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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부산/수원/전주] 과부의 통곡소리가 얼마나 크고 슬펐던지
조회수 | 982
작성일 | 15.09.15
오늘 복음은 나인이라는 동네에 죽은 외아들의 과부와 만나는 장면입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과부라는 것만 해도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거기다 외아들까지 잃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필요 없습니다. 과부가 느낀 슬픔은 절망 그 자체였고 죽음보다 더한 슬픔이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나서 여인에게 펼쳐진 고통의 세월은 그나마 견딜 수 있었습니다. 외아들이란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과부의 삶은 외아들의 죽음으로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과부의 통곡소리가 얼마나 크고 슬펐던지 나인 동네 곳곳에 그 소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너무도 안쓰러운 나머지 너나 할 것 없이 장례 행렬에 참여하여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절망적인 슬픔을 측은히 여기신 예수께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큰 슬픔에 잠겨있는 과부의 얼굴을 눈여겨보신 예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지칠 대로 지친 과부의 어깨에 손을 엊으시며 따듯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슬픔의 원천인 죽음마저 물리치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왜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상처, 우리의 부끄러움, 우리의 한계, 우리의 과오, 우리의 실수, 우리의 치부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오늘 이 과부의 애절한 울부짖음을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여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과부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 과부의 크나큰 슬픔을 안쓰러워하시며 과부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관에 넣어진 채 무덤으로 향해 가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십니다.

참으로 주님의 손길은 생명의 손길이요 축복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제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슬픔의 행렬이 기쁨의 행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참으로 필요한 우리의 자세는 바로 나인 동네의 과부와 같은 간절한 심정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오실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아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셔서 우리를 향해 "울지 말라."고 다정하게 우리의 등을 두드리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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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대교구 김병수(루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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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예수님께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치유기적’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기적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인’이라는 도시는 나자렛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나자렛에서 걸어서 두어 시간의 거리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곳 나인이라는 마을의 젊은이를 되살리신 기적 이야기는 루가 복음서에만 전해옵니다.

루카 복음서는 흔히 ‘소외자들의 복음서’라고 불리워집니다. 루가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활동 초기부터, 곧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하신 때부터 소외자들에게 큰 관심을 드러내십니다. 루카 복음 4장 18절-19절에 의하면 이사야서 61장 1절-2절: 58장 6절을 읽으셨다는데, 그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로다. 주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시력 회복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해방하여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함이로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각별히 아끼신 여러 부류의 소외자 안에는 고통받는 병자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향한 특별한 관심과 사랑은 초기 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의료사업에 깊이 헌신하는 소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다시금 ‘의료와 선교’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초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병자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시대 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 의료 사업에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또한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2년도에 질병의 고통에서 신음하고 있는 병자들에 대한 사회와 이웃의 관심을 유도하고,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명감을 일깨우는 동시에 고통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도록 ‘세계 병자의 날’을 제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천주교부산교구에서도 메리놀병원과 성분도병원을 메리놀수녀회와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로부터 경영권을 인수받은 후 지금까지 지역사회 내에서 그리스도의 치유사도직을 재현하고, 생명사랑과 인간존중을 실천하기 위해 사랑과 정성을 다해 헌신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제도의 변화로 의료사업은 큰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의약 분업 이후 의료계의 경영 악화와 국민들의 질적 수준과 의식의 변화 등으로 메리놀병원과 성분도병원의 의료 시설로는 이에 부응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부산교구에서는 2003년 8월 29일에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 85-5번지에 부산성모병원 기공식을 갖고,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습니다. 부산성모병원의 신축 과정은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크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교구민의 적극적인 관심과 기도와 익명의 은인들의 협조 및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계획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산성모병원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준공되어 진다면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보이신 많은 기적들, 특히 고통 받는 병자들을 치유하신 기적들을 재현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전인적 치료와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구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 힘겨운 일이 하느님의 뜻대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교구장이신 정명조(아우구스티누스) 주교님께서 강조하셨듯이 무엇보다 모든 교우들이 하나된 마음으로 열심히 바치는 기도, 특별히 교구의 주보이신 성모님께 바치는 묵주기도의 뒷받침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 받은 후 바친 아름다운 기도의 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갈무리 하겠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아멘.

▤ 부산교구 하용달 안드레아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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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아들

몇 년 전 주일이었습니다. 홀로 계신 제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본당 신자 할머니가 병자성사를 청했기에, 비록 마음은 어머니에게 가 있었고 어머니 생각으로 마음은 아팠지만 눈물을 삼키며 그 할머니에게 정성스럽게 병자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미사를 다 마치고 나서야 어머니 병실을 찾아가 볼 수 있었습니다.

사제의 삶은 지금 맡겨진 이들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어머니를 떠나 복음 전도를 위해 여행하시는 예수님도 부모를 몰라라 하는 분이어서가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 지금 가난한 사람들, 지금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더 사랑하시려 함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복음을 묵상하다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의 아들을 바라보시며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떠올리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 생각에 눈물을 흘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과부인 저희 어머니를 떠올려보았습니다. 문득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 부산교구 김인한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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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은총을 베풀게 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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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25일 오전 3시 20분께 인천시 서구 가정3동 H빌라 34동 205호 김모(34.여)씨 집에서 불이 나 김씨와 딸 조모(5)양 등 2명이 연기에 질식해 숨지고 아들(8)과 김씨 친구 서모(34.여)씨가 각각 중,경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불은 집 내부 28평 중 20여 평을 태우고 30분 만에 진화됐습니다.

서씨는 경찰에서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김씨와 함께 잠을 자던 중 방문 틈으로 연기가 들어왔다”며 “방문을 열어보니 거실 가운데에서 불이 나 김씨를 깨우고 작은 방에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김씨는 서씨와 함께 집을 빠져 나오다 작은 방에서 자던 자녀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집에 들어갔다가 쓰러져 소방대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숨졌습니다.

김씨 남편은 불이 난 날 당시 귀가하지 않아 화를 면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은 불이 난 빌라가 지은 지 15년이 지난 점으로 미뤄 누전으로 인한 화재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 볼 것을 다 해보지 못한 채 자녀들이 죽게 되면 어머니의 이후의 삶을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불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만약 김씨의 남편이 밖에 있었다면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아내를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미 늦어버린 듯해도, 만약 아내가 끝까지 불 속으로 뛰어들려한다면 남편이 차라리 자신이 뛰어들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아내가 죽게 되면 남편의 삶도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불 속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힘은 그 불 속에 있는 누군가를 향한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도 하느님을 세상의 불속으로 뛰어들게 만든 어머니가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왜 오셨을까요?

오늘 복음이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어머니가 외아들의 죽음으로 매우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은 이제 땅에 묻혀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처지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물론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그리고 어머니께 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예수님은 아들의 죽음보다는 어머니의 슬픔을 보고 아들을 살려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연민에 그리스도의 자비가 더해지니 죽은 이가 부활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게 된 이유가 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슬픔이었던 것입니다.

한 어머니가 온 인류의 죽음 때문에 매우 괴로워하고 계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이런 상황이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상징적으로 연출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분은 성모 마리아밖에 없습니다. 포도주는 성령,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혼인잔치의 생명은 역시 포도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모 마리아를 위로해주시기 위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카나의 기적은 오로지 성모 마리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다시 마시게 된 잔치의 손님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그런 기적을 얻었다고 자만한다면 그 기적을 베풀어주신 분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요? 성모 마리아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죽음을 앞두고 괴로워하시는 성모 마리아의 고통이 세상 구원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이름만으로 하느님의 끊긴 은총을 불러오게 만드는 힘입니다. 우리도 만약 누군가에게 은총을 중개하고 싶다면 그 누군가에 대한 어머니와 같은 연민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의 기적을 불러오는 힘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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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19년 9월 17일
  |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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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젊은이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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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나인이라는 곳에 가시다가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다.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슬픈 상황이다. 동정녀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만나신다. 백인대장의 경우에는 병을 고쳐달라는 청을 받으시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부탁드리지 않았는데 주검 가까이 가신다. 예수님은 과부에게는 눈물을 빨아들이는 해면이 되셨고, 아들에게는 생명이 되셨다.

죽은 사람이 땅에 묻히러 가고 있었다. 친구들이 그를 무덤에로 메고 가는 길이었다. 이 상여 길에서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분은 죽음과 부패를 파멸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죽을 운명의 우리 육신을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분이시다. 그분은 과부의 눈물이 그치도록 자비를 베푸신다. “울지 마라.”(13절) 여인을 울게 했던 원인이 그 말씀과 함께 사라졌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기쁨에 함께 하시며, 결국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슬픔을 함께 나누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시고 상여를 멈추셨다(14절). 그리고는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14절)고 명령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 젊은이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셨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 아들이 어머니 품에 안기게 되었다(15절).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손을 대시어, 악행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온갖 육신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자.

예수께서는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소외 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심을 이 사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구원은 우리 인간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에게 내려지지만, 그것을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몫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들의 반응을 보면 처음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로 바뀐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16절)고 한다.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살아났으며, 그 기적은 온 유대아와 그 주변 온 지방에 퍼졌고 모두가 감탄했다. 놀라운 기적 앞에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가 항상 조그만 일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변할 수 없다. 나 자신의 진정한 변화의 기적을 청하도록 하자. 그리고 감사하는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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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9년 9월 17일
  |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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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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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루카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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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는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다는 점이, 더욱이 그 외아들이 ‘젊은이’라는 점이(14절) 특별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사별’ 자체는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 세상의 현실이고, 일상적인 일 - 특별하지 않은 일 - 입니다.

그래서 이 상황을,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들의 현실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울고 있는 과부가 바로 ‘나’일 수도 있고, ‘나의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무서운 일이고, 슬픈 일이고, 허무한 일입니다.우리는 죽음 앞에서 절망할 때가 많고, ‘내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를실감하게 되고, 죽음으로 인한 이별 때문에 크게 슬퍼합니다.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내세’에 대한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상이 또 있다는 믿음,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는 믿음,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믿음이 있다면, 먼저 떠난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이 믿음과 희망은 ‘사별’의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믿음도 희망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인생은 허무하다는 생각만 하면서 살 것이고, 현세에 대해서만 집착하게 될 것이고, 목적지 없이 방황하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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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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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뿐만 아니라‘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마르 6,34).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라는 말은,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게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인간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셨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요한 11,33).”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하고 말하였다(요한 11,35-36).”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마리아가 울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죽음 앞에 서 있는 나약한 인간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또 예수님은 라자로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에게 하신 말씀, “울지 마라.”라는 말씀은, 단순한 위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묵시 21,4)”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우리를 가엾게 여기셔서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고, 동시에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를 슬픔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말씀은,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말씀, 즉 다시 살리시는 말씀인데, 우리는 “일어나라.”라는 명령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명령은 ‘스스로’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도 무덤 속에 누워 있는 라자로에게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한 11,43).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다시 주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지만, 생명을 다시 얻은 사람이 ‘일어나는 일’은, 또는 ‘무덤에서 나가는 일’은, 죽었던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당사자가 일어나기 싫다고 하면, 또는 무덤에서 나가기 싫다고 하면, 그냥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 일을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과 우리가 신앙생활로써 그 일에 응답하는 것을 상징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알려 주시고, 인도하시는 일인데,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리고 들어가는 일도 없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라는 말은, “그 젊은이를 살리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는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받아서 누리기 위한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인간들의 생로병사의 고통은 여전하지 않은가?”

겉으로만 보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또 우리 자신의 부활도 믿고 있습니다. 또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며,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전과 예수님 후의 인간 세상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우리가 ‘서기’를 연호로 사용하는 것은, 예수님 강생 전과 강생 후의 인간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들의 세상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신앙인은- 새로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의 인생은 믿음을 갖기 전의 인생과는 완전히 다른, 완전히 새로운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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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19년 9월 17일
  |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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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강론

홀 수 해

짝 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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