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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안동/전주/청주] 세례자 요한은 누구입니까?
조회수 | 1,373
작성일 | 13.09.18
오늘의 복음 말씀은 루가 복음사가가 비교적 짧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무엇이었으며,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이었는지를 전제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며, 이를 의심 없이 믿고 받아들이는 지혜의 은사를 청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먼저 세례자 요한의 사명에 관해 이야기하시면서 당신의 사명에 관해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하시어 당신의 위대성을 드러내십니다(루가 7, 24 - 30). 또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과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관해서도 말씀하십니다(루가 7, 31 - 35). 우리가 방금 들은 복음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요한을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보았습니다(마태오 21, 26; 마르 11, 32).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는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루가 1, 76). 유대인 최고의회(=산헤드린)는 세례자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언자요?"(요한 1, 21). 그렇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였고, 다가올 구원을 말하면서 마음의 철저한 변화, 곧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때에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 구세주가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요한을 두고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증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정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신지를 물어오도록 한 바 있습니다. 온갖 질병과 고통과 마귀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고 본대로 전하게 하십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인간을 위해 활동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과 질병을 치유하러 오신 예수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메시아, 인류를 서로 화해시키고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대사제를 의심 없이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마침내 드러내신 그 모습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고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시빗거리로 삼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앙갚음을 하시고 화를 잘 내시고 성질이 급하신 분이시려니 여기는 자들의 자세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용납 못 하는 처지이다 보니, 예수님도 우리를 깊이 용납해주지 않으시는 분이시려니 생각합니다. 사람이 때때로 너무 자신 만만하여 철면피해지면, 우리에겐 예수님이 아무 필요도 없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좀 못마땅한 예수님, 내게 잘 해주지 않고 요구가 너무 많은 예수님, 지나치게 곤란한 처지에다가 나를 밀어붙이는 예수님, 아니면 너무 어려운 분이라서 도무지 접근할 수 없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지니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들에게도 바른 생각을 지니지 못합니다. 못마땅합니다. 불만 투성이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율법학자들이 가졌던 태도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예수님이 나를 생긴 그대로 사랑치 않으신다는, 내게 뭔가 불만이 있으시다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이와 다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생긴 그대로 사랑하시며, 나를 온전하게 받아 주시며, 내게 바로 지금 친절하시고, 상냥하시고, 관심을 기울이시고,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넘치신 분이십니다.

루가 복음에 나오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잃었던 양을 찾게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잃었던 은전을 도로 찾은 여자도 예수님의 이 심경을 잘 알 것입니다. 그 여자도 자기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하며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의 생활이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임하신 그리스도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곳으로 오신 그리스도님, 바로 그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천하게 오신 그분 안에 삶의 진실이 있고, 생명의 영원한 기쁨이 있고, 온갖 풍요함이 있다는 것을 믿는 생활입니다. 사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취하시는 방법이 우리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불가사의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를 가진,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느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미움 속에서 사랑을, 어둠 속에서 빛을, 하찮은 것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찾아내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자신의 생각과 아집, 완고한 태도를 버리고 기쁨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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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성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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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닫힘

가끔 부족한 제 강론과 강의를 통해 새로운 마음을 다짐하는 신자들과 신학생들을 보면 정말 마음을 열고 듣는 그네들의 모습에 감동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는 사제 모임과 연수 덕분에 강의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제들의 삶이 그러하듯 말하는 것, 강의하는 것에 익숙한 저에겐 오랜만에 다른 분들의 말씀들을 들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하고 가르치는 데 익숙한 제겐 말씀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제 시선과 제 마음으로 재단하는 것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만 많이 듣는 분들을 보면 귀만 천국에 가 있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하는데 제 경우에는 귀 하나도 천국에 못 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늘상 비판하는, 그리고 오늘 주님의 비판의 자락에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가장 큰 잘못은 애당초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닫혀 있음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시간이 오래될수록 나 자신만의 믿음이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분명 주님으로부터 된통 꾸지람을 들을 것 같습니다. 열려 있음으로 인해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이길 다짐해봅니다.

<부산교구 김인한 신부>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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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새로운 지혜가 필요할 때

30대 중후반쯤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물음표 하나가 맴돌기 시작한다. 이때쯤 되면 나를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던 좋은 직장도 시시해지고,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던 폭넓은 인간관계도 활기를 잃어버린다. 대외적으로는 아직도 인정받고 멋있게 보이는 내 모습이 정작 나 자신에게는 매력 없이 보여지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살아오는데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던 삶의 전략과 전술들이 이제는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성장을 저해하는 굴레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로운 지혜가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이제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러 과업과 규범에 맞추어 살아왔던 내 모습에서 벗어나 나만의 고유한 개성을 살려내고 형성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피리를 분다고 무조건 따라서 춤추고, 곡을 한다고 영문도 모르고 따라서 우는’ 예수님 시대의 우매한 대중의 모습을 벗어버려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예언자 요한은 남들처럼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먹지 않아서 미친 사람 소리를 들었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은 남들이 상종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 하고 어울리다가 결국 십자가형까지 받게 되었지만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생의 후반전은 인간의 지혜를 버리고 하느님의 지혜를 배워야 할 시기다. 그것은 집단적 가치와 규범에 맞추느라 눌러놓거나 잊고 살아왔던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찾기 시작할 때, 나의 얄팍한 지혜를 훨씬 폭넓게 감싸 안는 하느님의 지혜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가능해진다. 인간의 지혜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삶은 그런대로 진행되겠지만 너무나 무미건조한 나날의 연속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에게서만 드러난다.

<안동교구 김기환 신부>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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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회개도 싫고 복음도 싫고?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 7,33-34)."

마태오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첫 선포가 같습니다.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1-2)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7)

이렇게 똑같은 선포를 했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의 강조점은 '회개'에 있고, 예수님의 선포의 강조점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활동 내용도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세례를 베푸는 일에 집중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기쁨을 베풀어주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회개시킴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를 시키는 일이 주 활동이 되는 것이 당연하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일이 주 활동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활동의 목적이 다르니 방식이 다르게 되고, 생활 모습도 다르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때 외에는 주로 광야에서 극기고행의 생활을 했습니다(마태 3,4).예수님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시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는 '마귀가 들렸다.'(미쳤다.) 라고 말했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시정잡배와 다르지 않다.) 라고 말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통 사람들과 너무 다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요한을 따르지 않았고, 예수님이 보통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장터의 아이들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2)." 이 말은,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을 선포해도 기뻐하지 않고,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해도 자기의 죄를 슬퍼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혹시 이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오지 않는다고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맞춰 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과 당신의 생활 방식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지도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요한과 예수님의 생활방식을 문제 삼는 것은 핑계였을 뿐이고, 사실은 회개하기도 싫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싫어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님의 활동은 사람들에게 양자택일 하라고 제시된 두 가지 활동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고해성사라면, 예수님의 활동은 성체성사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나서 성찬의 전례에 참석하는 것처럼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예수님의 활동은 하나로 이어진 하나의 활동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시는 것을 보게 되자 자신은 퇴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원래 세례자 요한의 활동과 생활 방식은 예수님의 일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다음에는 물러나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 3,28)."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을 것입니다.

(요한이 죽었다고 해서 그의 회개 선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도 계속 회개를 강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자 요한이 죽은 후에도 그의 회개 선포는 예수님에 의해서 지속되었고, 사도들과 교회를 통해서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회개를 해야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면, 그 다음에는 고해실에서 나와서 영성체를 하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고해실 안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또 고해성사는 거부하면서 영성체만 하겠다고 고집부릴 수도 없습니다. 고해성사도 싫고 성체성사도 싫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제시해 줄 다른 성사가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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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불통

“제 눈에 안경이라” 는 옛말이 있습니다. 남은 우습게 보는 것도 마음에 들면 좋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기는 좋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모습을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중심으로 사는 고집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어 걱정입니다. 소신, 주관이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집이면 모두가 피곤합니다.

고집 센 어린이들의 비유를 들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는 얘기는 고집을 피우면서 상대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피리를 부니까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하려고 하니까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부는 이는 그야말로 어깃장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인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고집불통의 어린이들은 우리 자신입니다.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어려움에 처하면 같이 아파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질투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잘못되면 고소해 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의 잇속을 챙깁니다. 그리고는 사람들로부터 현명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 버립니다. 실은 내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데 세상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세상이 지랄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바뀝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우리를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너무 금욕적이라고 하여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룩하지도 않고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판하며 자기 구미에 맞는 메시아, 구세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그분께서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1,11). 그러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아무리 은총이 크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담지 못하고 준비된 사람에게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게 됩니다. 지혜서를 보면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6,14-15).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득 차 있는 그릇에는 아무 것도 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릇을 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어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기꺼이 누리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님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님께 시선을 고정시킨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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