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평일강론 (홀수해)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5 94%
[수원/청주/원주]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조회수 | 785
작성일 | 15.01.08
[수원]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

우리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아름답고 겸손된 자세를 볼 수 있다.
즉,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로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 요한에게 불평을 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기 스승이 예수보다 뒷자리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 싫었고 사람들이 새로운 선생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볼 때 무시당하고 부당하게 버림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의 답변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답변으로서 3가지를 설명한다.

1. 세례자 요한은 사실상 자신의 위치가
하느님의 단순한 전달자며 앞으로 오실 더 크신 분을 위한 선구자요 예비자로 보냄을 받았을 뿐, 그 이상의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킨다.

2.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새로이 나타난 선생이 더 많은 제자와 더 많은 개심자들을 얻고 있다면, 그것은 요한에게서 사람들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이며, 하느님 앞에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자기들과 하느님은 너무나 밀접한 인연으로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 관계를 신랑 신부의 혼인관계 인연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표현했고, 이러한 인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신을 따를 때에는 마치 정혼한 여인이 혼인한 계약을 위반하여 부정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출애 34,15; 신명 31,16; 시편 73,27 등에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랑이요, 이스라엘 백성은 신부라는 것이며, 세례자 요한은 신랑과 신부를 맺어주는 연락자이며 신랑과 신부를 함께 모시는 사람으로서 혼인 잔치를 주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하면서 그 신랑을 신부에게로 맞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임무는 끝났으니 기꺼이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무대 중심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 그리고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이스라엘 사이에 혼인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그 사명이 끝났을 때 자신은 뒤로 사라지는 것이 그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은
좌절과 질투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자기의 임무를 다했다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복음에 나타난 요한의 참된 겸손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465 94%
[청주]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

--------------------------------------------------------------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 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 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01.09
465 94%
[수원] 어디를 향하는 길이 될 것인가?

--------------------------------------------------------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함께 주고 있을 때의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로 가기 위한 준비단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두 세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요한이 질투를 할 것 같아서 그리 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요한은 신부가 신랑에게로 향하는 ‘길’과 같은 존재란 뜻입니다. 길은 두 갈라진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고 싶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길은 그래서 돋보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길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되고 목적지로 빨리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랑의 친구,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면 바로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가기 위해 밟고 지나가는 그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록 지금은 작아질지언정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히 사랑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들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

검은 돌들이 사는 산동네가 있었습니다.
이 돌들은 로마 시대에 길을 만드는 데 쓰였습니다. 두 친구 돌들도 서로 미래에 어느 길이 될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멋지게 생긴 돌이 친구 돌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황제가 다니는 길이 될 거야. 비록 돌에 불과하지만, 황제가 다니는 길은 인간들도 부러워한다고. 너는?”

“나는 잘 모르겠어. 뭐 필요한 데 쓰이겠지. 너야 평평하고 단단하니까 임금이 다니는 길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울퉁불퉁 못 생겨서 황제의 마차가 다니기에 적합하지 않거든.”

드디어 인부들이 와서 두 돌을 파냈습니다.
역시 황제가 다니는 길에 친구 돌이 먼저 박혔습니다. 서로 헤어지며 둘은 슬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황제를 ‘네로’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황제의 마차가 자신의 머리 위로 지나갈 때는 조금 고생스럽기는 해도 사람들의 함성과 꽃이 뿌려졌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차가 지나갈 땐 머리가 좀 아팠지만 그래도 영광을 받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울퉁불퉁한 돌은 사람이 밟고 지나다니는 시골길에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길 위로는 죄수들이 피를 흘리며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네로 황제에 의해 처형되는 사람들이 끌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돌이 평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족쇄를 찬 사람들이 그 돌에 걸려 넘어지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바오로라고 부르는 죄수가 또 그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돌에 그 사람의 피가 떨어졌습니다. 돌은 고개를 들어 바오로라는 죄수의 목이 세 번 튕긴 자리에서 샘이 솟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황제의 길로 사용되었던 친구 돌은 마차 바퀴에 갈려져서 더는 쓸 수 없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위에 흙을 덮고 새로운 돌들로 새로운 길을 만들었습니다. 잠깐 황제의 길이 되었던 친구는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형장의 길이 되었던 돌은 사형 집행이 더는 이뤄지지 않았기에 시골에 가난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로 아직도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둘레에 줄을 쳐서 사람이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길에서 기도하고 찬미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자신에게 뿌려졌던 바오로의 피가 성인의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 박힌 돌은 2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에 가보면 어떤 길들은 ‘비아 아우렐리아’처럼
그 길을 만든 황제의 이름으로 여전히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비아 그리스도’입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죽었지만 여전히 그 황제가 기억되는 곳에서는 그 황제가 만든 길이 그 황제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부터 불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향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그 길을 간 그분의 신부가 영원히 그 길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아 영원히 사는 방식입니다.

나를 거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세속-육신-마귀의 자신을 죽이고 샘이 솟게 하는 바오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아니면 세속-육신-마귀를 쫓는 네로 황제의 삶을 살게 됩니까? 우리가 세례자 요한과 같아지려면 어떠한 길이 되어야 하는지 명명백백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1년 1월 9일
  | 01.09
465 94%
[원주]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 서간의 저자는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주님은 하느님과 같으셔서 어떤 일이든 청하면 들어주시는 분이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며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악마의 손에서 구해주십니다.

물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악마가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우리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께서 참되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가난하던 시절 희생과 함께 부모님께서 보여 주셨던 사랑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지요. 생활이 여유도 없고 구차한 가운데에서도 부모님은 자식에게 무엇이든 형편이 자라는 데까지 다 해주시려 했지요. 비단 부모 사랑 뿐 아니라 연인 사이의 사랑의 특징에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수한 사랑의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는 이장희 작곡, 노래가 떠오릅니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그런데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요한 서간의 글에서도 지극한 정성과 희생을 가슴에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요한 5,14-15)

아울러 서간의 저자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구분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당신 자신은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우리에게 당신의 모든 사랑을 생명과 함께 온전히 주시려 하십니다.

사회심리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프롬 (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이
‘사랑의 기술’에서 주장하는 사랑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이 성숙한 사랑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과 겸손, 용기, 신념, 끊임없는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가 합니다. 사랑은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를 포괄하면서도 사랑하는 대상에게 존중과 관심, 책임감을 가지면서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주면서 자아 성장과 확장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로소 완전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례성사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 아침에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유대인들이 지켜온 정결례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자 요한의 역사적 배경과 이어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미크바(מִקְוָה Miqva)’는 유대교에서 정결 예식을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데, 지금 우리에게는 목욕을 위한 욕조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는 필히 이 ‘미크바기 설치하여 불결한 이들을 정화시켰던 것입니다.

불결함 속한 대표적인 사람은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를 접촉한자를 말합니다. 악성 피부병을 앓는 사람, 월경과 유출병을 앓는 사람이었는데 이들이 미크바 예식을 치룬 후 희생제물을 바쳐서 이를 증명하여야 했습니다.

후대에는 유대교로 개종하는 예식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미크바에 담은 물에 잠그는 것은 정화와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 외에서 샘물이나 우물물을 받아서 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이런 규제에서 자유롭게 요르단 강물에서 정화 예식을 하였는데, 그 의미가 불결에더 나아가 회개를 거쳐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기에 유대인들과의 차이 때문에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요한 3,25)기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 제자와 유대인 사이에
누구의 정결 예식이 더 정통적인가를 두고 말다툼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이번에는 자기와 같이 강물에서 세례를 주시며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예수님에 대해서 스승께 질문을 합니다.

본문이 풍기는 분위기는
이제까지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새롭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니 될 말이냐?’는 의미의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기대하지 못했던 대답을 스승께서 거침없이 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요한 3,27-28)

스승인 세례자 요한은 역시 제자들이 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잔치집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쁘다는 말과 함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3,30)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스승인 세례자는 제자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상대인 예수님을 높이는 겸손의 모습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대답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는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문득 사제서품을 앞둔 대품 피정 중에
한 교수 신부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하려 노력했습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밉고 또 시기의 대상이 되더라도 그 상대가 능력이 있으면 그것 자체를 인정하고 대접해야 한다. 만일 그것을 죽여 버린다면 하느님 앞에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제자들이 경쟁의 대상으로 부추기려 했지만 그분은 주님을 아셨던 것이지요. 바로 하느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는 배척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그리고‘크신 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한결 같이 자신은 메시아가 아님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오시기로 예고된 이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 더 크시다는 사실을 한결 같이 고백하며 메시아에 대한 고백하며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시지만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의 세례를 주실 것을 예고합니다.

----------------------------------------------------------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2021년 1월 9일
  | 01.10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1480   [수도회]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3] 2005
1479   [부산/원주/제주/수원] 소작인이 강도가 되기까지...  [6] 2651
1478   [인천/서울/의정부] 나만 잘되면 그만이리라 생각  [3] 2377
1477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독서와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죽여 버리자)  [5] 1974
1476   [수도회] 누가 더 불행한가?  [3] 2032
1475   [부산/제주/원주/전주/수원] 부자와 거지 라자로  [6] 2749
1474   [인천/의정부/서울] “나는--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5] 2228
1473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독서와 복음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  [6] 1912
1472   [수도회] 섬김의 리더십  [8] 1916
1471   [부산/원주/제주/청주/수원] 예루살렘으로 가는 두 마음...  [7] 2290
1470   [인천/서울]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5] 3048
1469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독서와 복음 (사람의 아들도 섬기러 왔다)  [6] 1955
1468   [수도회] 하느님 앞에 우열 없이  [5] 2057
1467   [수원/청주/전주/원주] 율법의 근본 정신!  [5] 2494
1466   [인천/서울] 진정한 믿음이란?  [3] 1937
1465   (자)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독서와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6] 2139
1464   [수도회]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  [5] 2080
1463   [부산/제주/청주/수원/원주/전주]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를 베풀어라.  [10] 2268
1462   [인천/서울] 사랑하지 않을 이유…….  [3] 2126
1461   (자)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독서와 복음 (남을 용서해야 용서받는다)  [7] 1869
1 [2][3][4][5][6][7][8][9][10]..[74]  다음
 

 

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1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