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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구/전주/광주]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단입니다.
조회수 | 1,216
작성일 | 13.07.11
[부산]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뽑아주신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갖고 오신 그 능력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우리들이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바로 우리들이다’라고 하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예수님께 아주 요긴하고 필요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모인 우리 교회는 즐기기 위한 사교모임일 수 없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해관계로 모인 단체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참된 삶의 공동체란 그분께서 사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이룬 이 공동체는 순수한 사랑의 집단이며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잠겨있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바는 세상이 바라고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세상에서 어리석다하면 틀림없는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 세상에서 잘나지 않았다면 더욱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더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들이 겁먹을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누누이 밝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뽑으실 때에도 밤새워 기도하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렸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느님 나라를 넓히시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힘을 쏟아 주고 계심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계시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힘을 믿는 것만으로 “의인”이라 불러 주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 드리고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맑은 영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느님이기에”, “예수님이기에”, “내 이웃이기에” 비록 나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사랑하는 것. 참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누렸던 바로 그 기쁨입니다. 오늘 하루, 나를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이 용서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뜻을 꺾어 바치면서 그 수를 헤아려 보아도 좋겠습니다. 얼만큼의 잔꽃송이를 드렸는지 계산해 보도록 합시다. 못난 내 마음을 꺾어 그분의 부드러움을 접목시킨 그 자리마다 고은 꽃 한 송이 피어 있을 것입니다. 잠들기 전 그분 앞에 그 꽃다발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로 자유로운 복된 자입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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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 나라시대에 주 매신 이란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글읽기를 아주 좋아해서 밤낮으로 책만 읽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아내가 일하러 밭에 나가면서 이웃에게 꾸어 온 조를 멍석에 깔아 뜰 안에 널어놓고는 남편에게 닭을 쫓아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그 날 따라 한 낮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밭에 일나갔던 아내가 물에 빠진 생쥐모양으로 돌아 왔습니다. 와서 보니 남편은 아침에 있던 그 모습그대로 독서 삼매경에 빠져 글을 읽고 있는데, 아 글쎄 조를 널어놓았던 멍석까지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내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남편 얼굴에다 침을 탁 뱉고 하는 말이 "너 같은 바보는 글이나 읽다가 굶어 죽어라"하고 악담을 퍼붓고는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를 만나서 새 살림을 차렸지요. 그러나 주매신은 그 후에도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여 큰 도시의 관리가 되어 부임지로 가는 중에 아내 생각이 나서 이리 저리로 수소문해서 아내를 찾아 가마를 가지고 데리러 갔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결국 성공해서 관리가 되어 오는 남편을 도저히 볼 면목이 없어서 타고 가던 가마 안에서 옷끈으로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염려하시면서도, 박해를 잘 견디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우리 선조들의 순교의 피로서 신앙을 지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칼이 목을 겨누고 있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수호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상님들을 두고 있는 우리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참으로 크심을 말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박해의 시대가 아닌 참으로 자유롭게 주님을 찬미할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오히려 박해시대보다도 더 나약하게 신앙을 스스로 저버리는 모습을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생활이 어렵다고, 또는 편안한 생활을 즐기는데 걸림돌이 된다고 쉽게쉽게 냉담하는 모습을 볼 때 더욱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주 매신의 아내는 결국 남편에 대한 믿음을 져버렸기 때문에 어리석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신앙이란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굳건하게 지켜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떠한 처지에서도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꿋꿋하게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믿는 마음으로 용기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부산교구 송제호 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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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참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신부님 이건 어떻게 결정할까요? 신부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주일학교나 사목평의회 같은 회의에 들어가면 자주 듣는 말입니다. 여기에 제가 즐겨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어느 게 좋을지 상의해서 결정해보세요” 신자들이 함께 결정해서 하자고하면 특별한 경우 아니고는 “좋습니다.”고 합니다.

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이렇습니다. “사람을 편하게 대해준다. 부드럽다. 마음씨가 착하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내리는 평가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또 걱정입니다. “사람이 우유부단하다. 물러 터졌다.” 이런 평가를 받지 않을까?

동료 신부 친구들의 저에 대한 평가는 좀 다릅니다. “말을 한번씩 굉장히 못됐게 한다. 독한 면이 있다. 한번 찍히면 회복할 길이 없다.” 동료들이 아니라고 그러면 할 말 없습니다만 제 나름대로 또 좋은 의미로 해석해서 알아듣습니다. “상황에 따라 재치 있게 잘 대처한다.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

참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내 자신도 양 같이 순수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이리떼로 몰아붙이는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지?’

‘뱀같은 슬기로움, 비둘기같은 양순함’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요구하셨던 덕목입니다.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갖춰야 할 모습입니다. 그래서 혼자 힘으로는 가려내기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마다 믿고 의지할 데는 한군 데 뿐입니다. 우리 안에서 말씀 하시는 아버지의 성령께 귀 기울이는 것이 해답입니다.

<대구대교구 함영진(요셉)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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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에 맞는 처세술이 있습니다.

이 모든 처세술은 결국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침과도 같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이처럼 치열한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몹시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처세술을 가르쳐 주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뱀은 교활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비둘기는 솔직함과 소박함의 상징이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예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치 이리떼 가운데로 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데 뱀같이 슬기로와야 합니다. 즉, 슬기로움으로 미움을 사거나 원망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비둘기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정직함과 소박한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와 같은 이치는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해당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사명을 받아 우상 가득한 세상에 파견된 양입니다. 우상은 신앙인을 유혹합니다. 자신을 따르라고, 그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을 동원하면서 유혹합니다. 돈, 자본, 권력, 지위 등등 온갖 우상들이 날뛰면서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섬기라고 달려듭니다. 자신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댑니다. 신앙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상들을 단호히 거부할 것이냐? 아니면 은근 슬쩍 우상에게 자기 몸을 맡기면서 적당히 살아갈 것이냐? 우상을 거부하면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 험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이 판치는 세상의 변두리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쫓겨남으로써 참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적으로는 감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안타깝게도 많은 신앙인들이 우상에 몸을 팔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면서, 한술 더 떠 우상의 선전부대가 되어 '우상'이 '참된 하느님'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박해’가 아니겠습니까!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심정으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상의 늪에 허우적대고 때때로 우상과 함께 놀아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계실 예수님의 상처받은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느냐? 하느님의 성령이 너를 지켜주지 않느냐?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간절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양이 이리가 될 수 없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결코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수많은 순교자들이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쳤음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굳은 다짐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부산교구 전열 신부>
  |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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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순전히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움과 박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무 이유 없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그리스도교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때문에 피해를 본 일도 없으면서
괜히 피해 의식을 느끼기도 하고,
예수님과 그리스도교에게서 미움을 받은 적도 없으면서
괜히 증오심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 말씀에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는 '많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종교와 신앙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착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종교와 신앙이 다르다는 것이
미워하고 싫어하고 적대시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비록 종교와 신앙이 달라도 사랑과 선(善)으로 다가가면
역시 사랑과 선으로 응답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지금은 예수님과 그리스도교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꾸준히 사랑과 선으로 대하면 언젠가는 진심을 깨닫고 변화되어서
미움 대신에 사랑으로 응답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시지 않고
'너희'가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신 점이 중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을 포섭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로 만들기 위한 전략 전술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신앙인들도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밭에 사랑이라는 씨를 뿌리는 것은 신앙인들이 할 일이고,
그 밭에서 얼마나 열매를 맺게 되는가는 세상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똑같은 씨를 뿌리지만 어떤 땅에서는 열매를 얻지 못하고
어떤 땅에서는 많은 열매를 얻게 됩니다.

좋은 땅이라고 방심해도 안 되고,
나쁜 땅이라고 처음부터 포기해도 안 됩니다.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라 6,9)."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는 일은 하느님의 사랑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라는 말씀은

'미움과 박해를 받아도 참고 견디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인데, 이 말씀에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고 죽어도
저 세상에서는 생명을 얻게 된다.' 라는 약속이기도 하고,
'죽어도' 믿음을 버리지 말라는 격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고 견디어라.' 라는 말씀은 패배주의도 아니고,
소극적으로 당하기만 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라는 말을
'박해가 없든지 있든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양들이든 박해자들이든 간에 가르치고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박해자들이라면
더욱 더 적극적으로 복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더 심하게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나 스테파노가 재판을 받는 장면을 보면,
그들의 모습은 재판을 받는 피고인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가르치는
교리교사의 모습입니다(사도 4장,5장,7장).
그들은 법정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변론을 하지 않고
'복음 선포'와 '설교'를 합니다.

복음 선포와 설교를 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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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하이터치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20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마태 10,16-23)

<묵상>

지금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매를 맞거나 통치자들 앞에 끌려 나가 증언해야 할 일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돈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 감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절대적 가치나 신적 존재를 부인하는 상대주의와 세속주의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스러움과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 그리고 복음적 가치들을 외면하게 한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현실 속으로 나를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고도로 기술문명이 발달한 현대를 하이테크 시대라 칭한다. 존 나이스비트는 하이테크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하이터치’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고도로 발달된 기술문명이 제공해 주는 편리함과 빠른 속도에 열광하고 있지만, 그칠 줄 모르는 경쟁과 속도감에 지친 사람들은 그 내면에서 느린 삶의 형태가 가져다줄 수 있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갈망하고 있다. 복음서를 보면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러한 손길을 현대인들은 원한다. 현대인들의 갈망을 고려한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오늘 복음은 말한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체화되어 온유하고 따뜻한 태도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바로 현대인들을 위한 복음 전파의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도덕경에서는 “최고의 선은 물처럼 부드럽다.”라고 말한다. 무한 경쟁 구도에서 현대인들은 지쳐 있고 마음이 병들어 있다.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가가 그들을 섬기고자 할 때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어줄 것이다.

<광주대교구 김권일 신부>
  |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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