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평일강론 (홀수해)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5 94%
[부산/대구/청주/수원] 지금 그리고 여기
조회수 | 1,696
작성일 | 11.01.07
루카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느 시점과 어느 장소에 제한하여 보지 않고
언제나 지금과 여기로 보았다.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집약된 예수님의 지금과 여기에서의 복음선포와 활동이 곧 그분의 공생활이며, 이 공생활은 바로 구원의 행위로서 언제나 지금과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루카 복음에서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개념으로 존재하는 메시아의 구원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루카에 의하면 메시아의 구원은
어제 존재하였거나 내일 존재하지 않는다.

메시아의 구원은
늘 ‘지금과 여기’에 존재하며,
그것도 그냥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實存)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주변의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내가 나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나는 실존하게 되는 것이며,
주변의 존재 또한 나와의 관계를 통하여 실존하게 된다.
그저 존재함은 의미가 없다.
무엇이든 실존할 때 의미를 가지며,
존재해야 할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메시아의 구원 또한 독자적으로 존재할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주변과 관계를 맺고 실존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며,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나병환자들,
이는 자신의 피부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철저하게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 더 아프고 슬픈 사람들이다.

사람이 병을 얻어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로부터 간호라도 받는다면 그나마 행복한 처지이니 아쉬워할 것이 적다.

그러나 나병에 걸려 공공연히
‘부정(不淨)한 자’로 낙인찍혀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소외되어 살아야 하는 아픔은 육체적 고통에 심리적 고통까지 더하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아픔이다.(레위 13-14장 참조)

예수께서 참다운 메시아이시라면
이러한 처지의 나병환자에게
첫째, 병의 치유와
둘째, 관계의 회복,
둘 다를 선사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메시아의 구원은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는 공존(共存)의 관계를 통하여 치유와 실존을 함께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메시아적 구원은
‘지금과 여기’라는 현실을 파고들어
새로운 관계의 실존을 구원의 대상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인도에 복음이 선포된 것은 1,500년대의 일이었다.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가 활약할 당시만 해도 인도는 유럽의 열강들이 선호하는 정열의 선교지역이었으나 17세기 초부터 유럽교회 내부의 문제로 선교의 열정은 수그러들고 인도는 영국의 지배에 들게 된다.

1813년 영국령 인도가 선교사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중에 1885년에 인도에 도착한 메리 리드(Mary Reed)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할까 한다.

<메리 리드> 선교사는
본국을 떠나 인도에서 그리스도의 선한 사업에 힘쓰고 있었는데, 그녀는 한 가지 고민으로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쌍한 처지에 있으며 비참한 생활을 해 나가는 나병 환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나병 환자를 구제할 변변한 방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메리 리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는데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나병환자 수용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병은 전혀 낫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선교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정밀 검진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손가락은 점차 감각을 잃었고 얼굴에는 반점 하나가 생기더니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의사는 그녀의 질병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녀는 나병에 걸린 것이었다. 이 사실을 메리 리드도 알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하는 안쓰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메리 리드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제게 나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인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 있는 나병 환자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메리 리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녀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였던
인도의 나병환자들에게 돌아가
1943년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살았다.
이것이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아 있는 메시아적 구원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465 94%
루가 5,12-16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인 오늘은 이번 한 주간동안의 복음에 대해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월요일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화요일은 오병이어의 기적, 즉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야기가 나옵니다. 수요일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에 대해 나옵니다. 목요일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을 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독서는 모두 요한1서의 말씀으로써 성령과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양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한 일을 기념하는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온 인류에게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드러나심을 의미하는 축일입니다. 그 주님 공현 대축일 후의 일주일 간의 복음은 모두 한 가지 주제로 이어집니다. 즉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셨는데, 그것의 목적은 월요일의 복음인 “회개하여라. 하느님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고, 화요일의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선 어떤 예언자 보다 더 위대한 예언자의 모습을 나타내시고, 수요일의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언자가 아닌 주님, 구세주의 모습을 드러내어 주십니다. 그리고 목요일의 복음은 구세주로써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과 눈먼사람은 보게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겐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음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의 나병환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나병을 전생에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병이 생기면 환자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알고 있던 사람, 사랑했던 사람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몸이 썩어 문드러짐과 동시에 죄인이 되었고, 사람이하의 취급을 당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도 사람들로부터도 버림받고 배척당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큰 고통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배척당한다는 느낌일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즉 오늘 복음에서 전해주는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 버려지고 소외받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 하루하루의 힘든 삶 속에서 불평불만을 하기가 참으로 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만나 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 어렵고 소외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정훈 스테파노 신부
  | 01.07
465 94%
[대구]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어떤 일을 하신 분이실까요?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의 통로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시고자 오신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영광 중에 오셨더라면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더 쉽게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가복음 5장 17절 이하에 나오는 중풍병자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와 그를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수군거립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어느 편이 더 쉽겠습니까? 당연히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우리에게 불치병을 하나라도 제대로 치유할 능력이 있습니까? 고명한 의학박사라도 그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 앞에 놓여진 중풍병자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려 온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에게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치병이 천벌이라는 무서운 생각... 이러한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중 누구하나 그래도 너는 하느님께 사랑 받고 있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절망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신 하느님 앞을 막아서서는 자신도 그 문을 들어서려 하지 않으면서 남들까지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 앞에 예수님은, 하느님은 모든 이의 죄를 없애주시는 사랑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깔고 누웠던 요를 걷어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속 편치 않은 말, ‘하느님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말을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 해서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를 용서해주셨고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말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한 판 승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성서 이곳 저곳에서 그들 사회의 통념을 깨는 통쾌한 일화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시몬의 집에 찾아온 죄 많은 여인,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 로마 백인대장, 해안지방에서 만난 이방인 엄마 등등. 예수님은 이처럼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 무거운 짐이 되는 사회통념이 율법으로 탈바꿈하여 거기에 짓눌리는 사람들,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끊임없이 샘솟는 생명수가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가 그분에 관해서 미리 고백했던 대목을 읽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난 그들, 그분의 음성을 들은 그들은 이제 하느님 나라를 보게 된 것이며,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자리에서도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의 복음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살아 움직이도록 여러분을 사랑 속에 놓는 순간 여러분도 이미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대구대교구 하상범(바르나바)신부>
  | 01.08
465 94%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요한1서5,5)
---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마지막 날에, 자신이 살아온 삶의 결과가 절대적인 희망으로 이어지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부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열심히 당신 뜻을 따랐으니, 당신 약속에 대한 희망을 갖고 당신 품으로 돌아간다는 고백이 가능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표현일 것입니다.

좀 더 신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죄를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찬사일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이겠지요. 삶을
열심히 산 결과가 죽음을 잘 준비한 결과와 일치하는 사람들일 테니까요.

우리 그렇게 살도록 합시다. 열심히 사랑하면서 열심히 용서하면서 열심히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요한1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사람이 세상을 이긴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서 증명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 진리로 믿으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새로운 한 해, 새로운 오늘, 다시 주어진 기회임을 감사하면서 복음적 실천을 하는 우리이기를 희망합니다.

<김대열 신부>
  | 01.10
465 94%
[청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과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답은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광야’로 가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달콤한 자리를 떠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작은 탈출입니다. 광야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6) 기도를 통해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또 모든 것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숨결이라고 합니다. 어떤이는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것입니다.” 나의 갈증과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줄 물만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사막을 죽기 살기로 건너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며,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키킹신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더라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듯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병에 걸린 사람이 엎드려 청한 것처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5,12)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것은 ‘모든 것은 주님께 달려 있고, 나는 오로지 주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믿음의 자세가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자세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기도한 나병환자의마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는 공공장소에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혹 누가 가까이 오면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려있습니다.’하는 표현입니다. 또한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만이 저의 희망입니다.’하는 순종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분 앞에 피조물로써 경배하는 자세입니다. ‘당신만이 저의 모두입니다.’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올 때 취할 자세는 바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자세입니다. 그 안에 치유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손을 내밀어 병자에게 대시고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5,13)며 나병을 치유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앓고 있는 영적, 육적 모든 병을 치유해 주시기를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합니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을.....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01.10
465 94%
팔레스티나에는 두 종류의 문둥병이 있었다.
하나는 나쁜 피부병과 같은 것으로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었고,
또 하나는 작은 반점에서 시작하여 그 반점의 균이 살을 파먹고 들어가서 병자는 손이나 다리, 코와 귀 등이 떨어져 나가는 무서운 불치의 병이 있었다. 이에 대한 규례가 레위 13-14에 나온다.

나병환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가정을 떠나야 하고 마을에서 격리되어 사람들과 상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는 것은 살아있지만 죽은 시체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병환자는 가는 곳마다
“불결하오! 불결하오!”하고 소리를 쳐야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무서운 것은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자기 학대라는 무서운 병에 걸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병자를 치유해 주신다. 다른 사람들은 기피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신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감히 상대하려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손을 내미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멸시하고 또 쓰라린 수치로 가득 차 있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고쳐주듯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해 주시고자 언제나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의 나병환자와 같이
우리는 주님 앞에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손댈 수 없는 자에게까지 손을 대시고,
사랑할 수 없는자를 사랑하시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향하고 있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알아야 하며, 내 자신이 그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도 또한 다른 이를 그러한 사랑과 용서로써 대하여야 함을 나병환자의 치유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자신의 모습,
많은 경우 죄로 인해 더럽혀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 앞에 진실하게 인정하고 그분의 용서를 치유를 청하며, 용서받은 우리 자신이 이제 우리의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줄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언제나 용기를 갖고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1.07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480   [수도회]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3] 2005
1479   [부산/원주/제주/수원] 소작인이 강도가 되기까지...  [6] 2652
1478   [인천/서울/의정부] 나만 잘되면 그만이리라 생각  [3] 2378
1477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죽여 버리자)  [5] 1974
1476   [수도회] 누가 더 불행한가?  [3] 2032
1475   [부산/제주/원주/전주/수원] 부자와 거지 라자로  [6] 2749
1474   [인천/의정부/서울] “나는--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5] 2228
1473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  [6] 1912
1472   [수도회] 섬김의 리더십  [8] 1916
1471   [부산/원주/제주/청주/수원] 예루살렘으로 가는 두 마음...  [7] 2290
1470   [인천/서울]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5] 3048
1469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사람의 아들도 섬기러 왔다)  [6] 1955
1468   [수도회] 하느님 앞에 우열 없이  [5] 2057
1467   [수원/청주/전주/원주] 율법의 근본 정신!  [5] 2494
1466   [인천/서울] 진정한 믿음이란?  [3] 1937
1465   (자)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6] 2139
1464   [수도회]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  [5] 2080
1463   [부산/제주/청주/수원/원주/전주]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풀어라.  [10] 2268
1462   [인천/서울] 사랑하지 않을 이유…….  [3] 2126
1461   (자)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남을 용서해야 용서받는다)  [7] 1869
1 [2][3][4][5][6][7][8][9][10]..[74]  다음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1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