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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인천] 희망의 배달부
조회수 | 557
작성일 | 15.09.15
새로운 모임에 처음 가게 되면 가족 관계에 대한 물음 외에 종종 듣게 되는 것이 취미에 대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너무 진부한 듯하여 ‘독서’라고 대답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자신 있게 답을 합니다. 사실 이런저런 책을 읽고 지식과 지혜를 쌓아가는 기쁨도 크지만, 그 내용을 정리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큰 기쁨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배달해주시는 분들이 반가운 소식의 전달자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과부는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배달부를 만납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그에게 위로자로서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서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진 그에게 잃은 아들을 되돌려주심으로써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배달부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누구에게 희망을 둘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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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교구 조성풍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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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과 회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 차이에 대해서 적은 재미있는 글이 하나 있어요.

- 감옥은 4평 방, 회사는 1평 책상.
- 감옥에선 하루 세 끼 식사 무료, 회사에선 자기 돈으로 식사.
- 감옥에선 TV 시청 가능, 회사에서는 눈치 보며 TV 시청.
- 감옥에선 가족 면회 가능, 회사에선 전화하는 것도 눈치.
- 감옥에선 감방 친구와 자주 놀 수 있으나, 회사에선 눈치 보며 면회.
- 감옥에선 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 회사에선 모든 소득 원천 징수.
- 수감자들은 철창 안에서 바깥세상을 그리워하고, 회사원들은 술집에서 바깥세상을 그리워한다.

이 글을 보면 어떤가요? 감옥이 좋을까요? 아니면 회사가 좋을까요? 아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감옥이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감옥을 선택할까요? 그것은 아니지요. 객관적으로는 감옥이 좋아보여도, 이 감옥에서는 할 수 없는 결정적인 것이 있지요. 바로 자유를 억압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도 감옥 체험을 하시는 분들을 너무나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 전, 어떤 분께서 하소연을 하시더군요. “신부님, 너무나 힘들어요. 지금 살고 있는 것이 마치 감옥살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지요. “지금 삶이 감옥이라고 느끼는 것은 스스로 마음을 감옥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만든 그 감옥을 박차고 나오십시오.”

사실 이 분만이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외가 아닌 것 같더군요. 스스로 만든 선입견과 많은 부정적인 판단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들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당신 뜻대로 행동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능력이라면, 우리들을 직접 움직여서 그렇게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지요. 대신 우리들이 직접 행동하게끔 만드십니다. 즉,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줘서, 우리들이 직접 판단하고 행동하게끔 하십니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만약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만 꼭두각시처럼 움직이게 된다면 어떨까요? 과연 그 삶이 행복할까요? 비록 때로는 좌절과 실패를 맛보기도 하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할 수 있을 때 그 삶이 행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이제 일어나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내가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체험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참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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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이순신 장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아까부터 계속 졸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선생님께서는 이 졸고 있는 학생에게 갑자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이순신 장군에 대해 얘기 해봐.
학생: 아, 순신이 형이요? 우리 형 친구인데요?
선생님: 그게 아니고 장군 이순신 말이야!
학생: 그 형이 장군 됐어요? 와~ 출세했네.
선생님: 아니, 장군은 돌아가신 지 오래 됐어!
그 질문에 이어지는 학생의 허무한 대답 때문에 반 아이들은 뒤집어졌습니다.
학생: 죽었어요? 안됐군요. 젊은 나이에……. 쯧쯧…….

어때요? 이 대화를 보시는 분들도 답답하죠? 물론 우스갯소리로 나온 유머이지만, 어쩌면 하느님께 대한 우리들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 싶어서 적어 보았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엉뚱한 소리만 계속해서 늘어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된 사랑을 주시려고 하는데, 그 사랑보다는 놀라운 기적만을 내게 내려주시길 바라는 또 그래야 하느님을 믿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어떤 외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어머니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울지 마라.”하고 이르시고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지요.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뒤에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시하지요.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그런 기적을 행하신 것인데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바로 기적 자체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그 큰 사랑보다는 두려울 정도로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느님만을 생각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러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외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어머니를 보시며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기보다는 기적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 이스라엘 사람처럼,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지길……. 그리고 그렇게 기적을 봐야지만 믿겠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결코 개인적인 영광을 위하여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나만의 영광을 위한 기적을 원하는,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기적 자체보다는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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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비 온 다음 날 새벽에 아침 운동을 위해 자전거를 끌고 도로를 나갔습니다. 밤새 비가 많이 왔는지 이곳저곳에 빗물이 고여있었습니다. 그래서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앞으로 가다가도 빗물이 고여있는 곳을 피해서 가거나 아니면 물이 튀지 않도록 속도를 줄여서 고여있는 곳을 조심히 건넜습니다. 물이 튀어서 옷과 자전거가 지저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한 대의 승용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가면서 고인 물이 물벼락처럼 제게 날아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습니다. 옷도 엉망이 되었고, 자전거도 개흙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지저분함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 제 얼굴도 엉망진창이 되었지요.

짜증과 함께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뒤 저는 신나게 자전거를 탈 수가 있었습니다. 어차피 버린 몸이라고 생각하니 빗물이 고여있어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오히려 물을 튀기면서 지나는 재미를 즐기면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워낙 엉망진창 몸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는 않더군요.

사실 우리는 피하려고만 하면서 오히려 더 힘든 순간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냥 즐기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눈치를 보면서 조심에 조심을 더할 뿐입니다. 이 과정 안에서 스스로의 힘듦만 가중됩니다. 즐긴다는 것은 어쩌면 내 몸을 완전히 내어주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습니다. 주님께 우리를 완전히 맡기면 편안함과 함께 큰 기쁨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보다는 이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지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데 더 큰 관심이 있기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한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과부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찬양하고 감사를 드렸던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께 푹 안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이 순간을 즐길 수가 있으며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아닌 세상에 집중하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못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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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19년 9월 17일
  |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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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전, 저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여름, 장례미사를 준비하던 중 저의 외할머니 또한 쓰러지셨습니다. 저의 외할머니께서는 어려서부터 연년생인 저의 누나와 쌍둥이 형제를 어머니와 함께 돌봐주신 더 없이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채로 할머니의 병상에 찾아가 병자성사를 직접 집전하였습니다. 힘없이 누워계신 할머니의 모습--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자인 저에게 성실히 고해성사를 보시던 할머니의 눈빛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병자성사를 곁에서 지켜보신 일이 있다면 아시겠지만 병자성사의 기도문을 읊는 일은 사제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미 알고 있는 가족 당사자가 직접 기도문을 읽기에는 다소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특별히 병자성유를 도유할 때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의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이 교우에게 거룩한 기름을 바르오니, 당신의 능력으로 그를 회복시켜 주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위로해 주시어, 이 교우로 하여금 힘을 다시 얻어 악을 쳐이기고 희망을 가지게 하소서”.

이 병자성사의 모습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고, 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유학길에 올라 멀리서 할머니께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찾아 뵈었을 때, 묻혀 계신 할머니의 자리를 보며 얼마나 아쉽고 허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순간까지 내 손자가 나를 너무 사랑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는 할머니의 소식을 들으며 그분께 위로가 되었음에 안도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인간의 인생은 결국 죽음을 향하여 있음을, 언젠가는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다다르자,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 삶을 지탱해준 많은 도움과 하느님의 위로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인이라는 곳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나인이라는 곳은 열왕기 4장 18-37절에서, 예언자 엘리사가 과부의 아들을 살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들렀을 때 상여에 실려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과부와 그의 죽은 외아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적인 슬픔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을 여읜 과부의 비극적인 삶,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이것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신 예수님이 그대로 지나치실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따뜻한 음성으로 “울지 말라!”라고 위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마음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우리의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예수님은, 결국 “젊은이여, 일어나라!”하고 명하심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을 되찾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 자체만을 바라보고 기대하게 됩니다. 현재의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죽음과 질병이라는 고통과 슬픔을 당장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시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죽음이라는 한계는 결코 바로바로 극복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다른 종교인들과 무신론자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닫고 명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과부의 슬픔을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그 어려움을 주님께서 당장 해결해주시길 바라지만, 인간의 방식이 아닌 주님의 방식대로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그 와중에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며 손을 꼬옥 잡아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따르는 주님이십니다.

때로 우리의 삶은 슬프고 잔인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함께 해 주시는 예수님의 위로와 따뜻한 손길 또한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 사제인 손자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외할머니의 마지막 숨결의 그 순간 제가 느꼈던 안도감과 하느님의 은총이, 다른 이들에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더불어,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은총과 축복을 전해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말씀하시는 대상은 죽은 이가 아닙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우리가 그 대상입니다.

오늘 묵상 중에 이러한 주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바라며 하느님의 뜻에 순명할 것을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일어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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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
2019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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