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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청주/전주/수원] 감사에 더디고 파티에 익숙한 우리들
조회수 | 1,065
작성일 | 13.11.13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는 루가복음만의 고유한 사료이다. 루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를 엮어가면서, 예수께서 상경 길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9,51.53; 13,22.33; 17,11; 18,31; 19,11.28) 뿐만 아니라 베레아 지방을 통해 가시면서 오늘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지방을 언급한 이유는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복음들에서 드러났다. 애당초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 상경계획을 잡았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를 제자들이 꼽게 여겨 하늘의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초연히 우회로를 택하셨다.(9,52-5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10,29-37)에서도 예수님의 호의적 속내가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돋보인다.

구약성서에서는 사제들이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부정함으로 규정하고 그 환자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완치되었을 경우, 자신의 피부를 사제에게 보여 정함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레위 13장) 사제가 정함을 선포하면 병이 나은 자는 사제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장막에서 복잡한 ‘정화예식’을 치러야 했다.(레위 14,2-14) 하루도 아니고 8일씩 걸리는 이 예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사실 골치 아픈 것인지는 레위기의 이 대목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이 대목을 읽고나면 나병환자 10명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9명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성 피부병자들이 마을 중심과 격리된 어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자비를 청했다. 사실 예수께는 어떤 병이든 치유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이 사제들로부터 치유를 인정받고 공식적인 정화예식을 치름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10명중에서 9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이 나병환자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살아서는 결코 그들 가족과 동족에게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낫게 된다면 율법이 규정하는 ‘정화예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예식을 치러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뇌까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힘차게 사제들에게 달려갔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제대로 치유를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법(法)이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인가? 깨끗하고 흠 없이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을 받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정화예식은 천천히 치러도 늦지 않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가야 하시는 것이다. 오늘 9명의 유대인들 속에서 찬양과 감사에는 더디고, 축하파티에는 잽싸고 익숙한 우리들 자신을 본다. 감사와 찬양에는 정한 날 없이 미루고, 파티와 회식과 약속에는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우리들이 아닌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두 배의 기쁨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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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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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말과 행위의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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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말 중에 고맙다는 표현은 얼마나 되나? 한 달 동안 한 일 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일은 얼마나 될까? 올 한 해 사람들에게 받은 호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이제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 은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생 일어난 일들 중에 감사드릴 사건은 무엇인가?

하루 종일 한 말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살았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 내내 한 일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마음으로 했어도 지금보다 훨씬 즐겁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만났던 분들의 고마움을 십분의 일만 되새겨 잊지 않았어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은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그만큼 마음이 겸손하다는 증거다. 정말로 은인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살아오는 동안 감사드릴 일이 너무도 많아 손꼽을 수 없다면 그만큼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생각의, 말의, 행동의, 시간의 십분의 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치유된 나병환자 열 명 중에 감사한 사람은 겨우 십분의 일, 단 한 명이다. 그런데 육신의 치유에 감사할 줄 알았던 그 한 명에게는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주어졌다. 작은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온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동안 행복해진다고. 감사할 일이 많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써 더 많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구원받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 일생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나머지 아홉은 그만두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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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옥(수원교구 기산 천주교회)
  |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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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감사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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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한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루가 17,15-18)

사랑하는 예수님,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까지 나음을 받고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그는 감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상처는 치유 받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들어있습니다.

감사는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행복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에 감사하고, 잠을 깨우는 새소리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음에 감사하고, 곱게 물든 나무 잎과 아름다운 국화 때문에 감사하고, 계절의 변화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우리 삶은 행복하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괴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불평하고, 밝아오는 새날을 어떻게 살까 염려하고 걱정하며 투덜대고,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을 귀찮아하고, 떨어져 수북이 쌓이는 낙엽 때문에 투덜대고, 국화가 너무 아름답다고 불평하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투덜대면 사는 것이 괴롭고 불행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5,16-18) 인생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유일회적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초대해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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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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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받은 은혜에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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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제껏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며 모든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에 감사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먼저 사제를 찾아가 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인 받는 일에 급하게 행동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힘들고 지치고, 고통이 밀려와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모두가 감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그러니 감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내 공로가 아니라 그분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지만 철들은 사람은 그 은혜에 배은망덕하지 않고 응답하게 됩니다. 결코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로마2,4)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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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15년 11월 11일
  | 11.12
451 26.8%
[전주] 그들 가운데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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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병자 열 사람과 마주치는 일이 생기는데,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아본 것 같습니다.그들이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루카 17,14).즉 병이 낫게 됩니다.

그들의 병이 나은 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해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병자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병자들의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은,"병을 고쳐 줄 테니 사제들에게 가서 병의 치유를 확인받아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병자들 입장에서는 믿음을 시험하는(믿음의 시련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제들에게 가는 것은 병을 고친 다음에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그들의 병이 나병이었기 때문에 병을 고친 뒤에는 사제들의 공적 확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즉시 고쳐 주시지도 않았고, '언제' 고쳐 주실 것인지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병자들은 병이 낫기 전인데도 예수님의 말씀만 믿어야 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병의 치유를 확인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상황 자체가 시련이고 시험입니다.

이 상황에 연결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열 명 모두 예수님께 병의 치유를 청했고, 치유의 은총을 이미 받았다고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사제들에게 갔고, 가는 동안에 병이 나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믿은 대로 치유의 은총을 받은 병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부터 특별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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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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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홉'은 사제들에게 갔을 것이고, 병이 나은 것을 공적으로 확인받았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각자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신 일을 취소하시지 않았습니다.)우리는 그들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라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을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어떻든 이야기 속에서는 그들은 몸만 건강해지고 진정한 구원은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사제에게 가는 것을 중단하고 예수님께 되돌아왔습니다. 되돌아온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은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믿음이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기를 바라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그냥 가버린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고, 간청했고, 바라던 대로 병이 나았지만,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예수님께 몰려와서 병을 고쳤던 수많은 병자들이 다 그랬습니다. 병이 나은 다음에는 거의 대부분 미련 없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그들 가운데 몇 명만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그들에게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는 예언자, 또는 랍비였을 뿐입니다. 메시아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되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인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큰 소리로' 찬양했다는 것은 그의 기쁨을 나타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으니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하느님께 경배 드리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으신 분, 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라는 말씀은, 몸의 건강을 되찾은 것에만 만족하고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 그들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그들도 병이 나은 것을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을 찬양했겠지만, 하느님께 진정한 영광을 드리게 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음으로써 메시아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믿음은, 몸의 건강만(현세적인 복만) 바라는 믿음인가? 참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믿음인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몸이 아플 때 안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건강을 되찾은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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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15년 11월 11일
  | 11.13
451 26.8%
[수원] 믿음의 크기와 찬양의 크기는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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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행히도 여러 나라의 미사 전례에 참석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미사 안에서 찬미 소리의 정도와 그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수가 비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독일의 한 성당의 평일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뒤쪽의 2층 성가대석에서 정말 아름다운 성가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딱 들어도 프로였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이런 분위기 때문에 탄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참례자 수는 10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사 참례자들은 미사 내내 성가를 하나도 따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화음 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끼어 넣을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미사가 아니라 콘서트였고 그 콘서트장에 몇 명의 노인들이 참석하여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미사도 이와 비슷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례는 더 경직되고 그와 발맞추어 신자들은 덜 나옵니다. 성가대는 신자들이 따라 부를 수 없는 특송을 많이 부르고 신자들은 마치 성가대가 대신 찬미해 주는 것처럼 앉아있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할 때도 형식적입니다. 그냥 옆 사람과 고개만 살짝 숙이며 눈인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을 때 그렇게 눈인사만 살짝 하였을까요? 서로 기쁨에 끌어안고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전례의 생동감은 믿음에서 오는데 그 믿음은 소리 높은 찬미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이 소리 높여 찬미하지 않으면 그 전례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소리 높여 찬미 할 수 없는 이유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샘솟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전례에 절대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전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전례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기쁘게 찬미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마르코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시다가 먼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으로 들어가 성전의 장사꾼들을 모두 쫓아내신 다음, 다시 돌아오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바싹 말라 죽어버린 것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단의 구조가 마치 샌드위치처럼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을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감싸고 있는 형식입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믿음이 없는 전례는 결국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이란 예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도 바로 참다운 예배는 어때야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사마리아 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이 있다면 받은 것에 감사해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사는 이전부터 ‘에우카리스티아’, 즉 ‘감사’로 불렸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구원되었다는 믿음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감사의 찬미가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창피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병이 치유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찬미소리가 저 사마리아인보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참례한 미사 중 가장 길었던 것은 6시간입니다. 피정 때였기 때문에 가능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6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찬미를 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려보았고 평화의 인사를 하며 함께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느꼈습니다. 그 가슴 뜨거움은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뜨거운 찬양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와 큰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한 사마리아 사람만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전례가 과연 구원받은 기쁨에 성당이 떠나가라 찬양하고 춤을 추는 시간인지, 아니면 의무이기 때문에 참아내야 하는 무엇인지 되돌아볼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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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19년 11월 13일
  | 11.13
451 26.8%
[수원]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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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한센병 환자에게 그러셨듯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시지 않고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 라자로 마을의 피정의 집을 “아론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아론은 사제이다. 구약에서 사제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한센병이 걸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보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한 다음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듯이, 아론의 집의 의미도 같다. 아론의 집에 들어 와서 모든 치유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은 늘 그분의 영광을 시기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먼저 고쳐주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나병의 증세와 그것이 치유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쳐주신 한센인들을 꾸중하신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유대인 한센인들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사드리는 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은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신 분을 찬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사야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섬에서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 42,12)고 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써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 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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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9년 11월 13일
  | 11.13
451 26.8%
[전주]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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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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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도 전에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셨을까? 어쩌면 “내가 너희의 병을 고쳐 주겠다.”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을 하셨는데 복음서에는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병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간 것은, 병을 고쳐 주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갔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그들의 ‘믿음’에 어떤 문제점이 안 보입니다.

두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냥 병을 고쳐 주시지 않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고쳐 주셨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보통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는데, 믿음과 순종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시련’입니다.

만일에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치유 기적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다음에 아홉 명은 그냥 가고, 한 명은 되돌아옴으로써 다른 치유 기적 이야기들과는 다른 특별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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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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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사제들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았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각자 자기 갈 길을 갔을 것입니다.

1) 그들의 첫 번째 잘못은 청할 줄만 알고 감사드리는 것은 잊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은총을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은총은, 큰 은총이든지 작은 은총이든지 간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항상 특별한 선물입니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냥 가버린 아홉 명처럼, 청할 때에는 정말로 간절하게 청하지만,은총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사드리지 않으면,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초보 단계의 신앙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계속 그런 식이면, 기복신앙으로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청하는 것만 잘하고 감사드릴 줄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떤 고통 속에 있을 때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청원기도를 바쳤다면 감사기도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 말씀은 원래 ‘의심하지 않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지만,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감사드리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면, 원하는 것을 받기 전이라도 감사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사실 감사기도는 받은 후에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받기 전에도 바쳐야 하는 기도이고, 언제나 항상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감사드리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더욱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의 두 번째 잘못은, ‘몸의 치유’만 원하고, ‘영혼의 구원’은 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몸의 치유’를 원하고, 그것을 간절하게 청한 것 자체는 잘못한 일이 아니라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이 치유된 것에만 만족해서 거기에서 멈추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즉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병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몸’은 썩어 없어질 물질일 뿐입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아홉 명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계속 건강하게 살았겠지만, 그냥 그것으로 끝났을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예수님께 돌아와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노력했을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사제에게 가지 않고 중간에 되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사제에게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참 사제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권능은 곧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또 그가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혼의 구원’을 원했음을 암시합니다. 발 앞에 엎드린 것은, 하느님을 향한 공경의 표시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그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해서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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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신부
2019년 11월 13일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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