실 사명이 무엇이며 하실 일이 어디에 있는가를 사람들 앞에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이 그것이었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의 사명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성화가 우선 이지만 다른 이들에게, 이웃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그 사명의 근본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이 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나의 구원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해방을 위해, 즉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그 말씀이 나를 통해서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을 통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대희년을, 성년의 은총을 사는 것이며, 그 은총을 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을 다짐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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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1.06
465 94%
[수원] 인간, 종속적인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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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이 위대한 항해사가 되는 꿈을 안고 세계를 횡단한 유명한 한 항해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그 항해사에게 많은 질문을 쏟아 부었습니다. 특별히 항해를 잘 하기 위한 방법으로 바람의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장님, 저에게 바람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 바람? 잘 모르겠는데?”
“아니, 위대한 선장님께서 어떻게 바람에 대해 잘 모르실 수가 있습니까? 바람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항해사의 기본이 아닙니까?”
“글쎄, 잘 모르겠네.”
그래도 계속 다그치자 그 항해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바람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어떻게 불게 되고 어느 방향에서 불어올지 전혀 예상도 할 수가 없네.... 다만 불어오는 바람을 보고 언제 닻을 올려야 하고 언제 닻을 내려야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성령의 이끄심에 어떻게 잘 순종하느냐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다시 돌아오셨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그리고 이사야서에 예언된 당신의 사명을 읽으신 다음 바로 이 자리에서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왜 예수님께서 미리 복음 선포를 하시지 않고 나이가 서른이 되실 때까지 기다리셨을까요? 더 먼저 복음 선포를 시작하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즉, 성령님께서 당신에게 내리기를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이 곧 어떠한 소명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님이 예수님께 내렸을까요? 물론 영원으로부터 성령님과 함께 계셨지만, 특별히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고 또 오늘은 나자렛으로 이끌고 앞으로는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기름이 곧 성령님의 상징입니다. 세례 때나 견진 때, 혹은 병자성사 때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곧 성령님의 임하심을 상징하는 성사적 행위입니다. 그리스도란 곧 그리스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세례와 견진을 받으면서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이니 모두 작은 그리스도들입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지 못해도 그 바람에 잘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항해사라면 우리 또한 성령님의 이끄심에 잘 순응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야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란 성령님을 받는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은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마치 자녀가 아닌 머슴의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결국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를 요구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큰 멍에를 짊어지는 것처럼 생각 됩니다. 이전에 하던 것들도 이제는 맘대로 할 수 없게 되고, 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성령님이 이끄시면 자신을 버리고 그 소명을 따라야합니다. 마치 머슴살이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성자께서도 성령님을 받는 동시에 인류 구원의 소명을 부여받고 오늘 그것을 선포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엇 하나에게는 종속되어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즉, 죄의 노예가 되느냐 하느님의 노예가 되느냐의 갈림길에 있는 것입니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듯이 누구나가 한 주인만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떤 누구도 이 선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안 믿고 자신은 자유롭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다른 무엇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 독립적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상대가 없이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도 성자와 성령님이 없이는 온전할 수 없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느님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무엇에든 종속되어야 하는데 바로 하느님의 머슴이 되고 그 분이 보내시는 성령님의 이끄심대로 소명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오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종으로서 당신 사명을 성령의 힘으로 수행하게 되어 결국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소명에 동참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는 삶이 무엇인지 누구나가 조금씩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종속되어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힘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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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01.06
465 94%
[수원] 그분과 함께하는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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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소심해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성당 활동도 뒤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하고자 했지만 책임자로는 활동할 엄두를 못 냈습니다.

한번은 중학교 때 학생미사 독서자로 선정되었는데, 독서대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일주일 전부터 하루에 몇 번씩 성경구절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드디어 미사가 시작되고 제가 독서를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도 안 틀리고 무사히 읽고 내려와 안도의 숨을 쉰 후에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너, 숨도 한번 안 쉬고 읽더라. 그리고 너무 빨라서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일주일 동안 하루에 몇 번씩 성경구절을 읽어 다 외워버렸기에 단숨에 읽어 내려 간 것입니다.

이런 성격 탓인지 저의 가족은 제가 사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뒤늦게 사제의 꿈을 갖게 되었지만, 신학생 시절에도 세미나를 한다든지 대표로 발표하는 일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동창들 앞에서 강론 연습을 하는 것도 여전히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제품을 받고 강론대에 서는 순간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울렁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은총의 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저에게 내리신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말씀이 바로 그 자리에서 성취되었듯이 저에게도 사제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성사의 은총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이루어짐을 느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길은 열려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구원은 우리 각자가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한평생을 마무리 하는 순간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한테서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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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건복 신부
  | 01.06
465 94%
[부산] 루카의 놀라운 시간과 공간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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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은
저마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된 시점을 시사하고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이 세례자 요한의 투옥(마르 1,14; 마태 4,12)과 동시에 시작되어 그 첫 무대가 갈릴래아 지방 호숫가 근처인 것으로 보도한다.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강까지 먼 길을 가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1,9) 다음 광야에서 40일간 공생활 준비시간을 가지셨다. 여기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고(1,13), 요한이 투옥되자 곧바로 갈릴래아로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마태오는
마르코와 같은 과정을 더욱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마태오는 예수의 세례 장면(3,13-17), 악마의 유혹 장면(4,1-11) 등을 세세히 열거하고, 갈릴래아 지역에 속하는 즈불룬과 납달리 지방의 가파르나움이라는 장소를 구체적으로 지명하여 이곳에서 공적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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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복음을 살펴보기 전에 요한복음을 먼저 보자.

요한복음은
그 시작부터가 공관복음과 전혀 다르다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요한복음은
프롤로그(서문)에서 우선 성자이신 말씀의 선재성과 말씀을 통한 세상창조와 말씀의 육화사건을 계시하고 있으며, 이 계시의 증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킨다.(1,1-18)
이어서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역할을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다.
그런 다음 요한과 예수의 대비 구조를 도입하여 요한 스스로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예수가 전부임을 고백하게 한다.(1,19-28)
요한은 스스로 세상에 와 계신 예수를 하느님의 어린양,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로 증언하면서 자신의 제자 등 모든 것을 점진적으로 예수께 이양(移讓)시킨다.(1,29-37)

요한의 이양작업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접촉에서, 대화와 고백으로 발전하고, 나타나엘의 고백과 예수의 계시말씀으로 완료된다.(1,38-51)

이러한 점진적인 이양작업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확실하게 복음선포의 정면(正面)에 서신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푸신 첫 번째 기적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의 믿음을 얻어내는 공생활의 시작을 선포하신 것이다.(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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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은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가?

루가복음이
예수의 전사(前史)에서 다루고 있는 12살 시절의 어린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성가정의 나자렛 생활에 관한 짧은 보도는 예수의 성장과정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2,41-52)

루가복음도
상당부분을 할애하여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활약상, 특히 인상적인 회개설교를 제보한다.(3,1-18) 그런데 요한의 메시아 도래선포와 예수의 세례사건 사이에 헤로데에 의한 요한의 투옥사건(3,19-20)이 보도되는 점은 좀 특이하다. 루가가 예수의 세례 장면(3,21-22)에 요한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막연히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고 서술하는 점도 이상야릇하다.
그런 다음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그 서두에 “예수께서는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다.”(3,23)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에 광야에서의 유혹(4,1-13)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세 가지 유혹의 순서가 마태오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이 말하고 있듯이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가신다.(14절)
갈릴래아에 오신 예수께서는 먼저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가르치셨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신 내용이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느 장소와 시점에 두고 말하기가 어렵다. 이 점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부분이다. 루가는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시간과 공간 개념을 가지고 있다.

루카가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예수께서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다.”(3,23)고 하지만, 이것을 공생활 시작의 시점으로 볼 수는 없다. 세례자 요한의 활약과 예수의 세례 장면 사이에 요한의 투옥사건을 삽입한 것도, 예수의 세례에서 요한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것도 문맥상 매끄럽지 못한 편집으로 지적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이유들로
루가의 심오한 시간과 공간 개념을 무시할 수 없다. 루가는 마르코나 마태오복음에서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시간적 서술에 묶어두지 않았다. 루가는 복음선포의 시간적 서술보다 복음이 선포되는 원동력을 더 강조한다.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도와 성령의 능력이다.
루가는 ‘기도’라는 단어를 복음에서 28번, 사도행전에서 30번, ‘성령’이라는 단어를 복음에서 17번, 사도행전에서 57번 사용하고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와 서간들에 비하여
엄청나게 높은 빈도(頻度)의 사용이다.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도하셨음을 강조한 것도,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오신 것도,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18-19절)의 근거와 내용을 밝히는데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18절)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인용(61,1-2)으로 시작한 것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다.

다음으로 루가의 심오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루가가 파악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는 말씀에 담겨있다.

바로 오늘, 그리고 이 자리이다.

루가가 말하는 시간은 ‘오늘’이고, 장소는 ‘여기’이다.
즉, 기도와 성령의 능력이 오늘과 이 자리에 집중되는 것이다.

따라서 루가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느 시점과 어느 장소에 국한하여 보지 않고 언제나 ‘지금과 여기’로 보는 것이다.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바로 “지금과 여기”에 예수님의 공적인 복음선포와 활동은 실존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적인 복음선포와 활동은
교회의 봉사를 통하여
오늘, 그리고 여기에
또한 실현되어 실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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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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