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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작은 자로 남으십시오
조회수 | 1,732
작성일 | 11.01.07
어미개가 새끼를 낳을 때 마다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입니다. 학교 돌아오자마자 책가방 휙 던지고는 개집 주변을 떠날 줄을 모릅니다. 좋아 죽습니다. 안고, 쓰다듬고, 머리 높이 까지 올렸다가 내렸다가...

한 동안 덩치 큰 개들은 찬밥입니다. 아이들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때로 어리다는 것, 작다는 것,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나이가 7-8세 되고, 체격도 어른만한 큰개는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습니다. 누구도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예뻐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녀석들 커졌을 뿐만 아니라 그간 세상 살아오느라 산전수전 다 겪고, 살아가는 법도 다 터득했고, 노련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보잘 것 없고, 말썽 많고, 때로 배은망덕한 우리를 이토록 극진히 사랑하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의 어딘가가 잘 나서 그럴까요? 특출해서 그럴까요? 아니면 우리가 쌓아올린 선행이나 공적을 보시고 사랑하실까요? 우리가 큰 인물, 대단한 인물이라서 그럴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측은함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작음, 우리의 가련함, 우리의 기가 한풀 크게 꺾인 모습, 우리의 비참함 때문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 인간의 작음과 측은함이 하느님 연민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가 구원이라는 진리를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환우, 그의 인생은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나병이 깊어져 온 몸으로 번졌습니다. 마땅한 치료약도 없던 시절, 그의 하루하루는 정말 혹독했습니다. 비참한 하루를 끝내고 차디찬 동굴 안에 몸을 눕히면서 드는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겠습니까?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빨리 하느님께서 나를 데려가셨으면...” 다른 한편으로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말짱한 몸으로 가족들에게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여지없이 아침 해는 떠오르고, 강물에 비친 얼굴은 어제보다 더 심해진 상태로 죽음 같은 하루를 또 다시 맞이하곤 했습니다.  

이런 나환우의 고통을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모른 척 하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 한 마디로 그를 죽음과도 같은 투병생활을 끝내게 하십니다. 보송보송한 태초의 피부로 되돌려주십니다.  

인간의 불행 앞에 절대로 가만있지 못하시는 자비의 하느님 그 실체를 명확히 볼 수 있는 참으로 은혜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요즘 와서 자주 드는 생각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절대로 큰 사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절대로 높은 사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절대로 기대치를 높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니까요.  

낮은 곳에 서 있다 보면 좋은 것 한 가지는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냉대에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은 끝까지 작은 자로 남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치유 받은 나환우처럼 하느님 앞에 우리의 허물과 나약함, 죄와 고통을 낱낱이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유해주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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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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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감각의 회복을 위하여...

나병이 지닌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랜 잠복기를 거쳐 서서히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병이 깊어지면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증세 중에 하나가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인데, 피부가 촉각, 통각, 온도 감각을 상실하게 되면서 화상을 자주 입게 됩니다. 뜨거운 것을 만졌는데도 불구하고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상처가 많아지게 됩니다.

따지고 보니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미각을 지니고 있기에 적정량의 소금이나 설탕을 섭취하게 되어 건강을 유지합니다. 통각을 지니고 있기에 미리 미리 큰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배속 어딘가에서 마치 할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는 것은 위장이나 소장, 대장 어딘가에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통증으로 인해 우리는 몸의 현재 상태를 예측하고 대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 증상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은 미련한 것을 넘어 아주 위험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의 영혼도 나병에 감염될 때가 있습니다.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져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큰 죄 속에, 엄청난 신앙의 오류 속에 빠져 들어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서 영혼의 나병이 들렸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영적 무감각 상태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증세가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은 돌아볼 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이웃의 탓, 환경의 탓, 세상 탓으로 돌립니다.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영적 무감각 상태에서 체험했던 것처럼 해야 할 바는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바를 행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죄의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상태는 우리가 하느님과 분리된 상태에 놓여있음을 의미합니다.

영적 나병 상태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하느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간절히 청하는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치유의 은총을 입은 온 몸에 나병이 걸린 나병환자처럼 말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 5장 12절)

주님을 향한 절박함, 간절함, 주님을 향한 돌아섬, 결국 회개를 통해 우리는 영적 치유는 물론 육적 치유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치유를 통한 구원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감각의 회복입니다. 진심으로 가슴을 치는 일입니다. 지난 죄와 과오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통각의 회복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나병 균이 사람의 신경계에 침투해서 육체적인 감각을 소멸시키는 것처럼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악령은 인간의 마음 안에 스며들어 영적 감각이나 자기성찰의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영적 감각의 마비상태는 결국 영혼이 작동을 멈춘 상태, 결국 하느님 은총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영적 감각의 마비상태에서 인간은 너무나 쉽게 분별력을 상실하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영적인 감각은 어떤 상태인지 한번 확인해보면 좋겠습니다. 심각한 영적 나병에 걸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없이 그저 동물적인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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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1요한 5,10)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고 가르친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4장에서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관한 주제와 결합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저자는 이 두 번째 주제에 대해 덧붙인다. 이런 맥락에서 무엇보다도 ‘세상을 이기는 신앙’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해주신 증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이다.”(1요한 5,11)

닷, 홀던, 마샬, 슈트렉커 등은 ‘하느님의 증언’이 성령과 물과 피의 증언들을 합친 것이라고 본다. 요한은 하느님의 삶이요 종말론적 구원인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파견되어 나타나셨으며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아들 안에 있다고 선포한다(5,11-12).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기에(5,12)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피부병을 나병이라 한다. 나병은 불결하고 전염성이 강하다고 여겼으므로, 나환자들은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불결, 불결” 하고 소리를 질러야 했고, 예루살렘과 기타 성곽도시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른 곳에서는 따로 살아야 했다. 나아가 종교의식이나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나환자들은 '산 송장' 취급을 받았다. 율법교사들의 눈에 그들은 나병이라는 형태로 자기 몸에 죄를 짊어진 이들로 보였다. 그들이 만지는 것은 즉시 불결한 것이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경계의 대상이었고 배척받는 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한 나환자가 자신의 처참한 처지를 알고 인정하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5,12) 겸손하게 예수님께 깨끗하게 해주실 것을 간청한다. 치유 여부는 온전히 예수께 달려있음을 알고, 나병환자는 선입견이나 자기주장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세로 자신을 그분의 뜻에 온전히 내맡겼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곧 그에게서 나병이 떠나갔다(5,13). 나병이 떠나감은 단순한 몸 안의 치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고통과 영혼의 어둠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토록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한 것"(성 프란치스코 유언 3)이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결과였다. 한없이 낮추는 자세가 소통과 치유와 해방을 가져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참된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참된 믿음을 지니려면 무엇보다도 신앙의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아야 하고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야 한다. 참 신앙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자세로" 믿는 분께 모든 것을 기꺼이 맡겨야 한다. 참 신앙에는 사랑의 동기 외에 다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순수해야 하고 진실해야 하며 항구해야 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을 한다면 참 신앙이 아니다. 참 신앙을 지닌 사람은 겸손하며 차별을 없애려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며 삶으로써 실천한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동기로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나환자를 해방시켜주셨다. 그분은 자신이 부정하게 되거나, 율법을 어겼다고 적대자들로부터 비난받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다. 그분께서 접촉이 금지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는 것은 승리자의 위엄 있는 동작이다. 그분의 이런 행동으로 “버림받았던” 한 병자가 다시 생명을 회복하고 공동체에 되돌아 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모두가 멀리하고 싫어하는 '좋지 않음'의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시는' 그분은 몸소 인간 조건 속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나약함과 어려움을 가엾게 여기시는 연민의 정을 드러내 보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신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탁월한 치유자로 여기고 필요할 때만 당신께 낯을 돌리는 것을 원치 않고 당신 안에 머물길 바라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1요한 5,12). 우리 모두 사랑으로 오신 그분을 믿어 영원한 생명의 길, 해방의 길로 나아가자! 영원히 살기 위해 생명이신 그분께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개방하고 내맡기도록 하자!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영혼의 나병이 나에게서 떠나가게 해주시라고 기도드리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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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병든 믿음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과 치유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입니다. 믿음은 회개로 치유되고 치유는 믿음으로 깨어납니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의 몸 또한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건강한 삶의 중요성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건강한 삶에 참으로 필요한 것은 건강한 믿음이었습니다. 건강한 믿음은 그 어느 순간에도주님을 찾는 겸손 된 믿음입니다.

아파본 이들만이 알게 되는 사실은 아프기 전까진 몰랐던 아픈 이들의 마음을 이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믿음 없이는 그 어떤 존재도온전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되어야할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임을 다시금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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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안식(安息)-천형(天刑)이 천복(天福)으로-

수도원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안식년을 맞이하여 잠시 수도원을 떠난 지금도 '말씀의 낙(樂)'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영혼'입니다. 도대체 '말씀의 낙없이 무슨 낙으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말씀의 은총을 통한 자아초월(self-transcendence)의 가난이요, '가난한 영혼'에게 선사되는 참된 안식입니다.

새벽 창 밖이 환해서 순간 눈이 떠졌습니다. 주님이 등불을 환히 켜들고 저를 깨우셨던 것입니다. 보름 후 며칠 지나지 않았기에 밤 하늘에 달린 둥근 달, '주님의 등불'이 온누리를 환히 비추고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참된 안식에 평화요, 참된 위로에 치유입니다. 안식년을 맞아 언제 어디서든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제 삶입니다. 문득 떠오른 다음 성경 말씀이 안식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역시 제가 고백성사 때 보속의 처방전 말씀으로 많이 써드린 구절입니다. 공동번역의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새삼 '안식' 역시 주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만드는 안식이 아니라 주님의 선물인 안식입니다. 주님이 참된 안식을 주셔야 안식년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곧 이어지는 다음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참된 안식의 정체를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학원인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복된 멍에를 메고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聖心)의 사랑을 배워나갈 때 비로소 안식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후반부 구절입니다. 공동번역은 '너희' 대신에 '너희의 영혼'으로 되어 있고, 이 단어 선택이 더 적절하고 분명합니다. 바로 '나'는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참 나'의 전인적 존재가 되는 것은 영혼이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입니다.

영혼을 잊고, 영혼을 잃고, '영혼 없는 사람들'처럼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마음 깊이에는 누구나 영혼의 안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고향이나 성당 또는 수도원, 성당 묘지나 수도원 묘지를 찾는 마음, 역시 영혼의 움직임이요 궁극의 본향(本鄕)인 하느님을 찾는 영혼들임을 상징합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미국 성당 곁에 넓고 평화롭게 자리잡은 성당 묘지를 보면서도 삶과 죽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하느님의 집, 영혼의 고향같은 성전임을 깨달았습니다. 모교(母校), 모원(母院), 모태(母胎), 모원(母鄕)이란 단어들을 통해서 역시 우리의 시원(始原)인 하느님의 모성을 찾는 영혼들의 갈망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어제 하루도 참된 안식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날입니다. 10여년 이상 매일 요셉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리던 강론을 홈페이지 수리차 올리지 못하니 심란(心亂)하고 불편했습니다. 바로 영혼의 고향을 상징하는 요셉수도원의 홈페이지였던 것입니다. 얼마 후 완전히 새롭게 단장된 홈페이지에 강론을 올림으로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참 고향은, 본향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를 때 참된 안식에 영원한 생명의 체험입니다. 진정 살아있는 삶이 됩니다. 어제 홈페이지에 가입할 때의 순간적 선택도 재미있었습니다. 비밀번호를 잊었을 경우를 대비한 '최고의 보물은 무엇인가?'묻는 물음에, 즉시 '하느님'이라 써 넣었습니다.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결코 잊을 수 없는 명칭, '하느님'에 아주 만족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의 영원한 화두는 '사랑'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아드님을 통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인 영원한 생명의 사랑이 바로 영혼을 살게하며 참 안식과 평화를, 참된 위로와 치유를 줍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의 치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천형(天刑)이라 일컫는 나병의 치유는 천주(天主)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천형(天刑)이 천주(天主)를 만나 치유되니 천복(天福)이 되었습니다. 나병이 상징하는 바 우리의 고질적 영적, 육적, 정신적 질환입니다. 사실 내적 깊은 상처의 아픔과 열등감으로 많은 이들이 영적, 육적, 정신적 천형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복음의 나병환자의 영적 후각(嗅覺)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온 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자 본능적으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청합니다. 완전히 자신을 비운 겸손의 극치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춰 비웠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참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에 응답한 주님의 자비로운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나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습니다. 나병환자의 간절하고 절실한 믿음에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 '사랑의 텃치', '능력의 말씀'의 삼박자 응답으로 일어난 기적입니다. 주님을 만나 전인적 치유로 영육의 참된 안식을 선물 받은 나병환자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참된 안식의 비밀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외딴 곳이 상징하는바 우리의 은밀한 기도처이자 주님을 만나는 참된 안식의 자리입니다. 영혼이 살기위해, 참된 안식을 위해 외딴 곳의 장소와 시간은 필수입니다.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이렇게 우리의 기도처이자 안식처인 주님의 집, 성전에서 간절한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선사 받는 참된 안식과 평화, 위로와 치유입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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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있는 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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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다. 당시 나병은 최악의 질병이었다. 나병에 걸리는 것을 하느님의 저주로 해석했고 그런 죄인은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 나병환자 자신도 역시 자신의 병을 그렇게 해석하였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는 예수께서 죄인들의 병을 낫게 해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나타나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죄도 예수께 용서받고 치유받을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 나병환자가 오늘 예수께 나아간다.

스스로 죽어 마땅한 죄인이요, 사회에서 철저한 격리와 배척을 받는 나병환자, 정상적인 사람들 무리에 결코 끼여들 수 없는 그가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을 받으며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자신의 치욕스러운 병을 세상에 드러내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 예수께 나아간다.

나병환자는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자신을 용서하고 변화시키고 성장시킨 용기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참모습을 보고 슬퍼하고 우는 용기있는 사람이다. 용기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모습을 되찾게 해주는, 자신을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 나병환자를 예수께서는 치유시켜 주셨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으로 존재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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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교회 김은호 목사
  |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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