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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정부/서울]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분이 드는 단어는?
조회수 | 2,515
작성일 | 11.01.06
어떤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분이 드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독자들은 ‘버림받다, 사랑받을 수 없다, 믿음을 잃어버렸다…….’등의 부정적인 단어를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독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그 독자에게 쏠렸지요. 그 독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그러나’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일거에 무효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어일 수밖에요.”

이 독자의 말에 공감이 가십니까? 가장 슬픈 기분이 드는 단어가 과연 ‘그러나’라는 단어일까요? 인간의 말은 이런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단어들을 부정적이고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부족한 인간의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은 반대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단어들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단어로 바꾸어 놓습니다. 제가 이 독자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큰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어떻습니까? 앞선 독자의 말과는 달리 모든 것이 무효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유효한 말로 바뀌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장 슬픈 단어로 보였던 것이 가장 큰 기쁨의 단어처럼 보이지 않나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희망과 기쁨을 전해주시기 위해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며 회당에 들어가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즉,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은혜로운 해가 주님을 통해 선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시지요.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이들은 모두 절망과 슬픔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님을 통해서 기쁨과 희망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가장 슬픈 단어로 가득 차 있던 나의 삶을 가장 기쁜 단어로 가득 찬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희년을 선포하신 주님만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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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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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인천 교구에 큰 경사가 있었습니다. 수도회 신부 포함해서 18명의 새 사제, 그리고 20명의 새 부제가 어제 인천 교구에서 탄생했습니다. 3시간이 넘는 전례, 그러나 하느님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이 자리에 모인 젊은이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있었던 제 동창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벌써 서품 받은 지도 10년째다.”

새 신부들의 모습이 바로 10년 전의 우리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참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그 1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라는 반성을 해봅니다.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항상 ‘바쁘다’를 외치고 있었지요.

서품을 받으면서 정말로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었건만, 주님 마음보다도 내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살기에 더 바쁘게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때의 첫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순수하게 주님 앞에 나가겠다고 다짐했던 그 첫 마음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첫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색되어가며, 또한 계속해서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라고 말하면서 세상과 타협을 해나갑니다. 그러면서 주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을 왜 잊어버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공생활의 시작에 서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공적인 선포를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마음을 고쳐먹고, 그 소식을 받아들을 자세를 가다듬으라는 것이지요.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쏙 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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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예수님께서 새기신 말씀

사제품을 받으려는 사람은 서품을 받기 전에 평생 간직할 자신의 성구(보통 ’서품 성구’ 라고 합니다)를 하나 정합니다. 그 말씀이 자신 안에서 살고, 자신 역시 그 말씀을 따라 그 말씀 안에서 살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품 성구를 정할 때 많이 기도하고 묵상하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서품 성구와 그것을 정한 사람을 놓고 보면, ’그 신부님에게 맞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온 것일 겁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라는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겉으로는 제가 선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나’, 사제로서 나’를 부르신 하느님께서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들려주신 것입니다. 제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명,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 전 서품 성구를 정하기 위해 묵상하던 때를 생각하면서, 예수님께서 어떠한 심정으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들려져야 했던 말씀 이전에, 아들 예수님께 주어진 아버지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셔야만 할 주님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과연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도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의 환호와 경외심보다, 이 말씀을 당신의 입으로 선포하셔야 했던 예수님의 가슴 벅참과 떨림이 제게는 오히려 더욱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제가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봅니다.이 말씀을 선포하면서 앞으로의 삶이 선명하게 지나쳐 갑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그래도 끝까지 가야할 이 길... 떨리는 마음으로, 벅찬 가슴으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제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말씀으로 하느님은 제게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처음에 읽으셨던 그 말씀, 아니 당신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 하느님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 한결같이 한 길을 가셨습니다. 부족한 저이지만, 저 역시 제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며 , 주님의 길을 흐뜨러짐 없이 걸어가려 합니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은 어떠한 말씀을 새기고 사시는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의 가슴 깊이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은 어떤 것인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 맡겨진 주님의 사명은 어떤 것인지요?
사랑하는 벗님들은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며, 주님의 길을 기쁘고 열심히 걷고 계신지요?

<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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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 (Edward T. Hall)은 ‘프로세믹스’(Proxemics)라는 근접학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친밀한 거리, 개인적 거리, 사회적 거리, 공적 거리에서 느끼는 감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지요. 즉, 45Cm 이내의 친밀한 거리에서의 어투, 말의 내용, 표정, 행동방식 등은 120~360Cm의 사회적 거리에서 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권력자 옆에 있는 사람을 들지요. 권력자 옆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은 항상 실세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친밀하지 않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에 권력자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가장 가깝고 그래서 실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실제로 제 옆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을 떠올려보면 다 친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만약 낯선 사람이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이 제 곁에 있으면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제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누구십니까? 그 사람이 제일 편한 사람이며,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떠올리다보니, 짧은 이 세상의 삶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는 누구와 친해져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가요?

주님과 45Cm 이내의 친밀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신 것 같습니까? 가족을 제외한 친밀한 관계를 생각하면, 많이 알기 위해 대화를 나눴고 나의 관점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는 어떤가요?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 참석하는 것으로 과연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맨 앞자리도 아닌 맨 뒷자리를 선호하고, 미사 시간에 약간 늦게 오고 미사가 끝나기도 전에 할 일이 있다며 서둘러 일어나 나가면서 과연 친밀한 관계라 말할 수 있을까요?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1장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회당에서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기쁜 소식을 정말로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과 함께 하는 친밀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무거운 짐처럼 불편하게 생각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것을 부끄러운 행동처럼 여겨서도 안 됩니다.

이제는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우리가 됩시다. 주님께서 가장 신뢰하는 그래서 당신의 옆자리를 내어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쁜 소식이 삶 안에서도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힘찬 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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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합니다.
결과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윤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세속오계, 삼강오륜은 인과응보의 원칙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를 토대로 법칙을 만들고, 법칙을 찾아냅니다. 과거로부터 현재의 상황을 유추하고, 현재로부터 미래를 예측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는 곳이 있습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기존 과학의 법칙과 방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용서에 대해서 일곱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위에서 죽으신 사건은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코로나 19는 무섭게 전파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86,000,000 명이 확진되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 인구 80중에 1명 정도가 코로나19에 감염된 숫자입니다. 미국은 16명 중에 1명이 감염될 정도입니다. 한국은 800명 중에 1명이 감염된 정도입니다. 코로나19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일상이 생겼습니다.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손 씻기’입니다. 이는 코로나19의 감염으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대부분의 행사가 취소되었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의 예측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보급되어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올려진 ‘다미안 신부’님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몰로카이 섬에서 나병환자들과 지냈습니다.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손 씻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나병환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함께 식사하고,
환자들을 방문하였습니다.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집을 지었고,
수도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았던 나병환자들은
다미안 신부를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정부도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지원을 하였습니다.
건강하던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몰로카이 섬에 묻혔습니다.
봉사자들이 제2의 다미안 신부님이 되어서
몰로카이 섬으로 왔고, 신부님들이 왔습니다.
2,000명이 넘던 나병환자는 점차 줄어서 지금은 없습니다.

인과응보의 ‘틀’이 지켜지는 사회가 바람직합니다.
과학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는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세상에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인과응보와 과학의 법칙을 넘어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3차원의 세계에 살지만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넘어서 지복직관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의 친구가 되었고,
스스로 나병환자가 되는 길을 갔습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인과응보를 넘어서 자연법칙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인과응보의 ‘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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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1년 1월 7일
  |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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