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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수원]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조회수 | 720
작성일 | 15.09.15
[청주]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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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를 하는 대로 들어 주신다면 매달려 보겠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나 성당을 찾는 발바닥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에 급급해 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의 끝맺음에 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한 가지도 못하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합니다.‘내일은 잘해야지’하고 결심하고서는 아무 의식도 없이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고서도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라고 있으니 뻔뻔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한 청은 물론 불평 불만하면서 뱉어버린 말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해서 투덜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때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내일 이루어 주실 수도 있으며 내 세대가 아니라 다음세대에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저는 제집에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마태13,58)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는 당신 말씀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을 낮추는 그곳에서 큰 힘을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 일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능력은 늘 작용합니다. 다만 내가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탓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물론“예수님은 연민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으로, 때로는 그자가 믿든지 말든지 일방적으로 기적적인 역사를 하십니다..그러나 우리 편에서 신앙이 합쳐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창조 역사가 일어납니다”(김정원신부). 그러니 열린 마음과 겸손으로 그분의 능력을 믿고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바대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열매는 행동하는 데서 맛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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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19년 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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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대장은 로마 제국 군대 직책으로 장교였다. 유다 민족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자의 일원이었으며 부하들을 거느린 상관이었다. 그래서 두려움의 대상이요, 늘 부정적 수식어가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 등장하는 이 백인대장은 이러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부하의 중병을 안타까워하는 자상한 상관으로 유다인들의 민심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저들을 사랑하여 회당까지 지어준 인물이었다. 그래서 유다인들도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백인대장은 찾아오시는 예수께 수고롭게 해드릴 수 없다는 전갈을 보낸다. 자신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만한 사람이 못 되며 감히 나가 뵐 생각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시면 자기의 종이 낫겠다고 한다. 신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겸손한 마음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백인대장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전갈을 듣고 다음과 같이 감탄하며 말씀하신다. “잘 들어두어라. 나는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본 일이 없다.”

본문은 주체(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말이 마치 물 흐르듯 이루어지고 있다. 백인대장은 영원히 찬미받으실 아드님을 깊이 신뢰하고 있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있다.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으나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백인대장은 이름이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예수께 가장 칭찬받은 인물이 되었다. 여기서 곧바로 백인대장의 종은 치유된다. 사랑과 이해, 인정과 배려, 겸손과 가난한 마음이 있는 곳에 치유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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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덕 목사 (경기도 덕혜원)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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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보다 이웃을 먼저 설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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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바닷가에서 더위에 군복 상의를 벗어놓고 진지를 구축하던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옷을 바다로 날려 버렸습니다. 때마침 적기가 출현하여 공습경보가 울렸고 상관은 즉시 참호로 대피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병은 옷을 건지기 위해 상관의 명령을 뒤로하고 달려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무사히 겉옷을 건져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병사는 명령 불복종 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게 되고 마지막 진술을 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잘못을 시인한 이 사병은 가만히 그 군복 주머니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진은 제게 마지막 남은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제 생명보다 귀한 사진입니다. 명령을 어기는 줄 알았지만 저는 이 사진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저를 벌해 주십시오.”

재판정에 한 동안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재판장이 마지막 판결을 내립니다.

“어머니를 이토록 사랑하는 병사는 조국도 그렇게 사랑할 것입니다. 무죄를 선고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판사의 판결은 공정한 것이었을까요? 그의 마음 안엔 ‘결국 사랑은 하나다’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미워하고 이웃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께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모습이 내가 실제로 하느님을 대할 모습과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로마인들을 싫어했습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접촉을 해서도 안 되고 그 집에 들어가도 몸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을 변호하는 이들이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백인대장이 유다인들에게 얼마나 명망이 높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백인대장을 위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증언을 들이시고 그의 종을 고쳐주시기 위해 길을 나서셨습니다.

백인대장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속국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종교를 잘 믿도록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 많은 백인대장을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랑과 겸손함의 사람이었습니다. 속국의 백성들을 사랑했고, 주님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시고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이의 청은 주님께서 무엇이든 들어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만은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꼭 한 번만 만나자고 합니다. 저도 시간의 한계가 있는지라 그 사람을 만나야할지, 거절해야 할지 분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스스로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결코 그 사람의 인품을 좋게 판단할 수는 없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했다면 이웃에게도 사랑받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청할 때 이 말씀을 바꾸어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느님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부활에 대한 증언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목격한 제자들이의 몫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다녔던 이들의 증언이기 때문에 예수님 본인의 증언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나 자신이 직접 설득하려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증언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 나를 증언해 줄 사람들은 내가 함께 살아온 나의 이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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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19년 9월 16일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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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 한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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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로마의 백인대장이 자기 종을 고쳐 주십사고 청한다. 그 종은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 병은 예수님만이 고쳐주실 수 있는 병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이 종은 치명적인 욕정으로 병들었거나 세속의 노예로 묶여 주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고 계시다. 하느님을 모르는 그래서 하느님과 거리가 먼 이방민족들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백인대장을 칭찬하고 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4-5절) 주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의 정신을 인정해 주셨다. 아직 교회가 탄생하기 이전에 회당을 지어 주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쓸 교회도 더욱 잘 지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회당을 지었지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신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6-7절)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감탄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절)

백인대장의 이 말은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의로움의 태양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한 줄기 작은 빛살도 어둠을 물리치듯이 이 병도 주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원로들과 그 친구들에게 모두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이 없다고 꾸짖으시고 계시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이방 민족들에서는 첫 번째의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라고 말씀하셨다. 백인대장은 스스로 자격없는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으며, 그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 사화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구원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백인대장이 주님께 자기 종을 위해 간청한 이 말은 우리가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기 전의 기도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한 이방인의 예수님께 간청한 말이 기도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고 우리도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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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9년 9월 16일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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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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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루카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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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백인대장’은 분명히 이방인입니다. 원로들의 말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있지만,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 귀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믿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입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혈통 같은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믿음의 실천’입니다(마태 7,2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할례 받은 이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할례 받지 않은 이들도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로마 3,29-30).”

오늘날의 우리 시각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특별한 일로 안 보이지만, 당시에 제자들 입장에서는, 또는 유대계 신자들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고, 특별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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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루카 7,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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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특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백인대장의 ‘겸손’과 ‘믿음’입니다.

백인대장이 자기가 직접 예수님께 오지 않고 원로들과 친구들을 보낸 것은 이방인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존중한 일인데, 그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라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 말입니다. 여기서 그의 ‘낮춤’은, 자기의 위치보다 더 낮은 위치로 자기를 낮춘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은 원래 낮은 존재라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 ‘낮춤’입니다. 즉 주님 앞에서 자기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 ‘낮춤’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의 겸손은 중요한 의미가 있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그리고 그의 겸손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주님께 무엇인가를 간청할 때에는 그처럼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간청’은 요구가 아닙니다. 말로는 주님께 자비를 간청하면서도, 그 태도는 마치 맡겨놓은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대단히 오만한 일, 옳지 않은 일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것은 청원기도를 바치는 사람의 기본자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백인대장의 ‘믿음’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라는 그의 말은,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 ‘병이라는 것’이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그는 단순히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는데, 사실 그런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이스라엘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없었습니다.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믿은 첫 번째 인물입니다. 사도들도 그 당시에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성체 직전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백인대장의 겸손과 믿음을 본받아서,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주님은 한 말씀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주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겸손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겸손이 부각되는 때는 고해성사인데,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고해실에 들어가면 죄인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간청해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 고해사제가 따끔한 훈계를 할 수도 있는데, 훈계를 한다면 그 말을 새겨들어야 하고, 또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을 성실하게 실행해야 합니다. 고해사제가 자기보다 어리더라도, 학교 후배라도, 집안의 동생뻘이라도, 그런 것들은 일체 생각하면 안 되고, 목자를 찾는 양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고해실에서는 누구든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로 느껴져서 못하겠다면? 그러면 그것은 고해성사의 은총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것이고, 자기가 거부해서 은총을 못 받게 됩니다.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고해사제도 다른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볼 때에는 역시 한 사람의 죄인이 될 뿐입니다. 선배 사제가 후배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보면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고, 사제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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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신부
2019년 9월 16일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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