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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조회수 | 418
작성일 | 15.11.08
[수도회]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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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원하는 것이 회개와 용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개는 언제나주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엇보다 생명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그래서 우리가 잊고 사는 용서를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용서는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끝없는 사랑입니다. 용서는 살아있는 오늘을 더욱 살아있게 하는 가장 아름다운 평화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언제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봉헌하는 회개의 사람만이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임을 알게 되며 하느님의 소중한 계획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만이 이웃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함께 사는 상생의 길은 회개와 용서의 길입니다. 생명은 회개와 용서로 더욱 뜨거워집니다. 서로의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회개와 용서의 위령성월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회개와 용서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오직 하느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성장과 변화로 우리의 시간이 더욱 행복해지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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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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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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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에게만 베푸신 특혜, 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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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하는 희대의 끔직한 사건들을 접할 때 마다 드는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착한 유전인자만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저런 반인륜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만드시는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착하고 모범적이고 ‘품질 좋은’ 1등급 인간들만 규격품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희대의 살인마들을 만드셔서 오늘 우리를 ‘맨붕’ 상태에 빠트리실까?

안 그래도 원죄를 지니고 태어났으므로 죄의 유혹에 쉽게 휘둘리는 것이 우리 인간 존재입니다. 비록 자주 선을 인식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악을 되풀이합니다. 고상하고 가치 있는 대상을 선택해야한다고 마음먹지만 삶을 바닥을 헤맵니다. 이성이 감각에 굴복하고 사랑이 이기주의에, 겸손이 자만에 압도당합니다. 나약한 인간존재의 한계를 절실히 느낄 때 마다 차라리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서 그런 악한 유전인자들을 쏙 빼버리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 설계도에 따라 자유의지가 없는 피조물로 창조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우리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표시로 자유의지와 이성과 자기결정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자유의지와 이성과 자기 결정권을 베푸셨는데 이는 우리 인간에게만 베푸신 특혜요 총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오직 우리 인간에게만 고유한 품성과 위엄을 선사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자유의지와 이성과 자기 결정권을 빼버리셨다면 우리 역시 본능과 생존욕구, 번식 욕구에 따라 살아가는 어류, 파충류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간 각자의 구원과 저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은 절대로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우리 인간 각자의 자유의지에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각자가 하느님의 초대 앞에 어떻게 처신하는가 여부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강렬한 구원의지 앞에 우리 인간 각자의 적극성과 열린 마음이 정말이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죄 중에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하는 죄’도 꽤나 큰 죄입니다. 누군가를 평생토록 누군가를 용서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은 죄에 앞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체험을 통해서 잘 파악하고 있듯이 용서 없이 내적인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용서 없이 하느님 체험도 요원합니다. 용서 없이 진정한 구원도 없습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현실을 잘 헤아리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력한 권고 말씀을 건네신 것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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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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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루카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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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와 “남을 죄짓게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두 문장의 차이를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오늘 말씀의 첫 문장인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를 잘못 이해하면, 마치 우리의 삶은 남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게끔 되어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반드시 그러한 상황이 주어진다는 것이지, 반드시 남을 죄짓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영어번역본을 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죄를 짓게 하는 일들은 피할 수 없이 일어난다.” (Things that cause sin will inevitably occur.) 다시 말하면 남들에게 죄를 짓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죄짓게 하는 상황은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삶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에 굴복해서, 남에게 죄를 짓게 하는 이들은 불행하다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다. 차라리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는 무서운 말씀까지 덧붙이신다.

그런데,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쉽게 생각하자. 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지은 죄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지은 죄도 그 죄는 서로 연결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내 죄로 인해서 타인마저 죄에 빠지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직접적으로 타인을 죄짓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둘 모두 내 죄에서 비롯된다. 결국, 내가 스스로 죄를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이 아닐까? 나만 죄를 짓고 죄값을 치르겠다는 어설프게 숭고한 척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지은 죄는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죄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도 죄를 지으며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 생겨난 죄라면, 하느님께서는 용서해주실 것을 믿는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죄에 대해서 참되게 뉘우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죄를 짓게 하는 상황은 늘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기도를 통한 자기 싸움밖에 없다. 기도해야 한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달라 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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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 선교 수도회 김대열 신부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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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짓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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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회개 사이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회개는 용서를 용서는 믿음을 더하게 합니다.
용서와 믿음을 먹고 사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용서와 믿음은 서로를 깨어있게 하는 생명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용서와 믿음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용서와 믿음을 더하여 주십니다.
용서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에 갇혀 있는 우리를 풀어주어 다시 깨끗하게 해줍니다.

위령성월은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합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며 생생한 용서로 이끌어 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용서의 마음이 없다면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용서를 향하는 믿음의 시간 되십시오.
용서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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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19년 11월 11일
  |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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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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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간 내내 첫번째 독서로는 지혜서가 봉독됩니다. 이 책의 보다 완전한 이름은 ‘솔로몬의 지혜서’입니다. 지혜서의 본문 안에는 독자가 누구인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지칭하는 독자는‘세상의 통치자들’이지만, 내용상 독자층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로 확장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 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장 말미에서 솔로몬은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없이 맑다는 말입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인류역사상 지혜롭기로 따지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낮춥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고백하면서 겸손되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서 오는 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지혜서 9장 5~6절)

요즘 정계나 학계에서 국민들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는 듯, 정말이지 참아주기 힘든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아주 고압적이고 교만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양, 따져대고 가르치는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참된 지혜의 덕이 겸비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주님의 성령 안에 살아가기에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늘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겸손합니다.

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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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19년 11월 11일
  |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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