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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관계’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조회수 | 978
작성일 | 15.01.10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온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간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시어 인간과 ‘사랑의 관계’ 곧 계약을 맺으셨고, 관계 속에 현존하신다. 따라서 관계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실존방식이자 삶의 질을 좌우하는 본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자신이 아닌 존재와 무엇인가를 주고받는다. ‘영’(靈)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인간에게 가장 으뜸가는 관계는 ‘영적인 관계’이다. 오늘의 성경 말씀들의 비추임을 받아 영적인 주고받음의 원리에 대해 묵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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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주고받음의
첫 번째 원리는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영적 관계에서 생명과 선과 사랑을 주시는 분은 일방적으로 하느님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철저히 우리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무상(無償)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1요한 5,14)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인간은 그저 받는 처지에 있다. 이렇듯 영적인 주고받음은 재력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자들을 제멋대로 구는 천박한 ‘갑(甲)질’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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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원리는
사랑의 주님께서는 늘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만,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 청하고 받을 때 요구되는 조건은 ‘그분의 뜻에 따라 야 한다’(5,14)는 것이다. 사랑의 동기에서라면 어떤 형제가 불의를 저질렀다 해도 그것이 죽을 죄 곧 성령을 거스르는 죄가 아니라면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1요한 5,16). 우리가 주님의 뜻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한없는 사랑과 선과 자유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청할 때에 주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기도 안에서 식별하지 않고
‘주님께서 알아서 주시겠지!’라고 말하는 ‘무분별한 막연함’에 자신을 내맡기는가! 또 우리는 고난을 당하거나 힘들고 혼란스러울 때 '사랑으로 겪어내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책임지려는 노력 없이, 자신도 모르게 ‘다 주님의 뜻이야!’라고 말하며 ‘무책임한 의존’을 하는가! 주님께 청하기 전에 그분의 뜻을 찾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기도하며 식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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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주고받음의 마지막 원리는
인간은 하느님께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되돌려야 할 의무’(reddere)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는 우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며 우리가 감사를 드림도 그분의 은사일 뿐이다(연중평일 감사송 4). 생명과 재능, 시간, 재물, 지위, 가족, 인간관계 등 어느 것 하나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그렇게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며 ‘받는 존재’이며 ‘말씀을 듣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오로지 그분으로부터 받은 선(善)과 사랑, 동료 인간을 통하여 받은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할’뿐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향하여 흘러 지나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음을 잊지 않고, ‘주고받음의 영적 원리’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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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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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겸손해질수록

예수님 공생활 초기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유명한 논쟁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하여 ‘세례 원조 논쟁’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논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도 ‘원조 논쟁’은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때로 법적 투쟁까지 불사합니다. 장충동이나 신림동, 춘천이나 양평 같은 지방에서 아직도 원조 논쟁은 치열합니다. 한쪽에서 ‘원조 ○○동 족발’이라고 크게 간판을 내겁니다. 그럼 건너편 가게에서는 ‘진짜 ○○동 족발’이라고 맞대응합니다. 그 다음 집에서 내거는 간판은 이렇습니다. ‘완전 진짜 ○○동 족발’ ㅋㅋㅋ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와 관련해서 원조는 단연 세례자 요한이 분명했습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이 주도한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갱신운동은 은 전 국민적, 선풍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얼마나 범국민적이었던지 세리와 창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까지 몰려와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 막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님의 세례 운동은 세력 면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비교가 안 될 지경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스승들인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그분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알력과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세례자 요한 제자들의 볼멘 목소리를 통해 상당한 긴장상태가 있었다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표현이 꽤나 정중하고 완곡하게 들리지만 사실 세례자 요한 제자들의 심기는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을 스승 세례자 요한을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요르단 강은 우리 영역인데, 세례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원조인데, 이게 뭡니까? 손님들 다 저리로 몰려가고 있는데, 뭔가 스승님께서 손을 쓰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 때 세례자 요한의 태도에 우리의 시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향해 ‘그래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다. 뭔가 대비책을 마련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례자 요한은 오래 지속된 논쟁을 한 번에 잠재우는 말 한마디, 정말이지 기가 막힌 한 마디 말을 던집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복음 3장 28절)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복음 3장 30절)

세례자 요한이 평소 지니고 있었던 극단의 겸손이 돋보이는 선언입니다. 참된 겸손의 덕이 어떤 것인가 묵상해봅니다. 그저 난 아니다, 난 부족하다, 난 형편없다며 무조건 뒤로 빼는 모습이 겸손은 아닙니다. 자신의 신원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겸손의 덕의 출발점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대단한 겸손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의 요란한 박수갈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물, 주인이 아니라 종,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파견한 사람이 아니라 파견된 자라는 명확한 신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 교회는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극도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던 교회가 그분으로 인해 불어온 쇄신의 바람으로 인해 제2의 프란치스코 운동을 바탕으로 겸손과 청빈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다방면에 걸쳐 탁월하고 출중한 사목자라 할지라도 이 겸손과 청빈의 덕이 결여되었을 때 우리는 받아놓은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우리가 고급 브랜드로 치장을 하고 높이높이 올라갈수록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칭송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릴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낮아지고 겸손해질수록, 더 가난해질수록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하늘나라를 발견할 것이며 그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목이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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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가장 아름다운 기쁨은 가장 좋으신 주님을 우리가 만나는 기쁨입니다. 가장 충만한 기쁨은 비할 데 없이 좋으신 주님 사랑과 우리가함께 간다는 기쁨입니다. 기쁨의 이유는 존재의 이유이기도합니다. 하느님 사랑 없이는 채워질 수 없는 우리의 존재를 겸손되이 인정하게 됩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겸손되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면 모든 것은 아름다운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작아지면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아름답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오셨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도 말씀으로 밀려오는 기쁨은 저마다의 길을 충만하게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자신사이에는 이 모두를 기쁨으로 충만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충만케 하는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존재를 일깨워 주시는 가장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있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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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생 -충만한 기쁨-

오늘도 몇몇 단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제가 쓰는 강론은 하루하루 삶의 기록입니다. 특히 안식년 중에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밥값(?)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강론 글을 써서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아버지께 올리는 사랑의 편지이자 형제자매들에게 드리는 사랑의 편지이며 제 사랑의 고백의 일기입니다. 마치 매일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론이 '사랑의 강'처럼 느껴지고 모아진 강론들은 흡사 '사랑의 바다'를 연상케 합니다.

왜 다산 정약용이 18년 간의 유배지에서 일기쓰듯 많은 글들을 꼬박 썼는지, 왜 토마스 머튼이 매일 일기와 더불어 무수한 글을 썼는 지, 신영복 선생이 20여년의 옥살이에서 '감옥에서의 사색' 같은 주옥 같은 글들을 남겼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살기위하여' 사랑을 다해 쓴 글들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치열하고 항구했던, 참으로 아름답게 살았던 인생들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어찌보면 인생은 감옥 같기도 합니다. 도저히 탈옥이 불가능한 감옥입니다. 작은 감옥, 큰 감옥의 차이일 뿐입니다. 길게만 느껴졌던 산티야고 순례도 끝이 있었고, 미국 뉴튼수도원에서의 순례도 이제 끝이 보이며, 1년여의 안식년도 끝이 보입니다. 공동체의 사정에 의해 약간 앞당겨 올 2.28일(토) 요셉수도원에 귀원하여 3.1일 주일 미사를 주례로 다시 원내 생활이 시작됩니다.

어제 빠코미오 원장수사님의 이메일 연락을 받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시간의 감옥'을 탈주할 수 없는 '시간의 수인(囚人)'들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요즘은 모두가 가난해 보이고 불쌍해 보입니다. 요셉수도원의 형제들이나 여기 뉴튼수도원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생각나는 모든 이들이 그러합니다. 모두 나름대로 힘겹게 제 십자가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분들이요, 참으로 위로와 격려가, 때로는 실질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도반들입니다. 저절로 연민의 마음이 울어납니다.

기쁘게 살 때 아름답습니다. 인생 감옥에서의 해방의 자유를 위해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기쁨보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기쁨에 저절로 따라오는 평화의 선물입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의 사무엘 원장 신부님의 늘 웃음 띈 얼굴로 기쁘게,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사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오후에는 꼭 밖에 나가서 육체노동을 합니다. 선의(善意)의 유모어와 재치도 뛰어나 별명 작명의 대가(?)라 할 만 합니다. 신부님이 작명한 요셉 수도원의 두 형제들의 '나르는 물방개', '불암산 건들 바위'라는 별명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납니다. 세계 베네딕도회 수도원 및 은인들에게 발송하는 연말편지 중 저에 관한 내용도 긍정적 시각이 빛납니다.

'신부님은 우리의 연중 피정을 지도했고 많은 면에서 우리를 도와줬다. 신부님은 한국의 그 지역 내에서 꽤 유명한 영적 지도자이고 많은 신자들과 사제들, 수도자들이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 신부님을 찾아 온다. 신부님은 여기서도 많은 이들을 돕고 있다.'

과찬이지만 이 또한 신부님이 저에게 준 '기쁨의 선물'입니다. 진정 '영적 지도자'다운 삶을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새로 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인생은 기쁨의 인생입니다. 기쁨의 빛이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기쁨이야 말로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기쁨의 선물이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고 위로와 치유가 됩니다. 오늘은 '기쁨의 아름다운 인생'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할 때 기쁨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주님을 사랑함이 우선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샘솟는 기쁨이요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마음 착해서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 향한 열렬한 사랑 있어 성인입니다. 사랑만이 허무를 몰아냅니다. 모든 성인들의 우선적 특징도 하느님 사랑에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수도형제들에게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마치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이 서로 경쟁자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인기가 예수님께로 집중되고 있으니 요한에겐 질투심이 끓어 오를 법 한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주님을 사랑했고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요한은 즉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은사임을 알아 챈 요한입니다. 주님을 사랑했기에 이런 깨달음입니다. 이런 '깨달음의 빛'이 질투심의 어둠을 몰아내고 관대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요한의 넉넉하고 관대한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둘째, 자신을 사랑할 때 기쁨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주님을 알 때 자신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바로 주님을 앎으로 자신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자신을 알 때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예전 마르꼬 수사님에게 써드린 자중자애(自重自愛)란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정말 자존감 약해 가는 현대인들에게 주고 싶은 말입니다. 하느님 사랑 다음으로 자중자애의 자기 사랑입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할 때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요 자중자애의 사람이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뿐이다.“

자기의 신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겸손한 요한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요한은 상상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 없는 우리 또한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자중자애의 겸손이요 참 나의 발견이요 실현입니다. 겸손할 때 아름다운 인생이요 겸손에서 샘솟는 참 기쁨입니다.

셋째, 작아질수록 기쁨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겸손은 사랑으로 작아지는 것이요 비워가는 것이요 낮아지는 것입니다. 모든 수행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진정 사랑의 성장은 겸손의 성장입니다. 살아갈수록 작아질 때, 비워갈 때, 낮아질 때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텅 빈 충만의 아름다움에서 샘솟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신랑(예수님)과 신랑 친구(요한)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피력하는 요한의 모습은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이는지요.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한다.“

바로 여기 행복한 삶, 자유로운 삶, 기쁨의 삶, 아름다운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신랑 예수님의 친구들인 우리 모두의 고백으로 삼아도 너무 좋은 고백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한 기쁨도 이래야 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바로 참된 영적여정을 요약하는, 평생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영적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바로 요한 세례자처럼, 우리 교회의 성인들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사람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1독서 사도 요한의 말씀처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우리는 모두 세상을 이기며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태어나신 분,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기쁨 충만한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 내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며, 나를 사슴처럼 달리게 하시고 산 봉우리로 나를 걷게 하시나이다."(하바3,19).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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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립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에서 세례를 베푸셨다’(요한 3,22 참조)는 보고로 시작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4장 2절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베푼 것으로 소개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제자들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분”으로, 계시를 통해 오신 분이심을 밝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 3,27)

이어서, 자신과 예수님을 동시에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과 ‘신부’는 성경적 표상입니다.
곧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신부를 표상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내줍니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부인 교회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의 동반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5,15 참조),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몸소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입니다.”(요한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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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만이 저의 신랑입니다.
당신 마음을 듣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제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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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1년 1월 9일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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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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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이 위기감을 감지합니다.

자신들은 스승 요한이 조상 때부터 기다리던 메시아이자 그리스도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스승이 그리스도라고 증언했던 예수님이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스승이 아닌 예수님께 몰려가 세례를 받고자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중 하나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분명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 그것도 인생을 걸고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닙니다.

요한의 제자들 역시 요한을 따르고자 결단을 내리기에는 많은 포기와 각오 그리고 희망이 함께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대 밖의 이야기를 스승으로부터 들었고, 거기에다 스승이 증언한 분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면서 적지 않은 마음의 동요가 있었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해 자격지심을 느끼거나, 더 나아가 열등감에조차 빠질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더 없이 나름의 가치와 소명을 가지고 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분명 ‘어떤 길을 걷는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옳지 못한 길의 범주에 들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길은 가치가 있는 좋은 길입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 한다 해도, 그 길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 좋은 길은 오히려 불행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삶의 내용, 이른바 삶의 질에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질은 복음적인 기준으로 재어야 합니다.

구세사에 드러난 하느님의 계획을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의 길도 필요했고, 예수님의 길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도 필요했습니다.

누구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에서 가치를 찾는 것을 넘어 소명의식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삶이라 한다면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무엇보다도 삶을 바라보는 마음에 달려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보지 못한 길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지금 가고 있는 길에서 최선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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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 선교수도회 김대열 신부
  |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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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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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겸손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체하는 것도,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체하는 것도 아니다. 참된 겸손은 아무것도 아닌 나의 처지를 솔직하게 시인하는 것이다. 피조물인 나와 창조주인 하느님 사이에 존재하는 실제 관계를 인정하고, 그렇게 인정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의 모습을 잘 보여주신 분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하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모습을 본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닫는 사람은 때가 되면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내놓는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자신의 현재 처지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정표에 지나지 않으며, 그분은 날로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날로 작아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세례자 요한은 더욱더 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죽이면서 낮추었다.

하느님께 가는 여행은 자기를 넘어서는 여행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 자기가 중심인 방향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방향으로 옮겨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의 여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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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교회 김은호 목사
  | 01.09
465 94%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복음 3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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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속성은 나눔이다.
나눔과 공동체 기쁨과 하느님은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기쁨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의 기쁨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찾는 기쁨이 하느님 자녀들의 참된 기쁨이다. 충만한 기쁨의 원천은 오직 하느님께 있다. 기쁨은 하느님께 연결되어 있다.

사랑의 관계가 충만한 기쁨이다.
하느님의 기쁨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이다. 하느님 안에 머무를수록 더욱 커지는 기쁨이다. 하느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주시는 참 기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기쁨이 되신다.

기쁨의 힘은 사랑으로 비롯된다.
생명의 방향은 기쁨의 방향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쁘게 사는 것이다. 광야도 십자가도 풍랑도 어둔 밤도 하느님의 뜻 안에 있기에 모든 것은 충만한 기쁨이 된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기쁨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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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1년 1월 9일
  | 01.10
465 94%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의 핵심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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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무대가 차려진 후,
서막(序幕)에서 열연했던 세례자 요한이 무대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주인공으로 등장하시는 예수님과 스쳐 지나가듯이 살짝 마주치는데, 이른바 ‘세례 원조 논쟁’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선구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120 퍼센트 완수한 세례자 요한이
무대 밑으로 내려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순간, 예수님께서 등장하셔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런 상황 앞에 분기탱천하는 동시에
큰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는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사실 당시 세례! 하면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세례 갱신 운동을 시작한 독보적인 존재, 세례의 특허권자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 역시 자부심이 남달랐습니다.

그간 스승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모습은
제자들에게 있어 자부심을 가질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스승님에게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 강을 찾아왔습니다.

평범하고 가난한 백성들뿐만 아니라
유다 고관대작들, 사제들과 지도층 인사들도 모두 찾아와서 스승님 앞에 순한 양처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 모습 앞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혼란스럽고 당혹스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라는 ‘갑툭튀’가 나타나 스승님의 전유물이자 특허인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에게
쏠렸던 시선이나 환호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스승님 가게는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두 저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슬쩍 가서 분위기를 보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세례와 관련해서는
원조라는 자부심에 어깨 펴고 살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마음은 심하게 불편해진 것입니다. 분노가 폭발한 제자들이 이럴 수는 없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된다는 마음에 스승을 찾아와 다그치듯이 외칩니다.

“스승님,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복음 3장 26절)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분명 스승님께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분노하시고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리라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 담판을 지으리라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전혀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중인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복음 28절, 30절)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신원의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때, 세례자 요한이 직면한 현실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큰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한때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는데,
한때 세상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한몸에 받았었는데, 이제 그 모든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무대 밑으로 내려서야 한다는 것, 사실 수용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핵심과 본질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나서야 할 때, 그리고 물러서야 할 때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탁월하고도 명철한 식별력의 소유자였는데,
그것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한 세례자 요한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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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21년 1월 9일
  |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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