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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주님 공현 후 금요일 독서와 복음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조회수 | 1,446
작성일 | 11.01.07
제1독서 : 성령과 물과 피
요한 1서 5장 5절-13절

사랑하는 여러분,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6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9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10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3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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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5장 12절-16절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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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병 환자 시인 한하운 님의 ‘파랑새’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나병이 주는 고독과 사무치는 서러움이 묻어 있는 시입니다.
그 흉해진 얼굴을 내밀 수 없어 소록도 외딴섬에 꼭꼭 숨어 살아야 했던 시인은, 죽어서라도 파랑새가 되어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오르고 싶어 합니다. ‘푸른 슬픔’이 가슴 저미게 다가오는 노래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런 슬픈 노래를 부를지 모릅니다.
육신의 얼굴은 열심히 가꾸며 살지만, 정녕 우리의 흉한 내면의 얼굴은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거짓과 시기, 질투와 분노, 온갖 욕망들이 종기처럼 돌출해 있는 내면의 얼굴은 나의 얼굴이 아니라고 애써 외면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혼의 나병’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병의 특징은 감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살점이 하나둘 떨어지고 더욱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육신의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혼이 병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아무런 감각 없이 점점 더 본디의 맑고 깨끗한 얼굴을 잃어 갑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 환자를 치유하시던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제 우리 내면을 치유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 앞에 나서서 겸손되이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사람, 과연 그 사람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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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1월 7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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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치시며
왜 굳이 그의 몸에 손을 대셨을까요? 사실 다른 대목에 보면 한 말씀만으로도 병을 치유하셨습니다.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그동안 나병 환자를 그 누구도 만져 주지 않았다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만져 줌’(tou+h)을 통한 사랑을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습니다.
원숭이를 상대로 실험했습니다.
어린 원숭이를 만져 주지 않았더니
우울증과 여러 질병에 시달리다가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버려진 아기들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결과가 발견되었습니다.
생후 10주에서 6개월 사이의 아기들을 조사한 결과, 엄마가 잘 쓰다듬어 준 아기는 그렇지 못한 아기에 비해 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고, 또 잘 토하거나 설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다른 연구로는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신경질적이거나 우울증이 있는 성인 여자는 포옹 횟수가 많고 포옹 지속 시간이 길어질수록 질병에서 회복되는 속도가 빨랐습니다.

다른 이에게 사랑의 손길로 다가가는 행위는
그 자체로 생명을 줍니다. 아니,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저절로 손이 가게 되고 그 손이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엄마의 손이 약손이 되고, 예수님의 손이 생명의 손이 되었겠지요. 두 손 다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파괴의 손입니까?
생명의 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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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3년 1월 11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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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은 한번 손상된 신체가 다시 복구되지 않는 악성 피부병이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거나 눈썹이 빠지며, 코와 입이 문드러져 얼굴이 변형되어 사람 형상이라 보기 힘들 정도다.

“나는 사람이 아닌 문둥이올시다.” 했던 시인 한하운의 말 그대로다.
그 가족은 제 피붙이이지만 동네로부터 격리시켜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원망 말라. 하늘이 내린 병이라는데 어쩌겠느냐?’

‘하늘이 내린 병?’
나병 환자는 귀가 번쩍 뜨였다. ‘아, 길이 있다! 하늘이 내린 병이라면 하늘이 보낸 이가 낫게 할 수 있는 거다!’ 벌떡 일어난 그는 단숨에 쫓아가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 “하늘이 보낸 분이시여, 하고자만 하신다면 저를 깨끗이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손끝에서 천상의 자비가 전해졌다. “깨끗하게 되어라!”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 했다(마태 16,19 참조).

하늘이 내린 병은 하늘에 약이 있고,
인간의 마음에서 생긴 병은 마음을 바꿈으로써 치유한다. 욕심 부려 얻은 번뇌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풀고, 분노로 생긴 화병은 체념과 자비심으로 치료한다. 섭생이 잘못되어 얻은 병은 좋은 음식과 식습관으로 고치게 될 것이다. 부부간의 단절은 대화로 풀고…….

불치병이란 본디 없다!
나병 환자는 깨어 있었기에 치유될 수 있었다. 자신이 ‘하늘이 내린’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 그러므로 치유의 길은 분명 있다는 점을 깨침으로써 그 길을 찾은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불행하게도 자신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어떻게 생긴 병인지를 모른다. 치유의 길을 알지 못한 채 죽어 간다. 나병 환자에게서 배우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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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5년 1월 9일
  |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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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신 분이십니다(요한 16,33 참조).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 청년처럼, 선뜻 그분의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아직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면, 우리도 우울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집착이 고통이기에 끊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정으로 세상 것에 집착하는 병으로부터 치유되고 싶다면,
주님께서 주려고 하시는 모든 것이 늘 좋은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가난해지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믿어야 가진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께서 주시는 것이 언제나 행복으로만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늘 좋은 것만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예수님께 희망을 걸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가 군중 가운데를 지나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는 예수님께만 행복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한 일이라면 언제든 하고자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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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매일미사 2019년 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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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은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이의 요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장면입니다. 절박한 심정의 사람은 무엇이든 적당히 하거나 대충대충 넘기지 않으며, 간절함을 담아 진실되게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그대로 다른 이에게 전달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이야기뿐 아니라
치유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절박함을 네 권의 복음서는 담백하게 전합니다. 그들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을 유일한 기회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체면을 차릴 생각도 없이 길가에서 소리 높여 주님께 외치기도 하고(마르 10,46-48 참조), 많은 군중 속에서도 주님을 찾아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도 하며(마르 5,21-34 참조),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며 염치없이 악령에 시달리는 자신의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마르 9,14-29 참조).

이렇게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곧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뜻이며, 이성이나 논리를 앞세우는 우리의 생각이 아닌,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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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
매일미사 2021년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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