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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전주] 겸손과 교만
조회수 | 656
작성일 | 15.11.08
[부산] 겸손과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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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불상을 지고 다니는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이 당나귀는 자기를 보는 사람마다 절을 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잔뜩 교만해졌습니다. 이렇게 당나귀가 오만방자해지자, 주인은 당나귀에게서 불상을 치워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사람들이 자기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당나귀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인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고 다니는 불상에게 절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우화는 교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이란 거짓에 속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당나귀는 속은 것입니다. 착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만은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겸손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인정하는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이 겸손을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루카복음 17장은 노예제도를 경험하지 못한 현대인에게는 자칫 인권유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던 2천년전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오늘 내용은 겸손에 대한 탁월한 가르침입니다 : 어떤 노예가 하루 종일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밥부터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인이 편안하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 한다고 해서 주인은 그 종에게 감사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종은 주인에게 “저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2천년전,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소유물이이라면, 물건입니다. 노예는 사고파는 물건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노예는 오로지 주인을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예가 하루 종일 노동을 한 후,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주인이 식사를 하도록 먼저 시중을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당연한 일을 했다고 해서 주인이 노예에게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노예가 주인에게,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고 자신은 쓸모없는 종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종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노예로서의 당연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처신한 것입니다. 이 얘기를 통해 오늘 복음은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고 초대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입니까?

우리인간은 이 지구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지구는 태양주위를 돌고 있는 9개의 행성 중 3번째 행성입니다. 9개의 행성을 거느린 태양이란 항성은 우리 은하계에 속해 있고, 우리 은하계에는 태양과 비슷한 항성이 약 2천억 개 이상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우주 안에는 우리 은하계와 비슷한 은하수가 300억 개 이상 있다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것도 100년 정도 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는 무엇입니까? 그 찰라의 삶도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먼지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우주적인 시간으로 보면, 우리 삶은 한순간 반짝하는 것보다 더 짧은 인생을 살고 갈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조금은 겸손해 질 것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본래 내 것이라고는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보게 되면 우리는 조금 겸손해 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엄청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먼지만도 못한 우리 인간을 하느님께서 무한히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게 되면, 우리는 참으로 인생을 기쁘게 살수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 신앙인들이, “하느님, 인간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랑해 주시나이까?” 하고 부르짖은 이유를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을 참으로 성공적으로, 그리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비결은 바로 겸손입니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겸손의 은총을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히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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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권지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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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종들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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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준다. 오늘날 보수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종의 신분"에 관하여 논한다는 것은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치부(置簿)될 지도 모른다. 굳이 논한다면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의 신분이 법적으로 인정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오늘 비유는 쉽게 이해된다. 품꾼이 보수를 요구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종은 무상(無償)으로 일해야 한다. 종은 주인의 법적인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종의 의무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시는 것일까? 앞서간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16,1-15)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잘 준수한 대가로 넉넉한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율법준수가 재물을 보상으로 줬다는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에 깊이 젖어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람을 주인이신 하느님에 대한 종의 신분으로 설정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의 종이라면,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어떤 보상도 요구할 수 없다. 반대로 하느님만이 인간에게 온전한 섬김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루가 6,13; 마태 6,24)

인간이 하느님께 보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께 큰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곧 빚이 아닌가? 그 빚을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 당시 빚을 갚을 수 없는 채무자가 채권자의 종으로 귀속되는 이치만 봐도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도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던 것이다.(필립 2,7)

결국 예수께서는 종의 신분으로 종들인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착각을 경계로 삼아 예수님의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10절)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그저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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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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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님께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이다.

우리를 불러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당신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이 뜻을 잘 헤아려 착하고 거룩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고, 진리와 정의를 따르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 위험이 없는 범위 내에서만 행하려고 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한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된다면 어제의 원수와 화해할 수 있고 어떤 일이라도 행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카멜레온처럼 변신할 수 있어야 사회에서 출세도 하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께 믿음을 두어야 하는 문제만은 결코 이런 변신이 통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하느님을 모른 체하고 신자라는 것을 숨긴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성당에 다녔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주님을 믿고 받들며’ 살아가느냐(신앙)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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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일 신부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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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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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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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에 나오는 주인은 참으로 인정 없고 차가운 사람입니다. 또 종은 참으로 고달프고 서러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실제 상황이라면, 종은 겸손해지기는커녕 주인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하느님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인들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은 인정 없고 차가운 분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분입니다.

위의 말씀과 완전히 대조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5-37)."

종이 주인을 위해서 고생하는데도 고마워하기는커녕 일을 더 시키는 주인의 모습과 주인인데도 종의 모습이 되어서 종에게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은 완전히 극과 극으로 대조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예수님)은 주님이신데도 우리를 위해서 종처럼 우리에게 시중을 드는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주인이 아니라 종에게 초점을 맞춰서 읽어야 합니다. 이 종은 주인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주인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자랑하지도 않고,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라는 말씀은, 실제로는 주님이 우리에게 고마워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 고마워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라는 뜻입니다. "저희는(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라는 말은, 우리가 실제로 '쓸모없는 종'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또 자기가 한 일을 겸손하게 낮추는 신앙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또 자기가 한 일을 훌륭한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종'이라고 낮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만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마음으로는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또 고마워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 경우에 그 사람의 말은 거짓말이 되고, 그 사람은 위선자가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말은, 맡겨진 임무이기 때문에 수행했을 뿐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일이고, 자신이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을 '구원'의 관점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들은 주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 구원을 위한 일, 즉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입니다. 내가 살자고 하는 일이니, 즉 내가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니 누구에게 생색낼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시키시지 않아도 우리 쪽에서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런 일들을 제대로 한다고 해서 주님의 영광에 무엇이 더 보태지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안 한다고 해서 주님의 영광에 손상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5,48). 주님의 '완전함'은 무엇을 더 보태거나 뺄 필요가 없는, 그 자체로 완전한 '완전함'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해서 구원을 받게 되면, 크게 기뻐하실 것이고, 크게 고마워하실 것입니다.

지금 이 내용을 '탈렌트의 비유'와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탈렌트는 원래 주인의 돈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을 잘한 종들이 바친 탈렌트를 가져가지 않고 그냥 종들에게 주었고, 그리고 더 많은 일을 맡깁니다(마태 25,21.23). 우리가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제대로 하면 우리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고,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고, 더 많은 일을 맡게 됩니다. 일을 제대로 안 하면, 가지고 있던 것마저 빼앗기고,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날 것입니다(마태 25,30). 주님께는 아무런 손해가 없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손해가 됩니다.

지금 이 내용을 아주 단순하게 "신앙생활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하는가?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면서"이게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다."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자녀들이 성실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고마워하고 기뻐합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말씀들은 모두 다 우리 잘 되라고,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시는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복음 말씀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분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의 기쁨이고,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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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15년 11월 10일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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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온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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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처럼, 종일 밭일을 하고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저녁 식사를 마련하고는, 밥상머리에서 온갖 시중을 들고 나서야 남은 것을 먹던 분들이 있었다. 자신보다는 식구들을 위해 종처럼 머슴처럼 일하던 옛날 부모님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다.

어쩌다 맛난 것이 생기면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감추어 두시고, 어쩌다 좋은 것이 생기면 자식들에게 주려고 고이고이 아껴두셨던 분들. 그렇게 키운 자식이 잘 되면 자신은 정작 해준 것이 없다고 부끄러워하던 어머니들. 누가 물으면 의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자신을 낮추던 아버지들. 그분들은 종처럼 일하면서도 기껍게 정성을 다하셨다. 자신들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오직 그것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옛날보다 훨씬 잘살게 된 지금, 종처럼 사는 부모는 거의 없다. 요즘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도 살지만, 자신의 권리도 당당히 찾고 자기의 몫도 알아서 챙긴다. 부모로서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맞갖은 보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어느새 우리는 꼿꼿하고 당당한 사람들이 되었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자세가 종종 하느님 앞에서도 나올 때가 있다. 봉사한 만큼 축복을 받아야 하고 계명을 지킨 만큼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우리 안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말자. 자녀를 위해 행하는 헌신에 의해 부모도 부모다워지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로 인해 신앙인도 신앙인다워진다는 것을.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그런 신앙인, 아니 ‘참인간’이 되는 것이거늘, 그 일을 열심히 했다고 해서 무슨 권리를 따로 주장할 것인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밖에 없다고 하거늘, 많이 베풀었다고 해서 누구에게 달리 보상을 받을 것인가? 그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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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옥 (수원교구 기산 천주교회)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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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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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에서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9절)고 하신다. 그저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0절)고 가르쳐주고 계신다. 한 마디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나서 겸손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일만을 시키지 않으신다. 살면서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참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앞자리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섬기는 일을 제법 잘 했다 하더라도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뽐내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 그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때때로 웃어른의 정당한 지시에 대하여 머리 숙여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는가 하면, 심하게는 낳으시고 기르셨으며 평생을 그 자녀들만을 위해서 염려하시며 애태우시는 부모님들의 간곡한 권고까지도 겸손되이 받아들이기를 외면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어느 조그마한 권력이나 지위에 앉게 되면 더더욱 수하 사람이나 타인이 마치 자기 생각, 자기 원의, 자기 취미만을 채워주기 위해 있어주어야 하는 양 뒤흔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도 알고 자기 직분과 위치가 주는 권위를 드러내야 할 때 분에 넘치는 충동도 꺾을 줄 안다. 교만하지 않으며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영광이나 명예와 권세도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인 다른 이들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사용할 줄도 안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여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10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파괴적인 욕정을 멀리 하도록 만드시려는 뜻이었다. 입으로 영광을 떠드는 자들은 덕행을 실천하여도 그것으로는 아무런 은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갖 덕을 실천하더라도 그것을 자랑삼는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며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또한 주님 앞에 자신을 무로 돌릴 줄 아는 자세도 가져야 하겠다. 우리는 마당을 쓸 때 빗자루를 이용하고 쓸고 난 뒤에는 그 빗자루를 좋은 자리에 고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문 뒤 한적한 곳에 세워 둔다. 즉, “주인이 필요하여 나를 쓰셨고 이제는 내가 할 바를 했으니 내가 차지할 곳은 이곳입니다” 하는 것과 같다. 주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또한 겸손한 봉사자의 모습을 가지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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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9년 11월 12일
  | 11.12
451 38.4%
[수원] 믿음이 있다면 용서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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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부님이 자기 교구의 교인 한 명이 특별한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서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그런 은혜를 받았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신부는 과거에 신학교 시절에 저지른 어떤 죄로 항상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정말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는 물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젊은 날에 죄지은 일로 늘 마음이 괴로운데, 내가 무슨 죄를 범했는지 하느님 앞에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 기도해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후에 신부가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기도해 보셨습니까?”

그가 물론 기도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제가 옛날에 어떤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 신자가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잊어버리셨답니다. 신부님.”

죄책감은 다른 이를 판단하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에 그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서로의 탓으로 판단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먼저 이웃을 판단하게 만드는 나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합니다.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우리 죄가 사해졌음을 ‘믿어야’합니다. 내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이웃을 판단할 필요도 없고 그러면 용서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설혹 용서가 된다고 해도 미워할 또 다른 사람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용서’라는 주제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용서해달라고 하면 매번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믿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하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믿음만이 용서의 힘임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오늘의 비유말씀을 해주십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돌아온 종은 비록 힘이 들지라도 돌아와서 주인의 식사시중까지 들어야합니다. 그런 다음 먹고 마시게 되어있습니다.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그런 모든 분부를 다 수행하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종은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주인의 몫이지 종의 몫이 아닙니다. 종이 잘해서가 아니라 주인이 뽑아 주었기 때문에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종으로써 할 일을 다 하고 나서도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구원이 나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임을 믿는다면 순종하면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는 스페인에서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약속 장소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용서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그분께서 용서해 주셨음을 믿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뉠 뿐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이유는 믿음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 구원이 우리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임을 알게 하기에 겸손하게 합니다. 겸손하다면 자신이 은총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알기에 이웃을 판단할 수 없어집니다. 믿음이 생기면 겸손해지고 겸손해지면 용서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아니 누구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용서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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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19년 11월 12일
  |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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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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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작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를 하였는데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변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근본에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당연히 해야 할 것을 했으면서도 생색내려고 하는 이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직 가야할 길이 멀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데 나는 어떤 모습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리피서 1장 29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사실 세상이 보기에는 쓸모없이 보이는 그 일이 주님보시기에는 필요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실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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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19년 11월 12일
  |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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