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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부부관계가 자녀의 양식입니다.
조회수 | 608
작성일 | 15.09.15
작년에 사랑하는 친구가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친구는 참으로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병이 깊다는 것을 안 친구는 가족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을 아파하면서 그들이 새 가정을 꾸밀 수 있도록 자신이 멀리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엄마와 아내는 ‘무엇을 주어야만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 ‘있어서 좋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족한테는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항상 그들을 바라보고 용기를 주고 칭찬해 주고 귀여워해 주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결같은 믿음을 주는 그런 존재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 엄마요 아내라고 말입니다. 가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어옵니다. 저는 다음 기도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기도’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온화한 미소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상냥한 말과 친절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기쁨 속에 사는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분수에 맞는 검소한 삶과 기도의 모습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소망과 이상입니다. 주님, 가진 것은 없지만 자녀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주님, 이것이 저희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임을 명심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자녀들은 부모님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만 봐도 저절로 큽니다. 부모님의 분위기가 자녀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한 어머니에게 아들을 되살려 돌려주셨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우리 아이를 살려주시고 다시금 우리 품에 안겨주신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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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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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오전 11시, 상황이 허락하는 한 저는 라디오 채널을 105.3(서울 지역)으로 맞춥니다. 존경하는 안병철 신부님의 ‘성서 못자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때로 명쾌하게, 때로 자상하게, 때로 아주 쉽게, 때로 아주 감명 깊게 진행되는 신부님의 신약성서 강의를 듣다보면 1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며칠 전 방송에서 신부님께서는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과 관련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의 강도가 아무리 큰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겪는 슬픔의 깊이가 아무리 깊은 것이라 할지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 아물고, 다 지나간다는 요지의 말씀을 이렇게 해주셨습니다.

“장례식 미사를 집전하다보면 어떤 유족들의 슬픔은 하늘을 찌릅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한 고통과 상처가 너무나 커서 정신을 잃기도 합니다. 쓰러지기도 합니다. 슬픔이 너무 커서, 상처가 너무 깊어서 울부짖는 분들을 바라보며 ‘저 사람, 저러다가 따라 죽겠구나’ 하는 마음에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1년 후 쯤에 그 ‘따라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보면 잘 살고 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짱한 얼굴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슬픔은 세월과 더불어 천천히 치유가 된다는 신부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외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나인성의 과부가 직면한 슬픔은 보통 우리가 겪는 슬픔과는 질적으로 다른 슬픔, 그 색깔이 완전히 다른 슬픔이었습니다.

남성 중심의 유다 사회, 가부장적인 유다 사회 안에서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된다는 것, 그것만 해도 거의 죽음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아내 홀로 경제적 독립이 힘들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 안에서 과부가 겪었던 고초는 지금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부에게 그나마 위안거리가 있었다면 유일한 피붙이였던 외아들이었습니다. 과부에게 있어 외아들은 유일한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과부는 그저 그 외아들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 외아들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과부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겠지요. 초상을 치루는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과부는 더 이상 살아갈 힘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과부가 겪은 그 짙은 슬픔, 한없이 깊은 심연의 슬픔을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그리고 과부에게 다가가십니다. 과부의 눈물을 보시고 함께 눈물 흘리십니다. 따듯한 위로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울지 마라.”

그리고 과부에게 다시 한 번 새 삶을 허락하십니다. 외아들의 죽음과 함께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던 과부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외아들을 살려주심으로서 외아들뿐만 아니라 어머니 과부까지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과부의 깊은 슬픔에 연민을 느끼고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묵상해봅니다.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아닌’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우리가 착하고 모범적이어서, 우리가 선행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에 사랑해주시고 구원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결핍, 부족함, 불쌍함, 측은함, 띨띨함, 처량함, 한심함, 한계, 결점, 죄, 상처... 이란 것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어쩔 수 없이 늘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돌아갈 곳은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한없는 부드러움으로 감싸 안아주시는 하느님의 품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드릴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주님, 오늘도 제 이 부족함을 굽어 살펴주십시오.
주님, 오늘도 제 이 나약함을 어여삐 보아주십시오.
제 깊은 슬픔을 외면하지 마시고 제게 다가와 주십시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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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가까운 분들의 임종을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내가 한 복지시설의 봉사자로 있으면서 몇 번 보게 되었다. 한 번은 지체장애 할아버지의 임종을 보게 되었다. 병원까지는 의자에 꿋꿋이 앉아 가셨는데 응급실에 모시자마자 혈압이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맥박을 재던 간호사는 의사를 불렀고,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겼다. 그리고 30분도 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그것도 아주 평안하게. 그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죽을 수 있다면 죽음도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아니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늘 한 과부의 외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이 인생의 길이라지만 이 장례는 더욱더 슬퍼 보인다. 과부의 외아들! 그 아까운 젊은이를 잃은 슬픔이 이 장례행렬을 짓누르고 있다. 그런데 이 행렬은 또 다른 행렬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예수님과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분위기다. 그렇다! 죽음의 행렬 앞에 생명의 행렬이 나타난 것이다. 죽었던 한 젊은이가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죽음이다. 물론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언젠가 다가올 죽음은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두려움일 뿐이다. 그러나 성서는 죽음의 행렬 앞에 삶의 행렬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예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행렬이다. 장례행렬은 예수님의 행렬을 만나 해체되고 감격의 행렬로 흡수되어 새로운 공동체로 하나가 된다.

▤ 강성덕 목사 (경기도 덕혜원)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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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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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죽음도 사랑도 이별도 생명의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생명의 주님을 모른 채 살았습니다. 일으켜 세우시고 일어나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그 어떤 생명도 버려지는 일이 없습니다. 소중한 사랑을 되돌려 놓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생명 없는 이별, 사랑 없는 이별을 아파합니다. 사그라들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다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젊은이의 사랑을 다시 살리십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빼앗아 갈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은 지금 여기 이곳에 함께 합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사랑하게 하시는 다시 살게 하시는 사랑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루카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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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19년 9월 17일
  |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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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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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서 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타볼산을 만나게 되고 에스드렐론 평야로 접어듭니다. 좀 더 내려가다보면 사마리아 지방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 길가에 나인(Nain)이라는 작은 성(城)이 있었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40Km, 나자렛에서는 남동쪽으로 10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으니,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오늘 날까지도 네인(Nein)이란 이름의 작은 마을로 남아있습니다.

‘나인’(Nain)이란 말의 의미는 원래 ‘기쁨’ ‘환희’ ‘즐거움’이었습니다. 결국 나인성은 ‘기쁨의 고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카파르나움을 거쳐 나인성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신 날은 고을 전체가 기쁨, 환희, 즐거움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울적한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나인성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아직 갈 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외아들이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데, 유족이라고는 과부였던 그의 어머니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요절했고, 동시에 외아들마저 요절했으니, 이보다 더 기구한 인생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해도 해도 너무한 통념이 하나 있었는데, 요절을 죄에 따른 벌로 간주한 것입니다. 안 그래도 남편과 아들을 잃고 슬픔이 하늘을 찌르는데, 중죄인 취급까지 당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사실 남편이 요절한 이후 어머니에게 외아들은 삶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 삶 전체였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냉랭하고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그저 아들만 바라보며 견뎌왔습니다. 그런 아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의 인생 역시 끝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인성을 들어설 때 마주쳤던 상황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기쁨의 고을이란 이름의 나인성은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름이 지닌 바처럼 환희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나인성은 한 인간 존재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죽은 외아들의 관을 메고 걸어오던 사람들의 얼굴 역시 비통함과 상실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절묘하게도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나인성에서 ‘딱’ 마주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언행을 유심히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혹독한 현실 앞에, 그 누구도 입 하나 뻥긋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 과부를 위로 해 달란다거나, 외아들을 되살려 달라고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나서신 것입니다.

그저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는 한 인간 존재 앞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의 정을 느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신다거나 도움을 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당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십니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 행동하십니다. 관으로 다가서선 예수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고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복음 7장 14절)

예수님에 의한 죽었던 외아들의 소생 사건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 죽음조차 지배하고 주관하시는 참 메시아시며, 참 하느님이심을 선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 안에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람조차 되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입증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은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이심을 선포한 사건입니다.

소생 사건은 죽음보다 더한 큰 슬픔에 잠긴 한 인간을 향해 하느님께서 어떻게 다가오시고, 어떻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시는 가를 세밀하게 보여준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소생 사건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니신 모든 능력을 오로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데 사용하신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자비로운 소생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나인성의 과부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다양한 슬픔과 시련, 작은 죽음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기진맥진한 삶 속에도 신비와 희망이 공존한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거듭 부서지고 허물어져, 한없이 비참해진다 할지라도, 그 비참함을 묵묵히 견디다 보면, 또 다시 새벽이 밝아오고, 또 다시 작은 희망의 문이 살짝 열릴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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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2019년 9월 17일
  |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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