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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주님의 참된 제자 되는 길
조회수 | 931
작성일 | 13.07.16
[부산] 주님의 참된 제자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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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모를 나보다 더 사랑하거나 자기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 상식으로는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같이 생각됩니다만,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고 사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르려면 가족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마저, 즉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103위 성인 가운데 겨우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한 유대철(베드로) 성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 베드로 성인은 배교를 강권하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즉 저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으나 하늘의 임금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님의 계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라고 상냥하게 어머니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포청에서 유대철(베드로)을 배교시키기 위해 14세의 어린나이로서는 견디기 힘든 혹형과 고문을 가하였으나, 그는 한결같은 신앙으로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1839년 기해년 박해 때 순교하였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순교한 이 어린 성인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잃었으며 또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는 주님을 위해 부모가 주신 육신 생명은 잃었으나 대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찮은 물건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마음이 편치 못한 우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세상의 그 어느 것하고도 바꿀 수 없는 부모와 아내나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 자신의 목숨마저 주님을 위해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생각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잃어야만 다시 얻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삼주전 우리 중앙 본당 800여명의 교우님들이 배론 성지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성지이지만, 그곳은 1801년 황사영과 그 동료들이 신유박해를 피해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첩첩 산중에 자리 잡은 교우 촌이었습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신자들이 주로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해 오던 곳이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자 천주교 지도자로 활동하던 황사영이 그 해 2월에 서울을 떠나 이곳 배론으로 숨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어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황심도 이곳으로 와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던 김귀동이 이들에게 토굴을 파고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황사영은 토굴에 은거하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순교 사적과 김한빈, 황심등이 전해주는 박해 사실을 토대로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 9월 29일에 황사영과 김한빈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됨으로써 결국 배론 교우촌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황사영이 쓴 <백서>의 몇 줄만 읽어봐도 그 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황사영은 말하기를: “이제 교회가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저희들은 마치 양떼가 달아나 흩어진 것처럼 혹은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 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헤매면서 눈물을 머금고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흐느낍니다” 황사영이 쓴 이 <백서>는 차마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당시 천주교회의 참혹한 박해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데로 자신들의 부모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고, 사랑하는 가족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였으며 심지어 주님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마저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자기를 낳아 길러준 부모나 사랑스런 아내와 자녀를 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겠으며 자기 목숨 아까운줄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가장 소중한 하느님을 배신할 수 없었고 또한 참 진리를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초개같이 버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라고 자처한다면 모름지기 주님의 뜻을 따라 부모와 자녀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잃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어떠한 욕망도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활의 첫째가 되고 중심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기 자신을 부정하거나 학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기 위하여 이기적인 자아를 끊어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고 비우고 버리는 아픔이 뒤따르기 마련이며, 그러한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짊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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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만수 요한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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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앙을 얻고자 성당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 되었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전교 하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음을 체험한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행복이 높이 평가되어지는 현실 속에 신앙이 자리잡을 공간이 좁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신앙을 갖고자 찾아온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희망사항을 신앙이 온전히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렸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신앙을 통해서 삶의 무게로 복잡해진 마음에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모든이의 바램이며 희망사항입니다. 평화와 기쁨은 삶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바램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을 체험합니다. 여기에 신앙적 갈등과 거듭된 선택과 도전이 필요하게 됨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평화의 사도로 오신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고, 아버지와 아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만드시며, 심지어는 자기자신과의 분열까지도 요구하고 계십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 한것처럼 아무리 신앙이 인간의 논리로 담을 수 없는 역설이라고 하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위에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반대로 신앙을 포기해야하는 경우가 있으며,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심적 갈등을 겪는 이웃이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후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의 처해있는 현실과의 대립으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을 알아듣는 중요한 열쇠이며, 우리의 삶을 평화와 기쁨으로 만드는 힘이 됩니다.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 칼은 바로 평화가 전해주는 기쁨을 가로막는 기형적인 마음의 한부분을 잘라내는 것이요, 무관심과 이기심, 지나친 욕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로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이며, 불의와 썪음을 도려내는 정의이며, 자신 을 바로 세우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진정한 평화를 얻기에 방해되는 것을 잘라내는 아픔을 감수 할 수 있고, 용기가 있는 이들에게는 칼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묻습니다. 신앙이 과연 나의 삶을 평화롭게 다듬어 줄 수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고백합니다. 평화는 거져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칼을 제대로 사용할 때 가능 하다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려분에게 내리시길 기원합니다.

<부산교구 이석희 신부>
  |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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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요사이 세상살이를 보고 있노라면 참 요지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비위에 맞으면 좋은 사람이고, 내 비위에 맞지 않으면 옳지 않다고 떠들어 댑니다. 그러다 보면 목청 큰 사람이 겉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편이 옳고 그른가는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니 어느 편이 진리인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집니다. 더구나 인터넷에 뜨고 지는 네티즌들의 언어가 점점 메마르고 공격적으로 되어가고, 자신의 진리만을 고집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오만함까지 보입니다.

여기서 잠깐 상념에 젖어봅니다. 생명있는 언어, 생명있는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러한 몰이해적인 반응은 일어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칼은 옳고 그름의 바른 잣대를 상징하지요. 정의가 바로 설 때 진리가 살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의 기준이 무엇이냐가 문제겠지요.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태초적인 가르침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언어, 생명이 담긴 진리,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재산이며, 현실에서 펼쳐야 할 우리의 소중한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을우 (가톨릭 여성 연구원 회원)>
  |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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